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352화 (352/916)

352화. 구전비신(九轉秘辛)

늙은 원숭이는 앞에 앉은 석목을 위아래로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고, 그 시선에 석목은 민망해질 정도였다. 이어서 원숭이는 또다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백원왕의 정혈을 받은 자가 인족 따위일 줄이야……. 알려진 대로라면, 인족이 백원왕의 정혈을 받는 게 애초에 가능할 일이 아닐 터인데…….”

석목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늙은 원숭이가 눈썹을 치켜 올렸고, 그의 눈에서 두 갈래의 푸른빛이 나오더니 석목의 몸속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석목은 놀라서 피하려 했지만, 푸른빛이 몸속으로 들어간 뒤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그의 몸속에서 무언가 빠르게 맴돌 뿐 달리 불편하거나 통증이 있지는 않았기에, 석목은 이내 마음을 놓았다.

늙은 원숭이는 눈을 번쩍이더니 푸른빛을 거두었다. 그러자 석목의 몸도 다시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허, 그럼 그렇지. 그런 것이었군!”

푸른 옷의 늙은 원숭이는 얼굴에 묘한 기색을 띠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무언가 알아내셨습니까?”

석목은 눈썹을 치켜뜨며 물었다.

“자네는 석후의 폐맥을 지니고 있군. 이 혈맥은 인족에게 있어서는 아무 쓸모없지만, 미천거원(弥天巨猿: 거대 원숭이)의 혈통을 조금은 물려받은 것이 분명하네. 당시 백원왕의 본체가 바로 미천거원 같은 천수였지. 다시 말하면 석후 폐맥을 이어받은 자는 미천거원의 혈통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야.”

늙은 원숭이가 말했다.

“네? 석후의 폐맥이 그런 작용도 합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석목이 놀란 듯 말했다.

동주대륙과 서하대륙에서 석후의 혈맥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폐맥이었다. 이는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지만, 천수와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다.

“이를 아는 사람은 이 성역의 세계에서도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기뻐하기에는 이르네.”

기쁨에 찬 석목을 보고 늙은 원숭이가 찬물을 끼얹듯 말했다.

“선배님, 가르쳐주십시오.”

석목은 너무나 궁금했지만, 얼굴에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석후 폐맥의 급이 너무 낮아서 그 속에 담긴 혈맥의 대물림이 매우 희박하네. 미천거원의 혈맥으로 거듭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되지. 허나 자네가 그 혈맥을 지니고 있고, 또 백원왕의 정혈 두 방울을 흡수해서 번천곤의 기억을 불러온 걸 보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네.”

푸른 옷을 걸친 늙은 원숭이가 천천히 말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인족 중 석후 폐맥을 가진 자는 적지 않지만, 그들은 정식 무인도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기껏해야 일반인보다 조금 더 강한 정도에 불과했다. 이런 사람들이 미천거원의 정혈을 접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생각해보니 그는 정말로 차고 넘치는 행운을 얻은 것이었다.

“참, 청원 선배님. 제가 방금 전에 기괴한 꿈을 꾸었습니다. 혹시 이것도 기억의 대물림과 연관이 있을까요?”

석목은 방금 전 꿈에서 본 것들, 머리 세 개에 팔이 여섯 개 달린 금색 갑옷의 원숭이에 대해서 모두 늙은 원숭이에게 이야기했다.

“오호, 자네 그것까지 보았는가?”

늙은 원숭이는 의외라는 듯이 석목을 바라보았다.

“특별한 것인가요?”

석목이 물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네. 자네가 본 것은 백원왕께서 적과 마지막 싸움을 하기 전의 모습이다. 번천곤이 신묘한 탓에 그때의 상황을 자네에게 보여준 것 같군…….”

늙은 원숭이는 말했다.

“백원왕께서는 그처럼 강하지만 마지막에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만난 적은 누구인가요? 혹시 그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교룡입니까?”

“허허, 그 교룡은 큰 적이라고 할 수도 없지. 그 버러지 같은 놈은 백원왕이 구전현공을 수련하기 전까지만 겨우 상대가 될 정도였다고 할까. 하지만 구전현공(九轉玄功)이 조금씩 성과를 보게 되면서, 백원왕은 손가락 하나로 그 아홉 개 머리를 가진 버러지를 죽여 버릴 수 있게 되었지.”

늙은 원숭이는 못마땅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그 머리 아홉 개 가진 교룡의 분신 하나도 천위 정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본체의 실력은 최소 월계 이상일 듯했다.

그런데 이런 경지의 강자조차도 백원왕의 손가락 하나에 못 미치다니, 그럼 백원왕은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일까?

“그럼 백원왕의 진짜 적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어떻게 돌아가시게 되었는지요?

석목은 멈칫거리더니 물었다.

늙은 원숭이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잠시 후 머리를 흔들었다.

“그 일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네. 나는 백원왕이 남긴 보잘것없는 정신의 흔적에 불과할 뿐, 전부를 알 수는 없다.”

그는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그것 참 아깝군요,”

석목도 머리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인족 주제에 정말 행운아로군. 아니, 불행한 건가?”

늙은 원숭이는 술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선배님,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석목은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재차 물었다.

“자네의 정혈을 통해 알아낸 것이다. 자네는 백원왕이 남긴 구전현공을 물려받았고, 이미 그 공법을 수련한 것이겠지?”

늙은 원숭이가 물었다.

“맞습니다.”

석목은 머리를 끄덕이며 답했다.

“자기 멋대로 구전현공(九轉玄功)을 수련하다가는 큰코다치게 될 것이야.”

늙은 원숭이는 고소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고 싶습니다.”

석목이 놀라며 다급하게 물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구전현공은 어떠한 커다란 기운과 이어져 있어서 일단 수련을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돌고 또 돌기를 반복적해서 구전으로 가는 것이지.”

늙은 원숭이가 말했다.

“그건…… 알지 못했습니다. 선배님, 만약 수련을 멈추면 어떻게 되나요?”

석목이 놀라서 다시 물었다.

“멈추게 되면 현공이 수련한 사람을 공격하게 되지. 그러면 공력이 전부 소실될 수도 있고, 크게 잘못될 경우에는 몸이 터져서 죽게 되네.”

늙은 원숭이은 석목을 힐끔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석목은 겁을 먹은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속으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보아하니 자네는 인족의 몸이고, 아직 미천거원의 혈맥으로 거듭나지는 못했군. 그러니 구전현공 공법을 물려받았다 해도 아마 첫 단계 정도까지만 도달할 수 있었겠지?”

늙은 원숭이가 말했다.

“선배님, 통찰력이 대단하십니다.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 나머지 공법의 구결(口诀)은 어떻게 구해야 할까요?”

석목이 말했다.

“설명하자면 길다. 백원왕은 당시 인족과 내기를 했는데, 번천곤의 금제 속에 구전현공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구결을 남겼지……. 번천곤이 자네 손에 있으니 때가 되면 그 두 개의 공법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여섯 개의 구결에 대해서는, 백원왕은 그 내용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네.”

늙은 원숭이가 말했다.

“그럼 저에게는 전혀 기회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는 그저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선배님, 해결책을 아시면 제발 조금이라도 귀띔해주십시오.”

석목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머지 여섯 개의 법결을 얻으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건 바로 백원왕이 수행을 했던 청란성지(青蘭聖地)에 가는 것이지.”

늙은 원숭이는 천천히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청란성지요? 그곳은 어디입니까?”

석목이 물었다.

“그곳에 대한 기억은 나에게 없네. 자네의 힘으로 직접 찾아가야 해. 다만 이 성역 안에 있는 건 틀림없지. 허나 나쁜 소식부터 들려주자면, 그곳에 간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네. 구전현공은 성지의 모든 공법 중에서도 가장 등급이 높은 것이다. 청란성지에는 모두 비범한 사람들 뿐이지. 거기서 거두는 제자는 모두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난 자들이네. 허나 수십만 년 동안 구전까지 수련한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늙은 원숭이는 석목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또다시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었다.

“구전현공(九轉玄功)이 심오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저는 반드시 부지런히 수행하여 나태해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석목은 단호하게 말했다.

“허허……. 부지런히? 구전현공이 단순히 부지런히 수행한다고 터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백만 년간 그것을 통달한 사람이 겨우 한두 명이었겠나?”

늙은 원숭이는 피식 웃으며 비꼬듯 말했다.

“선배님께서 그 비결을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석목이 깍듯하게 말했다.

“내가 말했다시피 이 구전현공은 어떤 커다란 기운과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성역에 있든, 또는 어느 별 위에 있든 구전현공을 수련한 사람끼리는 서로 인과가 형성되어 연을 맺게 되지. 다시 말하면 그 사람들 중 누구 한 명이라도 구전까지 도달한다면, 다른 현공을 수행하는 자들은 어느 수준까지 도달했고 어디에 있는가를 막론하고 저절로 폐인이 되어버린다네.”

늙은 원숭이가 말했다.

“다시 말해서 같은 시기에 구전현공을 수련하는 사람 중 한 명만 성공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까?”

석목이 매우 놀라며 물었다.

“그렇지. 청란성지(青蘭聖地)의 제자 중 구전까지 수련에 성공한 사람은 대대로 한 명 뿐이다. 그리고 한 명밖에 존재할 수 없지. 백원왕이 구전현공을 경지까지 수련했던 그 해, 청란성지에서 무려 백 일 가까이 수련한 제자들의 현공의 힘은 물이 흐르듯 전부 백원왕의 몸으로 들어가 버렸지. 그래서 그가 하룻밤 사이에 구전까지 도달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네.”

늙은 원숭이가 말했다.

“네? 그 공법이 그렇게 잔인한 것이었군요. 전부라니……. 어떤 예외도 없었나요?”

석목의 목소리는 이제 잠겨 있었다.

“백만 년 동안 존재해온 청란성지의 역사를 살펴볼 때, 대대로 이 공법을 수련한 모든 제자는 전부 똑같은 결과를 맞이했지. 예외는 한 번도 없었네.”

원숭이는 못을 박듯 말했다.

여기까지 들은 석목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다시 침묵에 잠겼다,

“허허, 이보게. 자네도 생각해낸 것이지? 그렇네. 구전현공을 수련하는 모든 이는 서로 천적이 되는 것이지. 상대가 나와 같은 공법을 수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해서든 상대를 죽여야만 안심할 수 있게 되지. 수십만 년 동안 청란성지에서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동문사제가 서로 죽였는지……. 백 명이 넘는 사람 중 단순히 공력만 상실한 사람들은 그나마 운이 좋았던 거라네. 목숨을 건져서 이 신공이 성공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것만으로도 인생을 헛되이 살지는 않았다는 뜻이니까.”

늙은 원숭이는 말했다.

“그렇다면 이 공법을 수련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불행한 일이군요.”

석목은 머리를 흔들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늙은 원숭이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 때문에 성지에서는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영리하다 해도, 구전현공을 수련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서든 숨기려 하고 절대 외부에 알리지 않는 게지. 이는 자네도 마찬가지야. 누군가 자신과 같은 공법을 수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든 죽이려 할 것이야.”

그 말을 들은 석목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지는 말게. 백원왕의 수련 성공으로 인해 백여 명의 수련자가 폐인이 된 후, 청란성지에서 구전현공을 수련하려는 사람의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니까.”

“그러나 백원왕은 이미 돌아가신 지 천 년이 넘었는데, 많은 사람이 다시 그 현공을 수련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청란성지에는 한 개의 혼각(魂阁)이 있는데 청란성지 출신의 제자들은 모두 그곳에 혼등(魂灯) 한 개를 켜두게 되지. 그 사람이 죽지 않는 한 그의 혼등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백원왕은 이미 몇 천 년 전에 죽어버렸지만 번천곤 속에는 내가 아직 있으니, 혼각에 있는 백원왕의 혼등은 아직 꺼지지 않았을 것이다.”

늙은 원숭이는 말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석목은 그 말을 듣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서 나도 더는 내 몸을 지킬 수가 없네. 이번에 자네 앞에 나타난 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군. 청란성지에서 백원왕의 혼등이 꺼지게 되면, 그때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전현공을 수련하려 들지 모른다.”

늙은 원숭이는 웃으면서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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