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성전(星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수백 마리나 되는 원숭이 요수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금빛 기둥은 은색의 거대한 배에서 끊이지 않고 뿜어져 나왔고, 계속해서 거대 원숭이 요수들의 생명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뒤에서 따라오는 원숭이 요수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네 마리의 거대 원숭이를 따라 망설임 없이 별을 향해 덤벼들었다.
석목은 놀란 가슴을 부둥켜안은 채, 거대한 북채를 휘두르는 거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팔을 휘두르며 허리춤에 걸쳐진 북을 거침없이 내리쳤다. 매번 두드릴 때마다 노란 빛이 층층이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석목의 귀에 천둥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늘을 울리는 듯한 북소리가 뚜렷이 귓속으로 전해졌고, 소리가 그의 마음을 두드리는 것처럼 심장이 함께 뛰었다.
석목은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몸이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 거인이 북을 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쿵! 쿵! 쿵!
북소리와 함께 석목의 발끝에서부터 찌릿한 느낌이 올라왔고, 마치 북소리에 의해 몸의 힘이 풀려버리는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때 석목의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몸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드디어 거인의 몸에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석목은 의식적으로 머리를 들어서 위를 보았다.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의 몸 뒤에 온몸이 금색 갑옷으로 둘러싸인 거대 원숭이가 서 있었다.
그 원숭이는 몸의 크기가 만 장은 되어 보였고,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봉우리 같았다. 몸집이 다른 거대 원숭이보다 수백 배는 더 큰 데다, 그 기세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였다.
거대 원숭이가 몸에 두른 금색 갑옷의 고리들은 줄줄이 이어져서 일체화되어 있었고, 갑옷 위에는 뱀 모양 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사이로 금빛이 흐르고 있었다.
거대 원숭이의 가슴 앞부분에는 거대한 동물의 머리가 있었는데, 그 입에는 고리가 물리고 눈은 금빛으로 빛나는 게 실로 위엄이 있어 보였다.
거대 원숭이의 발 옆에 선 석목은 거대한 기둥 밑의 개미처럼 보였다. 그는 거대 원숭이의 몸 일부만 볼 수 있을 뿐, 전체적인 생김새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석목은 지금까지 거대 원숭이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원숭이가 머리를 숙여서 석목이 서 있는 곳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나서야 뒤에 이렇게 큰 짐승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그 거대 원숭이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석목은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차가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것은 한 개의 거대 원숭이 머리가 아니었다. 원숭이의 머리는 세 개였다.
금색 갑옷의 거대 원숭이의 어깨 위에는 세 개의 거대한 머리가 나란히 달려 있었다. 그중 한 개는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표정은 상당히 평온해 보였다.
그때 왼쪽의 머리 한 개가 살짝 움직이더니 눈을 밑으로 깔고 석목을 바라보았다.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잔뜩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평온해 보이는 얼굴의 미간 사이에는 세로로 뻗은 눈이 한 개 더 있었는데, 반은 감겨 있었다. 뜨여 있는 반쪽 눈에서는 금빛이 흘렀다.
석목이 머리를 들어 금색 갑옷의 거대 원숭이를 바라본 순간, 멀리 앞쪽을 바라보던 가운데 머리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거대 원숭이는 너무 거대해서 그 중간 머리의 크기만 해도 수백 장은 되어보였다. 눈은 백 장 정도였고, 그 속에서는 휘황찬란한 금빛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석목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넓은 금색 바다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이 하늘에서부터 그를 내리눌렀다.
석목의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장이 되어 있었고, 공포를 넘어선 무력감이 몰려왔다. 자칫 잘못하면 이 세상에서 곧바로 먼지처럼 사라질 판이었다.
석목은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몸은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입을 열어서 무엇인가 말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잠시 뒤, 이런 위압감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고 긴장이 풀린 석목은 다시 상대를 보려 했다.
바로 그때, 금색 거대 원숭이의 가운데 머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무 빨리 왔다. 여기는 지금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다.”
담담한 말투였지만, 그 말은 천둥 같은 소리가 되어 석목의 귀 옆에서 울려 퍼졌다. 석목은 순간 머리가 터질 듯했고 온 몸이 혈맥이 역류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울림은 귀 옆에서 맴돌며 한참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이어 금색 갑옷을 입은 거대 원숭이가 한쪽 팔을 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손이 위에서부터 내려왔다.
그 손이 내려오는 속도는 느린 듯했지만 실은 엄청나게 빨랐다. 손바닥에는 줄기줄기 금색 빛이 터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기어 다니는 뱀 같았다.
손바닥이 석목을 감싼 뒤에 다시 올라갔고, 석목은 자연스럽게 그 손바닥 위에 놓인 모양새가 되었다.
석목은 손바닥이 뿜어내는 금빛 속에 묻혀 있었지만, 불쾌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이어 그 큰 팔이 다시 움직이자 석목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의 몸이 어디론가 날아갔다. 주위의 모든 풍경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점점 작아졌다.
날아가면서 석목은 금색 갑옷을 입은 거대한 원숭이의 형체를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리는 세 개에 팔은 여섯 개인 그 원숭이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처럼 공중에 서 있었다.
하지만 거대 원숭이는 석목의 눈에서 점점 멀어졌다. 곧 황토색 별마저 작아지면서 희미한 별빛만 남았고, 어느새 반짝이는 별의 하늘에 묻혀버렸다.
이상하게도 석목의 가슴은 얼음처럼 차가워졌고, 한편으로 두려움이 몰려왔다.
* * *
“아……!”
석목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는 불쑥 몸을 일으켜서 앉았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겁에 질린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별빛과 거대한 배, 그리고 원숭이 요수들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낡은 구멍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꿈이었구나…….”
석목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터질 듯한 머리를 흔들었다. 그 순간 그는 바닥이 푹신푹신한 것을 느꼈는데, 원형의 천 위에 앉아 있었다.
그가 멍하니 사방을 둘러보니, 그곳은 동굴 안이었는데, 주위에는 현무암 조각으로 조잡하게 만든 탁자와 의자만 놓여 있었다.
동굴의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지만, 탁자와 의자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그는 주위를 한참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뒤쪽 돌 의자를 보았고, 거기에 푸른 옷을 입은 늙은 흰 원숭이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원숭이의 한 손에는 푸른 돌로 된 술 주전자가, 다른 한 손에는 흰 돌로 만든 술잔이 들려 있었고, 그는 몸을 비스듬히 구부린 채 유유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드디어 누군가 왔나 싶었는데, 고작 인족 한 놈이라니.”
그 늙은 원숭이는 고개를 돌려서 석목을 슬쩍 바라보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술 한 잔을 따라서 단숨에 마셔버렸다.
“누구십니까? 여긴 어디죠?”
석목은 어리둥절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물었다.
그는 머리를 굴려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그러자 머릿속이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창원왕은 전송 법진을 통해 성역으로 오는 과정에서 사고를 겪었고, 창원왕은 결국 통로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기이한 꿈을 꾼 것 같았다.
꿈 속에서 본 그 무서운 장면들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는 공간 통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이곳에 와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전송진의 다른 한 쪽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그가 있는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았고, 법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푸른 옷을 두르고 있는 늙은 원숭이는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석목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느긋하게 술을 마시며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석목도 그에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굴 밖으로 나갔고, 이때 늙은 원숭이도 그를 제지하려는 의사도 없어보였다.
석목은 조금은 마음을 놓으며 발길을 재촉하려 했다.
쿵!
그때 그의 몸이 투명한 벽에 막혀 튕겨나왔다.
“하하하!”
동굴 안에서부터 늙은 원숭이의 통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난 석목은 투명한 벽을 힘껏 밀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힘을 써도 그 벽은 조금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서 벽을 만지면서 가늠해보려 했지만, 굴의 입구 전체가 이 무형의 벽에 의해 막혀 있는 것 같았다.
석목은 긴 숨을 내쉰 뒤 왼손 주먹을 쥐었고, 왼쪽 팔이 하얗게 반짝이더니 순식간에 칠흑처럼 까맣게 변했다.
그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왼손 주먹으로 무형의 벽을 힘껏 내리쳤다.
하얀 화염에 둘러싸인 주먹이 무형의 벽에 도착하기도 전에, 주먹이 지나간 곳에서 바람이 일면서 허공에 줄기줄기 하얀 흔적이 남았다. 마치 공간을 그대로 찢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흰 빛이 번쩍이는 순간 주먹이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석목의 예상과 달리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주먹을 날렸지만, 마치 허공에 주먹을 휘두른 것처럼 아무런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투명한 벽이 자신의 주먹을 확실히 막아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체 이 벽에는 무슨 비술이 숨겨져 있기에 이 정도로 대단한 것일까?
의아해진 석목은 다시 굴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석목이 흰 원숭이에게 물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계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석목은 푸른 옷을 입은 늙은 원숭이를 향해 예를 갖추면서 말했다.
“허허, 진즉에 그랬어야지. 젊은이가 노인을 공경할 줄 알아야지.”
늙은 원숭이는 다시 술을 들이키더니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석연치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상대를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
“이곳은 번천곤(翻天棍) 안에 있는 공간이라고 보면 된다.”
흰 원숭이는 입맛을 다시더니 말했다.
“번천곤이요?”
석목이 놀라서 다시 물었다.
“모르는가? 자네가 얼마 전에 손에 넣은 금색 곤봉을 말하는 거라네. 설마 벌써 잊어버렸는가?”
푸른 옷을 입은 늙은 원숭이는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의 얼굴색이 변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지만, 아직 궁금증이 해소되지는 않은 듯했다.
“선배님의 존함을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나는…….”
늙은 원숭이는 잠시 멍한 표정이 되어 말을 멈췄다. 그의 얼굴에 적막이 어렸다.
“나는 백원왕이 큰 재난을 당하기 전에 이곳에 남겨진 존재라네. 말하자면 약간의 정신적 흔적이라고 할까. 그냥 청원(青猿)이라 부르면 되네.”
늙은 원숭이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다시 손을 모아서 더욱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후배 석목이 청원 선배님께 인사드립니다.”
“허허, 그래도 눈치가 있고 말도 그럴싸하게 하는군.”
늙은 원숭이는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제가 어떻게 해서 이 번천곤의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혹시 아십니까?”
석목이 물었다.
“백원왕께서 말씀하셨지. 번천곤을 몸에 지니고 그것의 허락을 받은 자만이 이 공간에 나타날 것이라고. 자네가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지는 나도 모르네. 아무튼 이곳에서 수천 년이나 갇혀서 기다려왔는데, 이런 날이 다 오는군.”
늙은 원숭이가 말했다.
“청원 선배님, 앞서 저는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고, 공간의 난류 속에서도 이 번천곤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혹시 선배님이 그리 하신 것입니까?”
석목은 다시 물었다.
“자네가 번천곤의 인정을 받았으니, 나는 자네가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푸른 옷을 입은 늙은 원숭이가 부정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석목은 흰 원숭이에게 큰절을 올렸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늙은 원숭이는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석목에게 앉으라는 듯 앞쪽에 있는 방석을 가리켰다.
석목은 그의 손짓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