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초입비경(初入秘境)
“그럼 이제 시작입니다!”
노인은 별다른 설명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어 노인은 하늘 위로 떠오르더니 몸을 돌리고, 높이가 삼사백 장은 되어 보이는 자색 나무를 마주보았다.
평범해 보이던 자색 나무의 밑부분에 있는 무늬가 환하게 밝아지더니, 뿌리를 통해 나뭇가지로 빠르게 뻗어나갔다. 그것은 폭포처럼 뻗어 있는 덩굴을 자색 빛으로 물들였다.
노인이 입을 벌리자 삼각뿔 형태의 고동색 열쇠가 그 안에서 나왔다.
그 열쇠는 서서히 노인의 머리 꼭대기로 올라가더니 자색 빛을 뿜었다. 그리고 노인의 등 뒤에 있는 자색 나무로 들어가서 사라져버렸다.
윙!
강렬한 영력의 파동과 함께 폭포처럼 널브러진 자색 덩굴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희미해지다가 곧 사라지면서 커다란 자색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소용돌이의 중앙에서 공간 파동이 일렁이더니, 자색 나무가 일그러지면서 나무를 가릴 정도로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문 속은 희미했는데, 그 안에서 강렬한 파동이 몰려왔다.
“입경합니다!”
노인이 큰 소리로 말하자 주위에서 하늘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어 수천 갈래의 그림자가 서로 앞을 다투어 그 거대한 문을 향해 날아갔다.
그들은 거대한 문에 닿는 순간 번쩍이며 차례로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어서 비명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일고여덟 사람이 공간에 진입하는 순간, 몸 전체가 자색 빛을 드리우더니 갑자기 한 덩어리의 핏빛 안개로 변해버린 것이다.
석목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두려움이 몰려왔다.
죽은 사람들은 방금 전에 노인이 말한 그런 사람들인 게 분명했다. 그들은 비술로 경지를 일시적으로 상승시켜서 비경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어떤 금제에 의해 입구에서 처참하게 죽어버린 것이다.
수만 명이 몰려들면서 발생한 하늘을 찢는 듯한 소리, 그리고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전부 그 비명소리에 묻혀버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안쪽 공간을 향해 들어갔다. 체형이 제각각인 사람들이 모여서 홍수처럼 거대한 공간을 향해 몰려가는 모습은 실로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잠시 관찰하던 석목은 막 뛰어들려고 하다가, 순간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낀 듯 다시 머리를 돌렸다. 그가 멀지 않은 방향을 바라보자 몇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중 두 명은 붉은 머리를 하고 있는 요족 청년 남녀였는데, 그들의 모습은 눈에 익었다.
붉은 머리의 소녀는 이목구비가 수려했고 몸매가 아름다웠다. 그리고 요족 청년은 예전에 석목에게서 채아를 사려 했던 마열이었다.
붉은 머리 소녀는 석목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마열은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석목과 눈이 마주친 뒤에도 마열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웃고 있었다.
이어 소녀의 재촉을 받은 그들은 뿔뿔이 입구 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런데 입구까지 날아간 소녀가 갑자기 뒤로 돌더니, 석목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재빨리 안쪽으로 사라졌다.
석목은 사라진 그들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문의 안쪽을 향해 날아갔다.
공간의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석목의 눈앞에서 자색 빛이 번쩍였다. 그는 잠시 시력을 잃었지만 이내 회복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넓디넓은 푸른 초원이었다.
그곳에는 사람의 어깨높이까지 자라난 푸른 잡초들이 먼 지평선까지 자라 있었다. 그것들이 바람에 의해 살랑살랑 흔들리는 장면은 마치 파도가 일고 있는 푸른색의 바다 같았다.
석목의 주위에는 크기가 각각 다른 여러 종족의 청년 수백 명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온통 사방을 경계하는 긴장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중 키가 가장 큰 사람은 이 장 정도 되어 보였다. 그는 잡초가 겨우 무릎 높이까지 올 정도로 컸다.
석목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그와 함께 비경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전부 근처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모든 참가자는 비경 안에 있는 다른 구역으로 각각 임의로 보내진 것 같았다.
보름 전 석목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번 시험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했다.
근 백만 년 동안 시험은 똑같은 비경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사실 그 안의 상황은 비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다지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적지 않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 수천청산 비경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는데, 그 크기는 엄청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정보는 거의 외곽 지역에 한정된 것이었고, 비경의 깊은 곳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중앙 구역과 가까워질수록 서식하고 있는 요수의 힘은 점점 강해졌고, 그만큼 위험 요소도 많아지는 것은 틀림없었다.
비경 외곽 구역은 대략 열 곳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것은 십방천지(十方天地)라고 불렸다.
이 십방천지는 하나하나가 드넓었는데, 지형의 특징이 전부 달랐다. 어떤 곳은 모래로 뒤덮인 사막이었고, 또 다른 곳은 암석이 가득한 돌숲이었으며, 어떤 곳은 습지가 천 리나 뻗어 있는 식이었다. 지금 석목이 도착한 곳은 원시의 초원이었다.
십방천지에 있는 요수는 선천급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지계 경지는 드물었다. 경지가 제일 높은 것이 지계 초기에 불과했다. 그 말인즉슨, 이곳에 머물게 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석목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처에서 계속 공간의 파동이 생겨났고, 그때마다 사람이 한 명씩 늘어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사람이 도착하는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고, 어느덧 공간 파동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게 되었다.
그 사이 이미 이곳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서로를 경계하는 태세를 취하고 있긴 했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석목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제 막 비경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소지하고 있는 영패의 점수는 영 점이었고, 그러니 의미 없는 싸움을 벌이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싸움을 벌여봤자 시간낭비였다.
석목의 시선이 닿는 범위 내에는 이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석목처럼 주위의 환경을 파악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겁도 없이 책상다리를 하고 바닥에 앉아 있었고, 또 누군가는 아는 사람을 만난 듯 서로 이름을 불렀다. 동족으로 보이는 그들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무리를 지어 떠나갔다.
주위를 관찰하던 석목은 그들이 전부 요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 인족은 그를 포함해 총 세 명밖에 없었다.
그중 한 명은 석목이 있는 곳에서 동북쪽으로 백 장 정도 거리에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침착해 보이는 용모였으며, 머리 위로 상투를 틀고 가슴 앞으로 귀밑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달빛처럼 하얗고 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걸음걸이가 가볍고 느릿느릿한 게 상당히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다.
석목은 그 청년이 신경 쓰였다. 그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을 전혀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신식을 사용해도 그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석목이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청년은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곧바로 초원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석목은 그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영성(灵星)에서 오셨나요?”
갑자기 그의 뒤편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석목은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려보았다. 그의 앞에는 여덟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인족 소녀가 서 있었다.
비취색 옷을 입은 소녀는 자색의 짧은 머리를 양 갈래로 묶었는데, 그것은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피부는 백지장처럼 하얀 데다 혈색이 거의 없어 창백하게 보였다.
상당히 영리해보였고, 보기만 해도 저절로 애정이 생겨나는 아이였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지계 초기 경지에 올라 있다는 말인가?’
석목은 그 아이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난 영성에서 온 게 아니야.”
석목이 웃으며 답했다.
“저는 자릉(紫菱)이라고 해요. 영성에서 왔고, 인족이에요.”
아이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석목이라고 해. 남해성에서 왔어.”
석목이 답했다.
“석 오라버니군요. 반가워요!”
아이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릉, 너는 몇 살이야? 이렇게 어린 나이에 여기에…….”
석목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가 오겠다고 했어요. 저는 꼭 청란성지에 들어갈 거예요!”
자릉은 석목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구나.”
석목은 머리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 오라버니는 비경에 처음 온 건가요?”
자릉이 물었다.
“그래.”
성목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석 오라버니, 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이곳과 관련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자릉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곳의 요수에 대해서도 알고 있니?”
석목이 물었다.
“제가 알기로는 이곳의 요수는 저희 영성에 있는 것과 많이 다르다고 해요. 가장 큰 차이는 이곳의 요수들은 요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지요.”
자릉이 말했다.
“요핵이 무엇이지?”
석목이 재차 물었다.
“요핵은 요수의 힘이 집결된 것인데, 선천 이상만 갖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요수의 요핵으로 단제부(丹制符)도 만들 수 있고, 경지가 높은 요수의 요핵으로는 영기를 만들 수 있어요.”
자릉이 말했다.
“요핵이 그런 역할도 한다고? 그럼 청란성지는 십 년마다 많은 제자를 비경으로 들여보내서 힘들게 키워낸 요수들을 죽이는 거잖아? 그건 손해가 아닐까?”
석목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청란성지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에요. 우리에게 준 이 청산령은 특수한 저장 도구죠. 우리가 죽여서 얻어낸 모든 요핵은 여기로 자동으로 흡수되는데, 우리는 청산령에 기록되는 점수를 볼 수 있을 뿐 요핵을 꺼낼 수는 없어요. 모든 청산령은 마지막에 청란성지에서 전부 회수해가기 때문에, 이곳에서 획득한 모든 요핵은 전부 청란성지의 것이 되는 거죠.”
자릉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청란성지가 매번 이렇게 많은 제자를 들어오게 하는 걸 보고 통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대가 없이 일을 대신 해주는 거나 마찬가지였구나. ”
석목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에요. 우선 청란성지에 들어가면 많은 걸 얻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비경만 해도 외부에서는 흔하지 않은 자원과 보물이 있어요. 그래서 이곳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는 사람도 많아요. 예를 들면 점수를 팔아먹으려는 장사꾼도 있고요.”
자릉이 말했다.
“그렇구나. 그럼 각자 다른 경지에 있는 요수들의 요핵은 점수 차이가 얼마나 되는 거야?”
석목이 궁금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음……. 자세히 말하자면 선천 등급의 요핵 점수가 가장 낮아요. 전부 십 점이나 오 점 정도라서 큰 의미가 없죠. 지계의 요핵 정도라면 월등히 높아지는데, 지계 초기만 해도 백 점이나 되고 지계 중기는 천 점, 지계 후기는 만 점이지요. 더 높은 단계에 있는 천위의 요핵을 손에 넣으면 한 번에 최소 십만 점은 얻을 수 있어요. 하지만 여태껏 비경에 들어온 제자들이 천위 요수를 죽이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고 해요. 결국 대부분은 지계급 요핵을 얼마나 얻었느냐에 따라 승부가 나지요.”
자릉이 머리를 돌려 생각하더니 말했다.
“자릉은 어린 나이에 참 많은 걸 알고 있구나. 큰 도움이 되었다.”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가문에서는 많은 사람이 이 비경에 온 적이 있어서, 전부 그들이 알려준 것이에요. 석 오라버니,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같은 인족인데 사이좋게 잘 지내야야죠.”
자릉이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그녀에게서 취득한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그리고 비경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는 자릉이라는 아이에게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아이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