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다시 창원왕을 만나다
석목은 채아의 안내를 받으며 섬 깊은 곳에 있는 창원왕의 거처에 도착했다.
관목으로 인위적으로 가꾸어진 숲길을 벗어나자, 크지 않은 마당의 깊숙한 곳에 나무로 만들어진 가옥이 보였다.
정원에 들어서기도 전에 푸른 옷을 입고 백발이 창창한 노인이 그 가옥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웃으며 석목을 반겼다.
“석 도우, 이 늙은이를 꽤나 기다리게 했군.”
노인은 석목을 안쪽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고향에 돌아가서 개인적인 일들을 처리하느라 늦었습니다. 선배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석목은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그간 겪은 일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허허, 일 년 뒤에 보자는 약속이었는데, 아직도 시일이 많이 남아 있네. 어쨌든 왔으면 된 거지. 내가 식사와 함께 환영의 자리를 마련하겠네.”
석목이 자리에 앉자 창원왕은 직접 차를 따르며 말했다.
“선배님, 우리 사이에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석목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하하, 알겠네. 나는 이래서 석 도우가 좋아. 보아하니 자네는 준비가 다 된 듯하군?”
석목의 말을 듣자 창원왕은 손뼉을 치면서 웃으며 말했다.
“네, 저는 이미 남해성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선배님이 말씀하신 성역의 세계에서 무언가 이루어보려고 합니다.”
석목이 말했다.
“그렇지.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위험을 피할 수 있네.”
창원왕은 머리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니 빠르게 이곳을 떠날 수 있도록 선배님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석목이 답했다.
“그야 당연하네. 하지만…….”
창원왕은 말을 이어가려다 멈추었다.
“선배님, 걱정 마십시오. 약속한 일은 잊지 않았습니다. 지금 바로 구전현공 첫 단계의 앞부분을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석목은 웃으며 말했다.
“좋네! 과연 한 번 약조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군.”
창원왕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석목은 더 말을 잇지 않고 몸을 일으켜 창원왕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두 손을 교차하여 몸 앞에서 겹친 후, 다시 두 손으로 양쪽의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갈래의 금빛 광채를 끄집어냈다.
이어 석목은 두 갈래의 빛을 합친 뒤, 한 손으로 창원왕의 미간을 짚었다.
창원왕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다시 꼿꼿이 서서 석목의 손가락을 받아들였다.
윙!
빛이 반짝이는 순간 창원왕은 머리가 터질 듯했다. 미간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가 막 입을 열어 석목에게 영문을 물어보려 하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리고 오묘한 글씨가 뇌리에 뚜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거친 기운으로 인해 그의 몸이 흔들렸다.
창원왕은 말없이 두 무릎을 교차하여 앉더니 머릿속에 떠오른 문자들을 되새기며 수행을 시작했다.
곧바로 그는 체내에서 미세한 울림이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 그의 혈맥이 격렬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기운이 많이 쇠한 상태였던 그의 몸은 갑자기 생명수라도 가득 부어넣은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잠시 후, 이런 느낌은 천천히 줄어들더니 사라졌다.
창원왕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두 눈에는 기쁨의 기색이 가득했다. 북실거리는 수염마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첫 단계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럼에도 다시 생기를 찾은 것 같군. 실로 유용한 신공이라 할 만하구만.”
창원왕은 뭔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투로 말했다.
그런 창원왕을 바라보는 석목은 속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창원왕은 이 구전현공을 통해 자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기뻐할 리가 없었다.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저를 남해성에서 벗어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석목이 말했다.
“알겠네. 우선 내 오래된 친구를 소개시켜주지. 그는 해족의 대장로인데, 전송진을 가동하려면 그의 허가와 도움이 필요해.”
창원왕은 말했다.
“그렇군요. 그분은 여기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계십니까?”
석목이 물었다.
“허허, 반나절이면 충분히 갈 수 있네. 내가 이곳에서 자네를 만나자고 한 이유지.”
창원왕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석목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참, 그나저나 석 도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네.”
창원왕은 무엇인가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석목이 답했다.
“보아하니 이 영총과 몹시 친밀해 보이는데, 함께 남해성을 떠날 셈인가?”
창원왕이 채아를 가리키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이 늙은 원숭이! 나는 석두와 깊은 정이 있어.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은 하지 마!”
채아가 창원왕의 말을 듣고 다급하게 외쳤다.
“가능하긴 하지만, 영수 주머니가 필요하네. 보아하니 이 영총의 경지가 너무 낮아서 전송진을 통과하기가 어려울 게야. 영수 주머니의 보호가 없이는 공간의 난류에 의해 죽을 게 뻔해.”
창원왕이 말했다.
“그럴수가……. 석두!”
채아가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영수 주머니요? 그게 무엇입니까?”
석목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허허, 석 도우는 모르고 있었군. 영수 주머니도 법기 중 하나지. 기능은 저장법기와 정반대라네. 생명이 없는 물건은 담을 수 없고, 오로지 영수만 담을 수 있는 것이지.”
창원왕이 설명했다.
“그 영수 주머니는 어디서 구할 수 있나요?”
석목이 다급하게 물었다.
“석 도우가 구할 필요는 없네. 내가 가진 게 한 개 있는데, 딱히 쓸 일도 없으니 선물로 주지. 그래서 말인데, 내게 법결의 일부를 더 알려줄 수는 없겠나?”
창원왕은 가볍게 웃으며 오른손을 뒤집더니, 돈주머니 크기의 회색 주머니를 들이밀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법결은 가는 길에 선배님께 전수해드리지요.”
석목은 주머니를 받으면서 말했다.
“좋아, 석 도우가 서두르는 듯하니 이만 출발하지.”
창원왕이 말했다.
* * *
반나절 뒤.
하늘에서 내려온 청익비차가 반경이 십 장도 안 되는 작은 섬에 안착했다.
섬은 어두웠고, 표면은 거울처럼 매끄러워서 조금의 균열도 없었다. 마치 섬 전체가 거대한 검은 암석 같았다.
섬 주위에는 바닷바람이 살랑살랑 불었고 바다는 잔잔했으며, 출렁이는 파도가 가끔 섬 가장자리에 부딪히며 영롱한 물보라를 일으킬 뿐이었다.
검은 섬 위에 내려앉은 청익비차에서 노인 한 명과 청년 한 명이 나왔다. 노인은 백발이 성성했고, 청년은 반짝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의 어깨에는 화려한 색의 앵무새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바로 창원왕과 석목이었다.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날아서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선배님, 여기가 바로 해족 대장로가 있는 섬입니까?”
석목은 주위의 매끄러운 암석을 바라보며 의심하듯 물었다.
“이곳이 맞네. 나도 사백 년이 넘도록 와보지 못했지.”
창원왕이 대답했다.
“사백 년이나 됐다고? 이 늙은 원숭이! 너무 오랜만이라 길도 못 찾는 거 아니야? 여기는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잖아!”
채아가 말했다.
“허허. 그럴 리가…….”
창원왕은 마른 웃음을 짓더니, 검은 바위의 한 편으로 다가가 두리번거리다가 손바닥을 뒤집었다. 그러자 손바닥 위로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타원형의 푸른 영패였는데, 재질은 옥처럼 보였다.
영패의 아래쪽에는 파도 무늬가 있었고 그 위로는 기세가 웅장한 수정 궁전이 그려져 있었는데, 실로 정교해보였다.
창원왕은 한 손으로 영패를 들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패에서 푸른빛이 일더니 차츰 밝아졌고, 창원왕이 매만지는 곳을 비추었다.
푸른빛이 검은 바위 위를 밝히자 빛이 커지더니, 사방을 덮는 빛의 기둥으로 변하여 물결이 일렁이는 해면에 반사되었다.
후!
빛기둥이 밝히자 잔잔하던 해면은 빛기둥이 비치는 곳에서 시작해 양쪽으로 벗겨지듯 갈라졌고, 바다 깊숙한 곳까지 통로가 생겨났다.
“채아, 너는 우선 영수 주머니에 들어가 있어.”
석목은 앞에 나타난 통로를 두고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석두, 나는…….”
석목은 채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리에 달고 있는 회색의 천 주머니를 두드렸다. 그러자 주머니에서 회색 무지개가 나타나더니 채아는 주머니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창원왕은 고개를 돌려 석목을 쳐다보더니 통로로 향했고, 석목은 그 뒤를 따랐다.
바다 밑으로 이어진 통로의 바닥은 투명하게 맑았다. 마치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수정 계단 같았다.
수정 계단 양쪽에는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물의 벽이 있었다. 그러나 투명한 벽에 의해 그곳과 분리된 듯 계단으로는 한 방울의 물도 튀지 않았고, 소용돌이치는 물의 벽 밖에는 물고기들이 빠르게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석목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눈길을 돌렸고, 창원왕을 좇아갔다.
그들이 수정 계단을 밟기도 전에 해족의 해병들이 이쪽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몰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수는 스무 명은 족히 되어보였다.
그들의 가장 앞쪽에는 머리가 푸르고 키가 큰 남자가 있었고, 그는 몸에 금색 갑옷을 두르고 허리춤에는 붉은 칼을 꽂고 있었는데, 풍겨져 나오는 위엄이 상당했다.
“누구냐! 감히 해족의 성역에 들어서다니!”
푸른 머리의 남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 뒤에서는 병사들이 손에 창을 쥔 채 석목과 창원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몽두(蒙图), 넌 점점 네 애비를 닮아가는구나.”
창원왕은 푸른 머리의 남성을 힐끗 쳐다보더니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푸른 머리의 남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경계를 풀지는 않았다.
“제 아버님을 아십니까?”
“나를 못 알아보겠니? 휴우……. 그래, 하긴 사백 년 전에 너는 어린아이였지. 기억을 못하는 게 당연하겠구나.”
창원왕은 긴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는 방금 전에 꺼내들었던 타원형의 푸른 영패를 다시 꺼냈다. 영패의 표면이 반짝이더니 기운이 강해졌다.
수정 계단 양측에 있는 물의 벽에서 갑자기 파문이 일더니 주위의 공기가 진동했고, 해족들은 순간 비틀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그러나 가장 앞에 있는 푸른 머리의 남자만이 듬직하게 서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파동은 잠시 동안 지속되었고, 푸른 영패의 빛이 사라지자 파동도 멈추었다. 하지만 해족의 사병들이 창원왕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당신은…… 창원왕 숙부님이십니까?”
창원왕에게 몽도라 불린 푸른 머리의 남자는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창원왕은 웃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숙부 앞에서 장난치며 놀던 아이가 이렇게 많이 컸구나.”
“창원 숙부님, 알아 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몽도는 허리를 숙이면서 말했다.
“괜찮다. 급한 일로 네 아버지 몽하(蒙蛤)를 만나러 온 것이니 안내하거라.”
창원왕이 말했다.
“숙부님, 공교롭게도 아버님이 며칠간 출타 중이셔서 궁에 계시지 않습니다.”
몽도가 답했다.
창원왕이 놀라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안 계신다고? 그럼 언제 돌아오는지는 알고 있느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은 다급하게 나가셨고, 급한 일을 처리하러 가시는 듯 보였습니다. 숙부님만 괜찮으시다면 수정궁에서 당분간 머물다 가십시오. 제가 깍듯하게 모시겠습니다.”
몽도는 창원왕을 향해 말했지만, 눈으로는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경계하고 있었다.
창원왕은 그 말을 듣고 석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석 도우, 몽하는 해족의 대장로인데 사백년 전에도 이미 해족의 정무에서는 거의 물러난 상황이었지. 근 백 년 동안은 수정궁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갑자기 나간 것을 보니 무언가 큰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면서 다음 행보를 결정하는 게 어떤가?”
그러자 석목이 말했다.
“선배님, 더는 숨길 수 없어서 말씀드립니다만, 백원왕의 천적이 보낸 분신 하나가 이미 남해성에 도착해 있습니다. 천위 경지의 금색 교룡인데 실력이 범상치 않습니다. 저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교룡과 여러 번 맞붙었는데, 매번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가 지금도 저를 찾고 있어서 며칠 내에 쫓아올 것 같은데, 그때가 되어 남해성을 벗어나려 한다면 너무 늦을 겁니다.”
“뭐라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가?”
창원왕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워낙 노회한 인물이라 얼굴에 놀란 빛을 드러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