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350화 (350/916)

350화. 죽은 별

더 이상 피할 수가 없게 된 석목은 몸을 돌렸고, 그의 왼손이 갑자기 불에 탄 듯이 검게 변하더니 한줄기의 화염으로 둘러싸였다.

석목은 왼손으로 주먹을 쥐고 앞으로 힘껏 내질렀다.

펑!

그의 주먹이 하얀 틈을 크게 벌려놓았다. 그러자 밀려오던 난류들은 그 틈 사이로 들어가더니 미지의 공간으로 사라졌다.

석목의 이마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그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려 앞으로 이동하려 했다.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창원왕은 이미 수십 장 떨어진 곳에 있었고, 빛나는 구멍과 백 장 정도 거리까지 가까워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몸을 둘러싼 푸른빛은 이제 얇은 층만 남아 있었다. 그는 점점 난폭해지는 공간 난류를 밀어내는 동시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균열을 온 힘을 다해서 피하고 있었다. 그의 몸 전체는 공간의 압력에 이미 변형되었고, 피부는 빨갛게 익어서 걸어가는 모습이 유난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빛이 있는 구멍에 가까워질수록 공간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균열과 난류 또한 더 빈번해졌다.

석목은 앞길이 막막하다고 느꼈다.

이곳의 공간 균열과 난류는 점점 거세지고, 또 잦아졌다. 이 전송진이 만들어낸 임시 통로는 교룡의 마지막 일격으로 인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창원왕이 저렇게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목적지로 향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지 못하면 공간 난류에 의해 몸이 부서지고 깨져서 시체마저 보존하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석목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자 뒤에서부터 거대한 공간의 힘이 밀려왔고, 그 힘에 의해 움직임이 매우 느려졌다.

그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신식으로 주위를 살펴보았고,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했다.

석목은 주먹을 날려 허공을 공격해서 잠시 공간 난류의 위협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난류가 밀려나가자 그 뒤의 균열들이 점점 더 커졌고, 주위에 있는 여러 개의 균열과 합쳐져서 밀려오는 힘은 계속해서 빨라지고 있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이 강대한 흡입력에 인해 전부 삼켜질 것이고, 몸 전체가 부서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앞쪽에서도 공간의 균열이 여기저기서 번쩍였다. 한 발을 디딜 때 마다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이라 빠르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석목은 자신의 뒤에서부터 오장육부를 얼어붙게 할 듯한 절망적인 기운이 압박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마음속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라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악!”

그 순간, 석목의 체내에 있는 혈맥이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고, 마치 온 몸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이어 그의 몸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복잡한 부문들이 흩어져 나왔고, 부문들은 나비가 춤을 추듯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금색 부문이 나타나자 석목의 몸이 가벼워졌고,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도 사라졌다.

석목은 정신이 들기도 전에 공간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그전보다 훨씬 강력하게 흔들리면서, 한 장 정도 되는 균열들이 여기저기서 번쩍거렸다.

하지만 이번 파동은 그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금빛 속에 묻힌 그는 어떤 파동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빛의 구멍과 가까운,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는 가로세로로 갈라진 균열이 격하게 진동하며 줄줄이 흩어지고 있었다.

“안 돼!”

푸른색의 원숭이로 변한 창원왕의 몸이 이리저리 비틀거렸다. 이어서 공간 균열을 피하려던 그의 몸은 여러 줄의 난류에 의해 참혹한 소리와 함께 가로로 잘려나갔다.

창원왕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푸른빛이 점차 사라졌고, 그의 몸은 일고여덟 개의 덩어리로 나뉘어 주위를 피로 물들였다.

그때 창원왕의 입에서 푸른색의 무지개가 날아갔다. 그것은 머리를 잡아 올려서 앞쪽으로 멀리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모든 것을 짓누를 듯한 무시무시한 압박이 통로에서 밀려왔다. 그것은 순식간에 창원왕의 머리를 여러 줄기로 갈라놓았고, 이내 한 덩어리의 핏빛 안개로 만들어버렸다.

석목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 순간 그를 감싸고 있던 금빛이 사라졌고, 한줄기의 빛이 되어 반짝였다. 석목의 몸은 순식간에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금빛이 그를 감싸는 순간, 그는 머릿속이 희미해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 * *

얼마가 지났을까. 석목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마치 완전히 다른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꿈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의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매번 꿈속으로 들어가서 흰 거대 원숭이로 변할 때의 느낌과 똑같았다.

하지만 이번에 그는 흰 원숭이로 변하지 않았고, 대신 인간의 몸으로 한없이 넓은 별의 바다에 놓여 있었다. 정확하게는 황토색 별 위의 허공에 서 있었다.

황당무계한 상황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석목은 먼 곳에서도 그 커다란 황토색 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 별 앞에서 그는 한없이 작은 존재였으며, 사막의 모래알 같았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와중에, 그의 머릿속에서는 의혹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거대한 별은 아무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죽어 있는 듯 보였고, 심지어 아무런 천지의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석목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별의 표면에는 빛이 어둡게 드리워 있었고, 커다란 노란색 기류들이 겉에 모여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빛이 반짝였고 번개들이 거대한 용처럼 번쩍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위협적이었다.

소용돌이 속을 보니 별의 표면 위로 줄기줄기 큰 강, 그리고 하천으로 보이는 균열들이 있었다. 무수히 많은 적홍색의 암류가 가로세로로 교차된 균열 속에서 피처럼 들끓고 있었다.

그리고 이 균열들은 눈에 보이는 속도로 계속 확대되어 얼기설기 엉켜 있었다.

순간 석목은 이 거대한 황토색의 별이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마치 곧 종말을 맞아서 그대로 소멸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때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노란색의 소용돌이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섞여 있었는데, 그중에서 고통이 가장 크게 느껴졌다.

석목은 놀라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은색 여우가 소용돌이 속에서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그 뒤에서 거대한 몸집의 무언가가 나타났는데, 요수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석목은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요수의 기운으로 둘러싸인 안쪽에는 몸이 육칠백 장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원숭이 요수가 있었다.

원숭이 요수의 몸은 회색 털로 뒤덮여 있었고, 눈에는 불덩이가 어렸으며, 손에는 이삼십 장 크기의 낡고 거대한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 원숭이 요수의 가슴에는 소름 돋는 상처들이 갈기갈기 나 있었는데, 살이 뒤집혀서 허공으로 피를 뿜고 있었고, 큰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이 광경을 본 석목은 깜짝 놀랐다. 그는 이렇게 거대한 생물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이 또 나타났다.

별 표면의 소용돌이 속에서 분노에 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거대한 몸집을 가진 무언가가 황토의 소용돌이에서 줄줄이 날아 올라왔다.

그들은 전부 요수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거대한 원숭이였고,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외관을 보니 이 원숭이 요수들은 동족은 아닌 것 같았다. 털의 색깔은 파란 것, 빨간 것, 하얀 것과 검은 것 등 가지각색이었고, 그 길이도 천차만별이었다.

체형도 제각각이라 작은 것은 백여 장 정도 되어 보였고, 가장 큰 원숭이 요수는 무려 천 장이 넘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전부 흉악한 인상이었고 눈에서는 분노가 이글거렸으며, 대부분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울부짖고 있었다.

“아악!”

거대 원숭이들은 각각 연이어 소리를 지르면서 전부 맞은편의 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반대편에 있는 네 마리는 몸이 천 장은 되어 보였고, 요기가 강한 원숭이 요수들은 모두 숨을 짓누르는 듯한 공포감을 뿜어냈다.

가장 앞에 선 것은 온몸이 푸른색의 짧은 털로 덮인 원숭이였다. 그의 손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곤봉이 쥐여 있었고, 그 주위로 노란 빛이 어른거렸다.

푸른 거대 원숭이의 왼쪽에는 몸 전체가 까만 거대 원숭이가 있었는데, 근육이 터질 듯했고 두 손에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허공에는 검은 줄이 그어졌다.

푸른 거대 원숭이의 오른쪽에는 몸집이 상대적으로 작은 흰 털 원숭이가 있었다. 그의 손에는 돌칼이 쥐어 있었는데, 체구가 작은 대신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이 세 마리의 거대 원숭이 뒤에는 붉은 긴 털을 가진 거대 원숭이가 서 있었고, 그는 작은 산만한 붉은 청동 망치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휘두를 때마다 붉은빛이 층층이 뿜어져 나왔다.

이 네 마리의 거대한 원숭이 요수 뒤에는 수만 마리의 원숭이 요수가 각각 곤봉이나 망치 등 무기를 들고 따르고 있었다.

이 광경이 너무도 웅장해서, 석목은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를 들고 원숭이 요수들이 향하는 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원숭이 요수들이 향하는 다른 별에는 또 한 무리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먹물처럼 까만 하늘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배 백 여척이 일자로 늘어서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서로 맞닿은 은빛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산맥 같았다. 그것들은 하늘을 가로지르며 주변의 별빛마저 무색하게 했다.

은빛의 거대한 배들은 전체적으로 마름모꼴이었는데, 몸체의 중간은 둥그스름하고 양 끝은 좁았다. 그 위로는 형태가 기괴한 토템 문양이 새겨져 있고 선체 양 옆에는 은색 날개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 위로는 금색 부문이 화려한 빛을 뿜어내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배의 앞쪽에는 금속 기둥이 하나씩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이상한 모양의 짐승들이 입을 크게 벌린 채 앞을 바라보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은색의 거대한 배 위에서 노을이 피어올랐다. 화려한 무지개가 휘어져서 거대한 배를 둘러싼 모습이 마치 신선의 풍경을 보는 듯했다.

배 위에는 무지개를 뚫고 빼곡하게 서 있는, 다양한 갑옷을 입은 전사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수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석목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그 거대한 배로 이루어진 은빛 장벽 뒤로 키가 만 장은 되어 보이는 노란 옷의 거인이 수백 명이나 서 있는 광경이었다.

이 거인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엄숙하게 서 있었다. 몸에는 노란 옷을 가로로 걸쳤고 허리춤에는 금색의 거대한 북이 걸려 있었다.

이 큰 북은 거인들의 허리춤에 장난감처럼 걸려 있었지만, 그 크기는 천 장은 되어 보였다. 그 위에는 간결한 부문이 있었고, 북의 중앙에는 입을 벌린 거대한 짐승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노란 옷을 두른 거인의 눈은 아래로 향해서 멀리서부터 덤벼오는 수만 마리의 거대 원숭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인의 눈빛은 차가웠고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거인은 손에 든 검푸른 북채를 가슴 앞으로 수평이 되는 위치까지 천천히 들어올렸다.

이어 모든 거인들이 일제히 팔을 올린 뒤, 손을 아래로 내리며 허리춤의 북을 내리쳤다.

윙!

거인들이 북채를 내리치자 무형의 파동이 퍼졌다. 이어 거대한 배의 앞에 튀어나온 기둥의 기괴한 짐승 머리가 입을 크게 벌렸고, 그 속에서 한줄기의 금빛이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백여 줄기는 되어 보이는 빛기둥이 거대한 배에서 창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것은 수 만 마리는 되는 듯한 대군을 향해 날아갔다.

앞에 서 있던 네 마리의 원숭이 요수가 이를 보고 울부짖었다. 그들이 손에 쥔 무기에서 환하게 불빛이 번졌고, 그들은 각각의 손에든 무기로 다가오는 금빛을 갈라놓으려 했다.

원숭이 요수 중에는 실력이 뛰어난 천 장 크기의 거대 원숭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백 장 정도 되는 평범한 원숭이 요수였다.

수십 갈래의 금빛 기둥이 화살처럼 원숭이 요수의 무리로 날아들었고, 곳곳에서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높이가 칠팔백 장쯤 되는 푸른 거대 원숭이의 몸에서 푸른빛이 돌았다. 그는 손에 든 거대한 도끼를 가슴 앞으로 휘두르며 금빛 기둥을 막으려 했다.

그러자 금빛 기둥이 번쩍이더니 그의 도끼와 몸통을 뚫어버렸고, 그 뒤로 몰려오는 십여 마리의 거대 원숭이들을 피할 새도 없이 쓸어버렸다. 그 원숭이들의 기운은 금빛 기둥 앞에서 아무런 소용도 없는 듯했다.

몸집이 거대한 다른 원숭이들도 금빛 기둥이 몸에 닿으면 순식간에 불에 타서 곧바로 사라지고 말았다.

비슷한 장면이 원숭이 요수의 대군 사이에서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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