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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342화 (342/916)

342화. 늦추다

연나가 입을 벌려서 긴 휘파람을 불자, 날카로운 소리가 석목의 고막을 자극했다.

주위에서 다급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추선대에서 소환된 수많은 사령생물들은 뭔가 명이라도 받은 듯 곧바로 가운데의 교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사방에서 강시와 해골들이 밀물처럼 오조를 향했고, 그 기세가 온 천지를 회색빛으로 물들게 했다.

교룡은 놀라긴 했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꼬리를 힘차게 쓸면서 사령 대군 속으로 들어갔다.

퍼억!

교룡이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을 한가득 뱉어냈고, 그것은 황금색의 바닷물처럼 뿜어져 나와서 천지를 휩쓸며 앞으로 향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령생물부터 하나씩 금빛에 묻혔다가 이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교룡의 발도 쉬지 않고 위아래로 정신없이 움직이며 빛줄기를 뿜어내 온 천지를 뒤덮었다. 그 줄기들은 사령생물들을 무더기로 소멸시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교룡의 꼬리는 거대한 채찍이 되어, 한 번 흔들릴 때마다 뒤에서 공격하려는 사령생물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교룡은 마치 한 마리의 광분한 짐승처럼 막무가내로 사령 대군을 죽이기 시작했고, 짧은 시간에 천여 마리가 넘는 사령생물들이 격파 당했다.

눈앞에서 맹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교룡을 보고 석목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그를 향해 날아가려 했다.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아직 사령 대군이 남아 있는 동안 그들을 등에 업고 싸우는 것이 차라리 현명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때 연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석목을 제지했다.

“움직이지 마!”

석목이 그녀를 보고 말했다.

“사령 대군의 수가 엄청나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야. 이러다가 네 군대가 전부 사라져버릴 거라고.”

“괜찮아. 일단 네 몸부터 회복해.”

연나는 담담히 말하며 다시 눈을 감고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곧이어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은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석목은 멈춰 서서 교룡을 한 번 보고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금색의 비늘 갑옷을 다시 거두었다.

이어 두 개의 중급 영석을 꺼내 양손에 쥐고 진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렀다. 사령 대군은 겁 없이 오조에게 달려들었지만, 그의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어김없이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잠깐 사이에 만여 마리나 되는 사령생물들이 절반이나 소멸됐고, 열 마리가 넘는 지계 사령생물들도 반 이상 죽음을 당했다. 근처의 해역은 백골과 떠다니는 시체들로 뒤덮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교룡의 몸에서 뿜어내는 금빛도 많이 어두워졌다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공격을 받고 기세가 조금은 꺾인 듯했다.

퍼억!

다시 한 번 교룡이 숨결을 토해냈다. 그러자 스무 마리쯤의 사령생물들이 한 순간에 먼지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교룡의 몸에서 나오는 금빛도 떨리더니 좀 더 어두워졌다.

그는 큰 외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밀물처럼 몰려오는 사령대군에 의해 체내의 법력이 꽤 많이 소진됐다.

오조의 눈길이 멀리 떨어져 있는 연나와 석목을 향했다. 이어 한 줄기 빛이 그의 눈에서 맴돌았고, 아마도 전략을 바꾸려는 듯했다.

그 순간 교룡의 등 뒤에서 투명에 가까운 해골이 번쩍이며 나타났고, 그의 손에는 두 개의 투명한 뼈 칼이 쥐어져 있었다.

그 해골은 빛의 속도로 교룡의 꼬리 부분의 검게 변색된 부위를 공격했다. 그곳은 섬돈수의 맹독에 의해 썩어버린 부위였다.

퍽!

투명한 뼈 칼이 찔러 들어오자 오조는 커다란 고통을 느꼈고, 분노에 차서 소리를 내지르며 거대한 꼬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수정 해골은 저 멀리까지 날아갔다.

이어 교룡의 꼬리가 다시 빛처럼 뻗어나가더니 미처 피하지 못한 수정 해골을 단번에 감았다.

칵!

수정 해골의 몸은 엄청난 압력에 의해 순식간에 뼛가루가 되어버렸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교룡은 낮게 신음소리를 내더니, 몸뚱이에서 금빛을 뿜어내어 몰려오는 해골들을 저 멀리 뿌리쳤다. 이어 그의 거대한 몸뚱이가 사령대군들 속에서 하늘위로 솟아오르더니 연나를 향했다.

그가 막 날아오르려 하는 순간, 앞쪽에서 회색빛이 번쩍이더니 네 마리의 지계 사령생물이 앞을 막아섰다.

한 마리는 몸뚱이가 칠팔 장은 되어 보이는 검은 뼈 새였고, 다른 한 마리는 몸에 가시가 가득 자란 뼈 호랑이였다. 또 다른 한 마리는 손에 큰 뼈 창을 든 금색 갑옷의 사령 무사, 그리고 마지막 한 마리는 몸집이 거대하고 검은 갑옷을 입은 해골로 손에 검은 뼈 칼을 쥐고 있었다. 그는 바로 무야였다.

이 네 마리의 사령생물들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지계의 강자였다. 그들은 대군의 뒤편에 서 있다가 교룡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자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을 하려는 참이었다.

뼈 새가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자 앞쪽에서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수십 갈래의 검은색 바람의 칼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뼈 호랑이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며 쏜살같이 달려왔고, 큰 입으로 교룡의 발을 깨물었다.

이어 금색 갑옷을 입은 사령 무사가 거대한 뼈 창을 휘둘렀다. 자색 연기를 뿜어내는 뼈 창이 교룡의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무야의 두 눈에서는 보라색 불길이 이글거렸다. 그는 소환된 사령생물 중 가장 강력한 존재였다. 그는 손에 쥔 검은 뼈 칼을 흔들며 회오리바람으로 변신, 정면으로 교룡의 머리를 공격했다.

“이런 잡스러운 것들! 모두 물러나라!”

교룡은 눈에 불을 켜고 격노하여 소리를 질러댔다.

만약 이 네 마리의 지계 사령과 얽혀버리면 주위의 사령들이 이 틈을 타서 공격해올 것이었다. 물론 두렵지는 않았지만, 그런 상황에 처하면 적잖은 힘이 소진될 것이 뻔했다.

교룡의 두 앞발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발들은 하늘을 찢는 소리와 함께 각각 뼈 호랑이와 금색 갑옷을 입은 사령 무사를 향했다.

동시에 교룡의 꼬리가 잔영을 그리더니, 자신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검은 바람의 칼과 뼈 새를 내리쳤다.

퍼억!

이어 그는 또 다시 금색의 숨결을 한가득 뱉어냈고, 그것은 앞에서 달려드는 무야를 향했다.

쿵! 쿵! 쿵!

서로 부딪히는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얽히고설킨 빛들이 부딪히면서 다시 사방팔방으로 흩어졌고, 그 속에는 금색 교룡과 네 마리의 사령생물들이 얽혀 있었다.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자 주위에서 경지가 낮은 수많은 사령생물들이 부서져버렸다.

눈 깜박할 사이에 빛들이 사라졌고, 그 안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뼈 호랑이와 사령 무사는 여전히 교룡의 발에 묶인 채, 수정 해골처럼 압력에 의해 박살이 났다.

하지만 사령 무사의 손에 쥐여 있던 거대한 뼈 창은 교룡의 복부를 찔렀고, 교룡의 상처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검은 뼈 새가 내보낸 바람의 칼은 온데 간 데 없이 사라졌고, 몸뚱이는 교룡의 꼬리에 의해 절반이 부서진 채였다. 뼈 새는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전투력은 상실한 상황이었다.

무야만이 교룡의 숨결을 피해서 오조의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그는 손에 든 검은색 뼈 칼로 교룡을 머리 꼭대기 위에서부터 내리찍었다.

퍽!

공격을 받은 교룡의 뿔에 균열이 생겼다. 검은색 뼈 칼이 교룡의 머리에서 가장 취약한 피부를 찌른 것이었다.

교룡의 머릿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힘이 솟구치더니, 이내 눈앞이 캄캄해졌다.

하지만 오조는 순식간에 다시 정신이 돌아와서 커다란 입으로 무야의 몸뚱이를 물었다.

“죽어라!”

오조가 발톱으로 무야의 몸뚱이를 찢어버리기 직전, 갑자기 무야의 몸이 회색빛을 뿜어내며 그대로 터져버렸다.

펑!

무야의 하반신은 회색 화염에 의해 불탔고, 상반신은 그대로 튕겨서 바다로 날아갔다. 무야의 모습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조는 흠칫 놀라더니 무야의 몸이 날아간 바다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뒤를 쫓지는 않았다.

네 마리의 지계 사령들이 덤벼들고, 노발대발한 오조가 그들을 하나씩 쳐부수기까지는 불과 몇 호흡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교룡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금빛은 눈에 띌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게다가 복부와 머리에서는 피가 솟아나오고 있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교룡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리고 몸의 상처를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듯 거대한 몸집을 흔들더니, 몸 주위로 금빛 막을 둘러서 덤벼드는 사령생물들을 튕겨냈다.

그리고 다시 연나와 석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지계의 강자들이 사라지자, 교룡의 길을 막아서던 나머지 중하급 사령생물들은 전부 힘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운철흑도를 꽉 거머쥐었다.

윙!

운철흑도는 눈부신 흙빛을 뿜으며 십 장 길이의 검은 칼이 되었다.

바로 그때, 연나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눈은 평온했고, 지계의 부하들이 전멸했는데도 불구하고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내게 시간을 벌어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나의 몸속에서 은색 빛이 발산되더니, 은백색 화염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빛 속에서 한 벌의 갑옷이 떠올라 그녀의 몸에 서서히 달라붙기 시작했다. 이어 은색 화염을 뿜어내는 여인의 법상이 그 뒤에서 유유히 떠올랐다.

연나가 두 팔을 흔들자 자색 화염이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왔고, 등 뒤에 있는 은색 갑옷을 입은 여인 법상의 몸에 스며들었다.

휘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울리자 여인 법상의 손에 자색의 긴 창이 나타났고, 그것은 상당히 맹렬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석목은 놀라서 순식간에 동공이 작아졌다. 그는 사령계에서 이와 비슷한 광경을 목격한 바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은색 갑옷의 여인 법상은 그때에 비해 형체가 몇 배나 더 뚜렷했다. 게다가 자색의 긴 창이 뿜어내는 기운은 공포 그 자체일 정도로 강력했다.

석목은 다시 눈길을 돌려 앞에서 달려드는 금색 교룡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의 눈에 결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석목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하늘을 찢는 듯한 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이 금색 비늘 갑옷으로 감싸였고, 등 뒤에서 불빛이 번쩍이더니 거대한 날개가 나타났다. 그의 몸 전체가 붉은 그림자가 되어 교룡을 향했다.

오조는 연나와 그 뒤의 여인 법상을 번갈아보았다. 그의 두 눈에 두려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때 붉은 그림자가 된 석목이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날아와서 두 손으로 잡은 칼로 교룡을 내리쳤다.

이어 석목은 체내의 진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등 뒤에 붉은 원숭이의 허영이 떠올랐고, 그의 왼손은 먹물처럼 어두웠는데, 하얗게 타오르는 화염이 팔을 타고 운철흑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운철흑도의 검은 칼날 위에 순식간에 흰 빛이 나타났다.

검은 빛과 흰 빛이 얼기설기 얽히자 그 위력이 두 배로 커졌고, 맹렬한 기운이 더욱 짙어져서 마치 공기마저 흔들리는 듯했다.

오조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석목의 공격에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듯했다.

이때 오조인 교룡의 발이 불쑥 나오더니 자신의 몸통을 찌르려는 칼을 덥석 잡았다.

퍽!

칼은 단번에 부러졌지만 교룡도 발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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