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성역집시(星域集市)
“만약 정말 그렇다 해도,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수련을 하는 것이죠?”
석목이 천천히 물었다.
“내가 말했다시피, 구전현공을 수련하려는 자는 이미 뛰어난 실력자일 가능성이 높다. 내 말이 듣기 싫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상황으로는 자네가 계속 구전현공을 수련한다 해도 구전까지 이를 가능성은 아주 미미하네. 일생을 건다 해도 두 번째나 세 번째 단계에서 머무르는 게 고작이겠지. 그뿐이겠는가? 마지막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지. 그럴 바에는 아직 구전현공의 첫 단계에 머물러있는 지금, 내가 그 현공을 없애주는 게 어떻겠는가?”
늙은 원숭이는 안색이 굳어지더니 두 눈으로 석목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현공을 없앤다니요? 어떻게 없앨 수 있는 겁니까?”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어떻게 없애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 신경 쓸 것 없네. 다만 그걸 없앤 후에는 자네의 경지가 한층 하락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이곳에서 백원왕의 다른 공법을 수련할 수 있지. 알다시피 백원왕이 수련한 것이라면, 뭘 익히든 이 성역에서 활개를 칠 수 있을 것이야.”
늙은 원숭이는 손을 흔들며 석목을 유혹하듯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한동안 대답을 망설였다.
“만약 자네가 그 현공이 아까워서 계속해서 수련하고 싶다면, 내가 자네에게 접인(接引) 영패를 주지. 이 영패가 있으면 어떤 대가도 없이 청란성지의 제자 선발에 참가할 수 있네.”
늙은 원숭이는 석목의 안색을 살피더니 눈을 반짝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곧 늙은 원숭이의 손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푸른빛이 몽롱한 장방형의 영패가 나타났다. 그는 그것을 건네는 도중에도 석목에게서 내내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 장방형 영패는 청옥 재질로 만든 것으로 보였는데, 안에서부터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표면에는 살아서 숨 쉬는 듯한 용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영패의 정면에는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가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는 ‘청란’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선배님, 백원왕이 수련한 많은 공법 중 구전현공보다 강한 것이 있습니까?”
석목은 고민하다가 물었다.
“하하…….”
늙은 원숭이는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은 듯 크게 웃기 시작했다.
석목은 웃고 있는 원숭이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내가 분명하게 말해주지. 구전현공은 청란성지에서 가장 강력한 공법 중의 하나이며, 성역 전체를 통틀어도 육신을 강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법이네. 백원왕이 다른 여러 가지의 공법을 연마하기는 했지만, 그중 어느 하나도 구전현공과 같이 거론될 수는 없지.”
늙은 원숭이는 석목을 향해 머리를 흔들더니 정색하며 답했다.
“그럼 저는 구전현공을 수련하겠습니다.”
석목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래? 계속해서 수련하겠다는 말이지? 마지막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은 건가?”
늙은 원숭이는 실눈을 뜨고 다시 한 번 석목의 의사를 확인했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강자가 되는 방법을 시도조차 못한 못난 놈으로 남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저는 누군가와 약속한 게 있습니다. 반드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되겠다고요. 하나의 별 위에서든 아니면 하나의 성역에서든, 저는 가장 강한 자가 될 겁니다!”
석목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석목의 답을 듣자 늙은 원숭이는 더는 묻지 않고 크게 웃기만 했다.
“선배님,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좋아, 아주 좋아! 자네는 가장 정확한 선택을 한 것이야. 사실 포기했다면 아마도 자네는 이미 차가운 시신이 되어 있을 것이네. 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대를 죽였을 것이다. 구전현공도 감히 수련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백원왕의 진정한 대물림을 받을 수 있겠나? 그런 자라면 살아 있는 게 오히려 치욕일 수밖에 없는 게지. 백원왕의 이름을 더럽히기만 할 뿐……”
늙은 원숭이는 눈을 빛내며 크게 기뻐하면서 말했다.
웃음소리와 함께 굽어 있던 늙은 원숭이의 허리가 갑자기 꼿꼿하게 펴졌다.
“선배님, 당신…….”
석목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늙은 원숭이는 웃으며 옷자락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 속에서 푸른빛이 나왔다.
석목은 눈앞에서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고, 이내 머리가 무거워지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천천히 깨어났다.
석목은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보았다. 자신의 몸이 한 장 남짓한 원형 법진 안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주위는 칠흑같이 캄캄했다.
어쨌든 번천곤 안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석목은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 순간, 귀에서 무언가 맑은 소리가 났다. 그가 손을 뻗어서 만지자 손에 무엇인가 쥐여 있었다. 바로 용과 나무가 그려져 있는 그 접인 영패였다.
그는 영패를 눈앞으로 가져와서 대충 훑어보고는 다시 넣었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는 비좁은 공간의 한쪽에 놓여 있었고 주변의 빛이 희미하게 비추었는데 멀리서 대전이 은은하게 보였다.
대전 안은 텅텅 비어 있었고, 별다른 장식이 없어서 누추해보였다.
석목의 몸 뒤로 대전의 문이 높게 세워져 있었고, 다른 한쪽 바닥에는 몇 개의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또 다른 전송진 같았다.
석목은 천천히 대전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손을 내밀어 문을 안쪽으로 밀어보았다.
하지만 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석목은 다시 손에 힘을 주어 힘껏 밀었지만, 문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바로 그때, 어두운 궁전에서 붉은빛이 비쳤다. 그리고 석목의 등 뒤로 온몸이 불타오르는 붉은 원숭이 법상이 나타났다.
석목은 두 손으로 문을 다시 열었고, 그 원숭이 법상의 거대한 두 손도 같이 그 문을 열었다. 그러자 드디어 문이 앞으로 밀려났다.
위잉!
문 위로 두 개의 거대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금강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손에 긴 창을, 다른 한 사람은 철편(鐵鞭)을 들고 있었고, 그들의 몸에서는 따뜻한 금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빛이 나타나면서 동시에 석목은 거대한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 빛은 그와 원숭이 법상을 멀리까지 밀쳐냈다.
그 힘은 마치 거대한 바다 같아서, 석목의 지금 경지로는 상대가 안 될 정도였다.
대전의 다른 한쪽 벽으로 밀려난 석목은 손을 내밀어 그 벽을 매만져보았다. 손바닥으로 차가움이 전해지는 게 그냥 평범한 돌벽 같았다.
석목은 놀라지 않고 신식을 발동해 사면의 벽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른 벽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서 다른 한쪽의 법진으로 걸어갔다.
내부가 어두운 데다 아까 멀리서 볼 때는 자세히 확인하지 못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전송진의 구조는 이전에 해족의 금지에서 본 것과 거의 똑같았다. 다만 그 크기는 많이 작았다.
석목은 전송진을 한참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는 거침없이 앞으로 다가갔다.
카칵!
석목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법진의 중앙에서 검은 기둥이 올라오더니, 그 표면에 하얀 빛이 나타났다. 빛이 대전의 허공을 비추면서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고, 주위의 돌기둥들이 연이어 밝아졌다.
이어 석목은 발밑의 법진이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하얀 빛이 반짝이더니 그의 모습이 또 다시 사라져버렸다.
지난번의 아슬아슬했던 전송 과정과 달리, 석목은 이번에는 별다른 위기를 겪지는 않았다. 다만 하늘이 빙빙 도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낀 끝에 낯선 곳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칠흑같이 캄캄했고,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는 거대한 평대 위에 놓여 있었고, 주위에는 수많은 전송진이 널려 있었는데, 수백 개의 돌기둥 위에는 용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돌기둥의 숲 같은 모습이었다.
돌기둥의 숲 속에서는 크고 작은 그림자들이 여기저기를 누비고 있었다. 평대 밖에는 무언가를 파는 노점상들이 있는 게 보였다. 규모가 작은 노천 시장이 열려 있는 듯했다.
평대 위의 그림자들은 생긴 것이 기괴했고, 대부분 사람과 요수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석목은 그걸 보며 신기해했다.
온 몸이 붉은 색이고 악어 머리에 구렁이 꼬리를 하고 있는데 그 위가 비늘이 덮여 있는가 하면, 사람의 몸에 구렁이 머리가 올라간 채 붉은 원숭이의 혀를 내밀고 있는 것도 있었다. 아무튼 요상한 모양새였다.
석목은 신식을 발휘해서 주위를 훑어보았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서 기운이 강한 자는 천위의 경지였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대부분 선천에서 지계 정도로 보였다. 다만 선천 이하는 한 명도 없었다.
이후 어떤 전송진이 나타났고, 대부분은 이곳에 오래 머물려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서둘러 전송진으로 들어간 뒤 하얀 빛과 함께 사라졌다,
석목은 자신이 있는 법진이 평대의 외진 구석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근처에 있는 여러 법진에는 사람이 없어서 다소 쓸쓸해 보였다.
그는 머리를 돌려서 자신이 온 법진의 위치를 기억한 뒤, 평대의 가운데로 향했다.
한참 후 석목은 평대 위를 한 바퀴 다 돌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이 거대한 평대의 정체를 대략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어느 성역 전송진의 집결점인 듯했다. 이곳에 분포된 전송진은 아마도 각각 여러 별로 이어지고 있을 것이고, 기묘하게 생긴 사람들은 다양한 별에서 온 이들일 것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동행끼리 대화를 할 때는 해괴한 말을 사용했고, 자신의 종족이 아닌 사람과 소통을 할 때는 또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석목이 곰곰이 생각한 결과, 다른 족과 교류하는 언어는 아마도 공용어로 쓰이는 말 같았다.
또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하는 자들이 이곳의 전송진을 사용하려면 각자 성석을 준비해야 했는데, 그 크기는 손톱만 했다. 그것을 법진 속으로 밀어 넣고 거무칙칙한 부문을 몸에 붙이면 검은 빛의 보호 하에 법진이 활성화되어 이동할 수 있었다.
석목은 여기까지 살피고 나서 생각에 잠겼다.
성역의 세계에서는 경지가 낮은 무인과 술사도 똑같이 성역 전송진을 사용할 수 있는 듯했다.
석목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주먹만 한 성석을 드디어 적절한 곳에 써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평대 바깥쪽의 시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삼 개월 뒤, 남해성보다 훨씬 작은 어느 별.
이곳은 거의 끝이 보이지 않는 파란 바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다에는 일고여덟 마리의 산봉우리만한 푸른 거북이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거북이들은 전부 작은 섬 같았고 절반은 바다에 잠겨 있었는데, 꼬리와 머리를 한 줄로 맞대고 있어서 좁고 긴 섬의 고리처럼 보였다.
거대한 거북이 사이는 쇠줄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위로 넓고 큰 철판이 깔려 있어서 평평한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길 위에는 돌로 지은 집은 한 채도 없었고,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천막만 있을 뿐이었다. 천막 안에는 각양각색의 수련 자원과 기이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천막 앞에는 푸른색의 큰 피풍을 두르고, 머리에는 타원형의 기이한 모자를 쓴 청년이 손짓발짓을 하며 서 있었다.
남자의 어깨에는 빛깔이 고운 앵무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고, 앵무새 역시 날개를 퍼덕이며 계속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청년은 다름이 아닌 석목이었다.
그의 앞에는 붉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뚱뚱한 여자가 무언가를 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는 부산스러운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석목의 눈은 바닥에 놓인 농후한 영기를 발산하는 약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사고 싶었지만, 파는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아우우!
바로 그때, 그의 옆에서 갑자기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물독 굵기의 구렁이가 바다에서 몸을 드러내며 허공에서 허우적거렸다.
석목은 곁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가까운 해안에 피부가 푸르고 키가 한 장 정도 되어 보이는 민머리의 건장한 남자 두 명이 나타났다. 둘은 어깨가 드러나는 민소매 상의를 입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손으로 기둥 모양의 긴 관을 만지작거리며 온 힘을 다해 흥겨운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는데, 고기를 잡는 그물 같았다.
그 바다구렁이는 연주에 맞춰 규칙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소리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석목은 그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이런 식으로 바다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을 이미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그는 다시 어렵게 손짓 발짓을 했고, 마침내 뚱뚱한 여자와의 거래가 성사되었다. 그는 영석을 지불하고 그 작은 꽃 약초를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