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해족의 금지구역
“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이곳에서 지체할 이유는 없지. 아버지를 대신하여 이 숙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는가?”
창원왕은 단호한 어조로 몽도에게 물었다.
몽도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숙부님,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도울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나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바로 해족의 오래된 전송진이 필요하다. 나는 여기 있는 석 도우와 함께 해남성을 떠날 것인데, 어떤 큰 대가도 모두 감당할 터이니 가능한 빨리 도와줄 수 있겠는가?”
창원왕이 말했다.
“그건……. 실망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만…….”
몽도는 난감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무엇인가?”
창원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가 거절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 진을 가동하는 신물은 아버님이 보관하고 계십니다. 신물 없이는 아무도 가동할 수 없습니다.”
몽도가 설명했다.
“그럼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가? 내가 직접 찾아가도록 하지.”
창원왕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아버님이 어디로 가셨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몽도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허허, 숙부가 알기로는 네가 최근에 지계 초기의 경지에 발목이 잡혀서 돌파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구나. 아버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구나.”
창원왕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몽도의 안색이 변했다.
“제가 우둔하여 창원 숙부님께 걱정을 끼쳐드렸군요. 만약 숙부님이 수정궁을 떠나지 않고 잠시 머무르신다 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몽도가 말했다. 그는 마음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허허, 파경단(破境丹)이라는 것을 들어봤는지 모르겠구나.”
창원왕이 웃으며 말했다.
몽도는 그 말을 듣더니 순간 눈빛이 흔들렸지만,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하지만 창원왕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몽도야, 정말 공교롭게도 그 파경단이 숙부의 수중에 있단다. 나는 늙어버려서 이 물건이 아무 소용이 없어. 그러니 네가 필요하다면 고민을 한번 해보도록 하마.”
창원왕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깐 멈추더니 다시 몽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몽도의 안색이 편안하게 바뀌었고, 그는 해족 해병들을 향해 손짓을 하며 말했다.
“이곳에는 별일이 없으니 너희는 이제 내려가라.”
“네!”
앞쪽에 있던 해족 한 명이 답하고는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빠르게 물러났다.
“창원 숙부님, 정말로 파경단을 가지고 계십니까?”
병사들이 멀어지자 몽도가 입을 열었다.
창원왕은 웃기만 할 뿐 답을 하지 않고, 손바닥에 하얀 도자기병을 꺼내 들었다. 병의 뚜껑을 열자 순식간에 짙은 향이 그 안에서 흘러나왔다.
“창원 숙부님, 방금 하신 말씀이 진심이십니까?”
몽도는 그것을 보자 얼굴에 희색이 만면해지며 말했다.
“허허, 내가 이 나이를 먹어 젊은이를 속이겠는가?”
창원왕이 웃으며 말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아버님은 며칠 전에 우리 해족의 금지 구역으로 가셨습니다. 다만 전송진은 아버님만 가동할 수 있는 건 사실입니다.”
몽도는 눈을 반짝이며 창원왕의 손에 들린 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래? 그 금지 구역은 어디 있는가?”
창원왕이 말했다.
“이곳 바다를 벗어나 육백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남류가 흐르는 바다가 있습니다. 그곳은 거센 파도가 멈출 날이 없고 회오리바람이 난무하는 곳인데, 검은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섬이 있습니다. 아버님이 가신 곳이 바로 그곳이고, 숙부님이 찾고 계시는 전송진 또한 그 금지 구역과 멀지않은 해역에 있습니다.”
창원왕은 그 말을 듣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손에 있는 도자기병이 몽도의 손으로 넘어갔다.
“허허, 네가 하루 빨리 경지가 올랐으면 좋겠구나. 숙부는 이만 가보도록 하마.”
말이 끝나자 창원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바다 위로 올라간 석목과 창원왕은 다시 청익비차를 타고 날기 시작했다.
“선배님께 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별 것 아니네. 그것은 만약을 위해 준비해둔 것일 뿐이고, 예상보다 빨리 써버렸을 뿐이지.”
창원왕은 차갑게 말했다. 그는 석목이 금색 교룡의 이야기를 미리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쾌해하는 듯했다.
석목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둘은 그대로 말없이 해족의 금지 구역을 향해 날아갔다.
* * *
검은 섬이 해수면 위에 우뚝 떠 있었고, 그 주위로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둥둥 떠다녔다.
그곳은 영기의 파동이 매우 격렬했고, 섬에서는 거대한 흡입력이 느껴졌다. 마치 주변 천지의 영기를 전부 빨아들이고 있는 듯했고, 또 격렬한 영기의 파동이 기이한 기후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동해 해족의 금지 구역이었다.
주변 수십 리의 해역은 해족 대군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지키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새어 들어가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섬의 서남쪽에 있는 해역에서는 한 무리의 해족 사병들이 줄을 서서 순찰을 돌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줄기의 푸른빛이 멀리서부터 급하게 날아오는 게 보였고, 그 빛줄기는 곧 해역에 도착할 것 같았다.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 경계하라!”
우두머리로 보이는 해족 사내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해족들이 서둘러서 무기를 꺼내들었고, 우두머리의 인솔에 따라 그 빛줄기를 향해 다가갔다.
“누구냐! 이름을 말하라! 이곳에서부터 백리 이내는 해족의 금지 구역이다. 그 자리에 멈추어라!”
해족 사내는 다가오는 사람의 기운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실력자가 틀림없었지만,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푸른빛이 천천히 사람들 앞에 멈추어 섰고, 빛이 사라지면서 청익비차와 그 위에 올라서 있는 창원왕과 석목의 모습이 나타났다.
“전송진이 바로 이 근처에 있네. 이곳은 동해 해족의 금지 구역이니 막무가내로 가지 않는 것이 좋겠군. 이 해족들은 고지식하니 석 도우가 나를 좀 도와줄 필요가 있네.”
창원왕은 해족의 우두머리가 한 말에는 답하지 않고 석목을 향해 조용히 말했다.
석목은 의아한 표정으로 먼 곳에 있는 검은 섬을 바라보고 있었고, 순간 그의 눈이 반짝였다.
“석 도우,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창원왕은 석목이 답하지 않자 다시 물었다.
“아, 아닙니다. 선배님의 말씀에 따르도록 하지요.”
석목은 몸을 살짝 떨더니 바로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검은 섬과 가까워질수록 그는 점점 초조해졌다. 마치 무엇인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등 뒤에 있는 운철흑도도 이유 없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곳은 저희 동해 해족의 금지 구역입니다. 자중하십시오.”
해족 우두머리는 얼굴이 붉어져서 말했다.
그러나 석목과 창원왕은 그를 무시하고 둘이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해족 은 화가 났지만, 그 둘의 실력이 비범하다는 것을 느꼈기에 묵묵히 화를 가라앉혔다.
“우리가 누군지는 알 필요 없네. 용무가 있어서 귀족의 몽하 대장로를 뵈러 왔으니 가서 고하도록.”
창원왕은 푸른 영패를 꺼내들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대장로님이 이곳에 계신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해족 사내는 영패를 받지 않고 되물었다.
그러자 창원왕은 안색이 차갑게 변했다. 천위의 존재인 그는 서하대륙에서 사람들의 존경과 두려움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선천 경지도 되지 않는 일개 해족이 여러 차례 되묻자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곧 방대한 기운이 창원왕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고, 그 기운은 순식간에 해족 무리 일행 주변을 자욱하게 덮었다.
해족 우두머리는 얼굴이 순식간에 파랗게 질리더니 몇 발짝 물러섰고, 그는 입가에서 빨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 있는 여러 해족 병사도 곧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석목은 눈빛이 흔들리더니 손을 뻗어 창원왕을 막았다.
“선배님, 화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기에 신경 쓰지 마시고 우리의 갈 길이나 가시지요.”
그러자 창원왕은 석목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화를 가라앉혔다.
그제야 해족 사내의 안색이 돌아왔고, 그는 온 몸이 완전히 풀려버린 듯했다.
바로 그때, 한줄기의 푸른빛이 검은 섬 쪽에서 날아오더니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빛이 반짝이더니 하늘하늘한 소녀의 그림자가 보였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다름 아닌 동해 해족의 성녀 향주였다.
“석 공자님, 정말 공자님이었군요!”
향주는 석목을 바라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향주 성녀님이었군요. 오랜만이에요.”
석목은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향주의 몸에서 풍기는 법력의 파동으로 보아, 그녀는 월계술사가 된 게 분명했다. 보아하니 이미 현월경(弦月境)까지 도달한 것 같았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경지를 올린 것이었다.
“본명방주(本命蚌珠)의 기운이 느껴져서 석 공자님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네요. 그간 어디에 계셨습니까? 제가 계속 찾았는데 도무지 행방을 알 수가 없었어요.”
향주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했다.
“석 도우, 인맥이 범상치 않군. 동해의 해족 중에도 지인이 있었다니.”
창원왕이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향주는 그 말을 듣자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고, 이에 그녀를 바라보는 석목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향주는 그제서야 석목 옆에 있는 창원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서 천위의 기운이 느껴지자 그녀의 얼굴이 확 변했다.
“선배님, 이 분은 동해 해족의 향주 성녀입니다. 예전에 제가 동주대륙에 있을 때 알게 된 사이죠. 향주 성녀님, 이 분은 서하대륙 창원 일족의 창원왕입니다.”
석목은 마른기침을 하더니 두 사람을 소개했다.
“서하대륙? 요족의 선배님이시군요. 인사드립니다.”
향주는 그 말을 듣고 놀라며 창원왕에게 예를 표했다.
창원왕은 웃으며 향주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목이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순간, 멀리서부터 또다시 푸른빛이 나타나서 검은 섬을 향해 날아왔다. 그 빛이 가까이에 도착하자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창원왕을 바라보더니 이내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감히 귀하의 존함을 묻겠습니다. 저희 동해 해족의 금지 구역에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나는 창원왕이라고 하오. 귀족의 몽하 대장로와 인연이 있어 오늘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소. 급한 일이오.”
창원완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든 타원형의 푸른 영패를 흔들었다.
“대장로님의 지인이시군요, 저를 따라오시지요.”
푸른 옷의 여인은 푸른 영패를 보고는 긴장을 풀고,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창원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청익비차에서 뛰어내렸다. 석목이 청익비차를 거두자 발밑에서 하얀 구름이 몸을 받쳐주었다. 석목은 곧장 창원왕의 뒤를 따르려 했다.
그런데 푸른 옷의 여인이 몸을 돌리더니 손을 내밀어 석목을 막아섰다.
“당신은 인족의 수행자이지요? 당신은 이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창원왕께서 동행하셨기 때문에, 이곳에 마음대로 들어온 죄를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여인은 석목을 노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발길을 멈췄다.
“사부님, 이분이 바로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석목 공자입니다. 저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지요. 그리고 야만족의 용사의 문에서도 저를 여러 번 도와주었습니다.”
향주가 다급히 말했다.
“뭐라고?”
푸른 옷의 여인은 그 말을 듣자 이내 안색이 변하며 다시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