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자릉
둘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여러 사람이 그곳을 떠났다.
석목은 아이와 대화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신식으로 주위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앞서 사람들은 대부분 지계 중기 정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었고, 심지어 몇 명은 지계 후기의 실력자였다. 다른 사람들보다 강한 사람일 경우에는 그만큼 담력도 강해서 여기저기 비집고 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몸집이 일 장 정도 되는, 대추색 피부를 가진 이족 남자였다. 그는 지계 후기의 막판까지 수련했고,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을 거리낌 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석목이 그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의 벗은 상체에 기괴한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흉악하게 생긴 화염의 괴수 문양이었는데, 용맹하고 사나운 기운을 뿜고 있었다.
혼자서 떠난 사람들 외에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 알고 있는 동족이거나, 혹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은 사람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실력이 비교적 떨어지는 편이라 무리에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또는 천성적으로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었다.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이 있는 만큼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석목은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몸에 비단 두루마기를 두르고 허리에 옥대를 하고 있는, 몸집이 작은 푸른 머리의 요족 청년이 있었다. 그는 비슷한 외모의 요족 세 명을 데리고 한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푸른 머리 청년의 머리 위에는 뾰족한 뿔이 있었고 코끝은 거무칙칙했다. 온몸에 비단을 화려하게 두르고 있는 게 신분이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고, 실력 또한 지계 중기 정도 되어 보였다.
“소저, 나는 전환(田欢)이라고 합니다. 비경은 위험하니 우리와 함께 하시지요. 각자 돕는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푸른 머리의 청년이 여자에게 말했다.
푸른 머리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여자는 피부가 하얗고 푸른 머리를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인족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인족보다 훨씬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을 가졌고 뾰족한 두 귀가 머리카락 사이에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어여쁘지만 차가운 얼음장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혼자 행동하는 것이 편합니다.”
푸른 머리의 여자는 전환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답했다.
전환은 무엇인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푸른 머리의 여자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몸을 돌려 떠나갔다.
석목은 그 여자를 잠깐 봤을 뿐이었지만, 그녀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외모가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계 초기의 무인 중에서는 처음으로 혼자서 그 장소를 떠났다.
“사리판단을 못하는군.”
전환은 멀리 떠나가는 그녀를 보며 낮은 소리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다른 세 명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간 후 또 여러 명이 무리를 지어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에는 스무 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대부분 지계 초기의 실력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큰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러분, 저는 희강(姬江)이라고 합니다. 여러분과 상의할 일이 좀 있습니다.”
석목은 놀라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쪽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말을 꺼낸 것은 양쪽 볼에 검은 비늘이 자라난 요족 청년이었다. 그는 몸을 숙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키는 인족보다 훨씬 컸고, 몸에는 푸른 피풍을 두르고 있었는데 마른 편이라 어깨에 걸친 천이 계속 흘러내렸다. 두 개의 날개뼈가 찢어진 옷 사이로 튀어나온 모습이 뭔가 익살스러웠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이 수천청산의 비경에서는 요수 외에도 수많은 영초를 채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고작 지계 초기 실력이라 선발이 될 거라는 희망을 버린 지 오래라서, 그냥 이곳 구경이나 하고자 합니다. 오늘 여러분을 만난 것도 인연이니 동행하며 서로를 도와주는 건 어떻습니까?”
희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마른 청년이 말했다.
“함께 움직이는 건 좋지만, 그럴 경우 요수를 사냥하면 요핵은 누가 가집니까?”
희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가 되물었다. 이어 여기저기서 의논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경은 위험천만한 곳입니다. 여러분이 혼자 움직이면 강한 요수를 사냥할 수 없을뿐더러, 요수나 다른 무리의 공격 목표가 되지요. 그렇게 되면 비경의 더 깊은 곳을 탐색하는 것은 둘째 치고, 살아서 무사히 돌아가는 것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희강의 말에 사람들은 조용해졌다.
“함께 움직이면 높은 경지의 요수들을 잡을 확률이 현저히 높아지고, 여러분의 안전도 더 보장받을 수 있겠지요. 취득한 영초와 요핵은 발견한 사람의 몫으로 하고, 지계 이상의 요수를 사냥하여 얻은 요핵은 공헌한 정도에 따라 공평하게 나눕시다. 여러분, 어떤가요?”
희강이 다시 제안했다.
이 말에 많은 사람이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다들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것에는 긍정적인 반응이었지만, 몇몇은 고민을 하다가 혼자 떠나갔다.
희강은 떠나는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계획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희 도우, 당신이 말한 구역은 제가 십 년 전에도 가본 곳입니다. 그곳에는 선천 요수만 있을 뿐 영초는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런 곳에서 시간 낭비를 할 필요는 없어요.”
희강이 흥에 겨워 말하고 있을 때, 이마에 세로로 눈이 박히고 수염이 더부룩한 푸른 피부의 남자가 끼어들었다.
“도우가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이 구역은 확실히 큰 가치가 없습니다. 다만 이곳을 통과해야만 비경의 깊은 곳으로 가장 빠르게 갈 수 있지요. 제가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얻은 정보에 의하면 그곳에 지계 요수의 서식지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들었어요. 그곳에 가서 다 같이 마음껏 사냥하면 됩니다.”
희강이 설명했다.
희강의 말을 듣자 수염이 더부룩한 남자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십여 명의 사람은 전부 지계 초기의 실력이었기에, 희강의 말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말을 끝낸 후 희강은 바깥쪽에 서 있던 석목과 자릉을 발견했다. 그들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자릉에게 머물렀다.
“꼬마 아가씨, 내 생각에는 우리를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희강은 전혀 거리낌 없이 말했다.
“희 도우, 자릉은 나와 함께 왔습니다.”
석목이 눈썹을 위로 치켜뜨면서 말했다.
“그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저 아이는 인족이라 육체가 선천적으로 약합니다. 어린 나이에 지계의 경지에 올라선 걸 보니 영약의 도움을 받아 강제로 경지를 끌어올린 것으로 보이는군요. 기운도 온전치 못한데 함께 해봤자 짐만 될 터이니, 아마 다른 분들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희 도우의 말이 맞습니다. 짐이 될 것이 빤한데 그런 고생은 못하지요.”
“그렇습니다. 안 됩니다. 서로에게 폐만 끼칩니다.”
사람들의 말에 희강은 두 손을 저으며 난감한 듯 말했다.
“이것 보십시오. 제가 이 아이를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다들 부담스러워 하지 않습니까?”
석목은 고개를 돌려 자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자릉도 함께 가지요. 이 아이의 안전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경 안 쓰이도록 하죠.”
석목이 말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럴 필요는…….”
“희 도우, 더 말할 필요 없습니다. 이미 결심했어요.”
희강은 더 설득하려 했지만, 석목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석목의 태도가 단호한 것을 보고 희강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인족인 석목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 듯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희강은 말을 던지고는 사람들의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석 오라버니,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감사합니다.”
자릉이 석목의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작은 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별 거 아니야, 우린 같은 인족이니 더 힘을 합쳐야지. 나를 잘 따라와. 이 십방천지 구역만 떠나지 않는다면 널 최대한 안전하게 지켜줄게.”
석목이 말했다.
“네!”
자릉은 그 말을 듣고는 힘껏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석목은 꼭 사람들과 함께 움직여야만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이 무리에 이전에도 비경에 온 적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들과 함께 다니며 환경을 익히고 다음 행보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릉은 인족이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꺼리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외곽 쪽에서 움직이면 별다른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아이도 지계 초기의 실력자였다.
여정을 확정한 무리는 희강과 수염 남자의 인도 하에 초원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땅 위의 풀은 더욱 무성해졌다. 사람 키만 한 풀들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요수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며 각자의 수단을 통해 주위의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아마도 이곳은 여전히 십방천지의 가장 외곽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가는 내내 몇몇 선천 요수를 마주쳤을 뿐, 강한 요수를 만나지는 못했다. 또 특별한 약재나 보물도 찾지 못했다.
석목과 자릉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그들은 무리의 가장 뒤편에서 여유 있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잠시 후, 석목은 손을 흔들어 허리춤에 있던 회색 영수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채아가 나왔다. 채아는 허공에서 한참을 빙글빙글 돌다가 말했다.
“아이고! 석두, 드디어 꺼내주는구나.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후우, 이곳의 공기는 정말 신선하네!”
채아가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앞쪽에 있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일제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리 내려와, 그리고 조용히 해!”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채아에게 말했다.
채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입을 다물고 내려와서 석목의 어깨에 앉았다.
“와아, 엄청 예쁜 앵무새네요. 석 오라버니가 키우는 영총인가요? 너무 귀여워요!”
자릉은 눈을 반짝이며 채아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채아라고 해. 내가 데리고 있는 새인데, 애완용은 아니고 친구야.”
석목이 말했다.
“맞아, 나는 석두와 동급이라고!”
채아가 그의 말을 듣더니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자릉은 그런 채아가 마냥 귀엽기만 했다. 그녀가 작은 손을 흔들자 비단결 같은 빛이 손에서 날아올랐다. 그 빛은 채아의 몸을 감싸더니 이내 자릉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석목은 그 모습을 보고는 움찔했다.
‘술사?’
채아는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상당히 영리했기에, 평범한 수단으로는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어린 여자아이가 아무렇지 않게 부린 술법에 움직이지도 못하다니……. 역시 이 아이는 평범한 아이가 아닌 게 분명했다.
석목은 자릉을 더 자세히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릉은 채아를 안은 채 작은 얼굴을 비비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으윽……. 꼬마야, 내 예쁜 털에 침을 묻히면 안 돼!”
채아는 온 힘을 다해 퍼덕였지만 자릉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포기한 듯 석목을 원망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석목은 채아가 낭패를 겪는 것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조용히 있으라고 했잖아. 고생 좀 해봐라.’
석목의 눈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자릉을 향해 주의를 주었다.
“자릉, 너무 놀기만 하지만 말고 주위도 잘 살펴야 해.”
“네, 석 오라버니 말이 맞아요. 그래도 이 앵무새는 너무 귀여운 걸요!”
자릉은 그의 말을 듣고 민망한 듯 웃으며, 아쉬운 표정으로 채아를 놓아주었다.
채아는 빠르게 석목의 어깨 위에 올라앉았고, 더 이상 자릉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다.
“채아, 주위를 좀 살펴봐, 이곳이 이렇게 조용한 건 뭔가 이상해.”
석목은 전음으로 말했다.
“걱정 말고 나에게 맡겨! 내가 주위를 둘러보고 올게.”
채아는 그렇게 말하며 자릉을 한 번 쳐다보았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며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조심하고, 너무 멀리 가지 마.”
석목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또 전음을 날렸다.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채아는 날개를 펄럭이며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날아올라 사라졌다.
“석 오라버니, 왜 앵무새를 날려 보냈어요?”
자릉은 채아가 가는 쪽을 바라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주머니 속에 너무 오래 있어서 답답했을 거야. 가서 바람 좀 쐬라고 했어.”
석목은 그렇게 말하며 신식으로 주위를 탐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