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347화 (347/916)

347화. 해족의 금지구역 (2)

“향주의 사부님이셨군요. 석목이 인사드립니다.”

석목의 눈에서도 날카로운 눈빛이 사라졌고, 그는 상대방을 향해 웃으며 예를 다했다.

여인은 월계술사인 만큼 석목이 두려워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움이 필요할 때이니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흥! 인족은 교활하기 그지없다. 믿음이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족속이지. 우리 동해 해족 동포들을 수없이 죽였고, 이미 해족의 적으로 간주 된지 오래다. 차후에 다시는 이 인족과 교류하지 말거라!”

푸른 옷의 여인이 향주에게 차갑게 말했다.

“사부님, 석 공자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동주대륙의 인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해족들을 한 번도 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푸른 옷의 여인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조금은 기세가 누그러진 것 같았다. 하지만 석목의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의 기색이 가득했다.

“향주 성녀의 말이 옳습니다. 저는 몇 년간 서하대륙을 떠돌아다녔습니다. 이번에는 창원왕 선배님에게 중요한 부탁을 드리게 되어 같이 오게 된 것입니다. 무슨 나쁜 의도가 있어서 금지 구역에 들어온 것이 아니니, 결례를 범했다면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석목이 정중하게 말했다.

“그렇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인족의 신분이 아닌가요? 다만 창원왕을 보아 넘어갈 테니, 이곳에서 소식을 기다리도록 하세요.”

푸른 옷의 여인이 차갑게 말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머리를 들어 창원왕을 바라보았다. 창원왕도 무언가 말하려 했다.

바로 그때, 한줄기의 검은 물빛이 멀리서 날아왔다. 그 속도는 향주와 그녀의 사부보다 훨씬 빨라서, 단지 몇 호흡만에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창원왕의 안색이 변하더니 표정이 심각해졌다.

“천위경!”

석목은 그 빛에서 풍기는 기운을 감지하고 살짝 놀랐다.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검은 옷을 두른 노인이 수척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턱 아래로 듬성듬성 자란 흰 수염이 가슴 앞까지 늘어져 있었다.

“창원 도우, 오랜만일세. 무슨 일로 천 리가 넘는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런 외진 곳까지 오셨는가?”

검은 옷을 두른 노인이 창원왕을 보며 말했다.

“몽 형, 오랜만입니다. 경지가 한층 더 깊어지셨군요. 이미 천위 중기의 막바지까지 도달하신 것 같은데, 정말 축하드릴 일입니다.”

창원왕이 웃으며 말했다.

“됐네. 나한테 그런 입에 발린 소리를 할 필요는 없어. 예전의 일이 아직 결론이 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몽하가 말했다.

창원왕은 담담하게 웃더니 푸른 옷의 여인과 향주를 한 번씩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들 물러가 있거라.”

몽하가 푸른 옷의 여인과 향주를 보며 말했다.

“네.”

푸른 옷의 여인은 몽하를 향해 목례를 하더니 향주를 데리고 검은 바위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푸른 옷을 두른 사내와 해족 사병들도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향주는 푸른 옷의 여인에게 끌려가는 동안 계속 머리를 돌려 석목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석목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주위의 분위기를 보고 입을 닫았다.

석목은 한숨을 쉬며 향주의 시선을 피했다.

“이 인족은 자네가 데려온 건가?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나?”

몽하는 석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 자도 관계된 일입니다.”

창원왕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어 푸른색 포장을 펼쳐서 세 사람을 그 안의 공간에 넣었다.

몽하는 하얀 눈썹을 꿈틀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몽 형,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이곳의 전송진을 빌려 남해성을 떠나기 위해서입니다.”

창원왕이 말했다.

“뭐라고! 남해성을 떠난다고?”

몽하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맞습니다.”

창원왕이 머리를 끄덕이었다.

“자네는 백원왕의 명을 받고 능천봉에 상주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남해성을 떠난다니? 그때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건가?”

몽하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말하자면 길지만, 어쨌든 저에게도 부득이한 결정입니다.”

창원왕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어 검은 패를 꺼내 몽하에게 던졌다. 석목의 눈도 그 패를 따라 움직였다.

검은 패 위에는 은색 무늬로 거북이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지만, 영기의 파동을 내뿜지는 않았다.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물건 같았다.

몽하는 검은 패를 받아들고 샅샅이 살펴보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물이 있으니 그때의 약속을 지키겠네. 전송진을 열어줄 테니 따라오게나.”

그는 말을 마치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석목은 몽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움찔했지만,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천위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 안목은 단순히 종족의 관념에만 한정되지 않는 법이지. 또 세속의 싸움에도 끼어들지 않게 된다네. 자네 신분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으니 나를 따라오게.”

석목의 귀에 창원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석목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이내 그의 뒤를 따라갔다.

석목과 창원왕은 몽하의 인솔에 따라 검은 바위가 있는 동쪽으로 날아갔고, 잠시 뒤 해역의 하늘에 도착했다.

검은 섬과 가까워지자 천지의 기운이 뿜어내는 파동은 더욱 더 격렬해졌다.

석목은 얼굴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체내에서 정혈의 움직임이 점점 격해지는 걸 느꼈다. 등 뒤에 있는 운철흑도도 떨리며 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숨기지 않으면 창원왕과 몽하에게 들킬 게 뻔했다.

“몽 장로님, 그 검은 섬에서 천지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석목은 검은 섬을 바라보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마침 창원왕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건 자네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네. 해족의 비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몽하가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석목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가세. 전송진은 바다 속의 깊은 곳에 있으니 이쪽으로 따라오게나.”

몽하는 해수면 위로 날아갔고, 석목과 창원왕은 그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이 바다 밑으로 들어가자 사방에서 바닷물이 몰려들었다. 검은 섬과 가까운 탓인지 바닷물에도 적지 않은 영력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 때문에 평범한 바닷물보다 최소한 열 배 정도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바닷물은 그들의 몸을 격렬하게 감으며 엄청난 힘으로 밀려왔다. 셋 모두 경지가 상당한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수압에 밀려 몸이 흔들렸다.

해족인 몽하는 몸에서 빛을 반짝이더니 이내 자세를 바로잡았다. 주위에서 바닷물이 크게 출렁이었지만 그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석목과 창원왕은 비록 해족은 아니지만, 그들의 경지로 이 정도의 바닷물에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석목이 토템의 힘을 사용하자 몸 위에서 검은 빛이 아른거렸다. 순간 몸 전체가 흘러가는 물처럼 변했고, 주위의 바닷물이 그의 몸을 부드럽게 스쳐갔다.

창원왕은 몸에서 푸른빛을 발했고, 그러자 어렵지 않게 바닷물과 분리되었다.

“오호, 자네 그냥 단순한 인족이 아니었군. 야만족의 토템술까지 익히고 있다니.”

몽하는 석목을 바라보더니 신기한 듯 말했다.

“보잘 것 없는 재주입니다. 대장로님이 보시기에는 하찮은 것이지요.”

석목의 말에 몽하가 웃었다. 비웃음인지 탄복의 웃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몽하는 몸을 움직여 바다의 더 깊은 곳으로 향했고, 두 사람도 그 뒤를 따라갔다.

이곳의 바다는 기이할 정도로 깊었고, 세 사람은 무척 빠른 속도로 가고 있었지만, 반각이나 지나서야 바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석목의 표정이 살짝 떨렸다. 바다 밑에는 거대한 궁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궁전은 엄청나게 커서 이삽십 묘(*畝:넓이의 단위, 약30평) 정도는 되어 보였다. 전체는 푸른 옥석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었고, 눈부신 푸른빛이 반짝거렸다. 주위에는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니며 육지와는 다른 아름다움을 뽐냈다.

거대한 궁전은 푸른색 반구 모양의 빛의 막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것은 방어용 법진으로 보였다.

이윽고 석목의 눈이 한곳에 멈추었다. 푸른 막 안쪽에 있는 궁전 중앙에는 원형의 광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제단으로 보이는 것이 있었는데, 그 꼭대기에서는 백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법진을 이루고 있었다.

빛의 막이 사이를 막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진법이 뿜어내는 강한 파동이 느껴졌다.

“저곳이 성역의 세계로 가는 전송진이다.”

창원왕의 목소리가 석목의 귀에 울려 퍼졌다.

“가세.”

몽하가 말하며 푸른 영패를 꺼내들었다. 곧 한줄기의 푸른빛이 위에서부터 뿜어져 나왔고, 푸른빛의 막을 만들어냈다.

순간, 푸른 빛의 막이 갈라지면서 작은 틈이 생겼고, 몽하는 그 사이로 빠르게 날아들어갔다.

석목은 창원왕을 바라보며 그의 의견을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괜찮다.”

창원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막의 틈으로 날아 들어갔고, 석목도 그의 뒤를 따랐다.

빛의 막 속으로 들어가자 바닷물의 압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안에는 영기가 짙게 깔려 있었고, 서하대륙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영맥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몽 형의 수련 속도가 그토록 빨랐던 이유를 알겠습니다. 바로 이곳의 천지영기 덕분이었군요. 이런 곳에서 수련을 하면 힘을 절반 정도만 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창원왕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몽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두 사람을 데리고 궁전 중앙에 있는 광장의 제단으로 향했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멀리에서 볼 때는 잘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제단 위에 있는 진법이 정말 거대했기 때문이었다.

진법의 직경은 일이십 장은 되어 보였고, 그 주위에는 열여덟 개의 용 모양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그것들은 푸른색이었는데 어떤 재질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각각의 돌기둥 위에는 크고 긴 용이 한 마리씩 휘감겨 있었는데, 용의 입은 법진을 향해 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음? 영석을 쓰지 않고도 법진이 잘 가동되고 있는 겁니까?”

석목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더니 의아한 듯 말했다.

“이 성계(星际) 전송진은 필요로 하는 영력이 너무 커서 어떤 영석으로도 유지할 수가 없는 까닭이지. 이 전송진을 만든 사람은 엄청난 법력을 부려서 주변 해역의 영맥을 강제로 이곳까지 끌어들였고, 이 열여덟 개의 용 기둥에 넣었지. 즉, 이곳은 땅의 영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네.”

창원왕의 설명에 석목은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이곳의 영기가 이토록 짙은 이유였다. 한편으로 그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진법을 만든 사람은 대체 어느 정도의 수련을 했기에, 영맥을 강제로 이동시킬 수 있는 걸까?’

“쓸 데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남해성을 떠나고 싶으면 진법 가운데에 서도록 하게. 내가 진법을 가동하지.”

몽하가 차갑게 말했다.

창원왕은 그 말에 웃으며 석목을 데리고 진법 속으로 들어갔다.

몽하는 열여덟 개의 용 기둥이 있는 가운데로 갔다. 그리고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손을 흔들어 빛을 그렸다.

카칵!

지면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잠시 후 검은 석대가 서서히 올라왔다.

몽하는 품속에서 두 개의 성석을 꺼내들어 석대 위에 올리고 입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줄기줄기 법결이 그의 손에서 날아가 석대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석대는 천천히 흰 빛을 뿜더니 두 개의 성석을 그대로 묻어버렸다.

칵!

두 개의 성석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별빛을 뿜으며 전송진 속으로 들어갔다.

한 개의 용 기둥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엄청나게 밝은 횃불을 켠 것 같았다. 이어 바로 옆의 기둥도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이렇게 한 개씩 불이 밝혀지면서 전체 중 절반이 넘는 기둥에서 불이 켜졌다.

석목과 창원왕의 발밑에서 전송진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석목은 한숨을 돌리며 그제야 얼굴에 웃음기를 띄었다.

이제 곧 그는 남해성을 떠난다. 앞으로는 금색 교룡에게 쫓길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멀리서부터 찢어지는 듯한 포효가 들려오더니 멀리서 금빛이 반짝였다.

그 빛은 순식간에 커지더니 무서운 속도로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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