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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364화 (364/916)

364화. 적예자(赤猊子)

세 마리의 풍령후는 거센 바람을 거두며 눈에서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더니 몸을 돌려 멀리 도망가 버렸다. 그들의 속도는 상당히 빨라서 눈 깜박할 사이에 멀리 이삼십 장 정도까지 달아났다.

“어딜 도망가!”

적예자는 멈칫하더니 한 손을 들었다. 그의 몸 주위로 적금색의 화염이 모여 들더니 불타는 긴 창으로 변신했다.

쓱!

그가 팔을 흔들자 화염의 창은 하늘에 금색 줄을 그으며 날아갔다.

창은 곧바로 이삼십 장 밖에 있는 풍령후의 목을 꿰뚫었다. 이내 풍령후의 거대한 몸이 땅에 쓰러졌다.

쿵!

화염이 번지던 긴 창이 터져지면서 풍령후의 몸은 타오르는 금색 화염에 뒤덮였다. 풍령후의 비참한 울부짖음이 들리다가 금세 사라졌다.

지계 후기 경지의 세 마리 풍령후는 그렇게 해서 눈 깜박할 사이에 죽어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희강 등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적예자의 몸에서는 금빛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화염이 그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가자 적예자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석목의 눈이 반짝였다. 적예자가 일으킨 금색의 화염은 위력이 엄청났다. 아마도 그의 왼손에서 나오는 하얀 화염과 비교해도 크게 차이가 없을 듯했다.

적예자가 몸을 숙여 세 마리의 풍령후 요핵을 챙기려는 찰나, 석목 무리도 땅 위로 내려와서 그를 경계하는 듯 바라보았다.

“허허, 나는 당신들의 손에 있는 보잘것없는 요핵은 관심이 없소!”

적예자는 푸르스름하고 주먹만 한 요핵을 손에 들린 청산영패 안에 담고, 몸을 돌려 주위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때 희강이 무리의 틈을 비집고 나와서 적예자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우리는 위기를 피했군요.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하며 적예자를 향해 아부를 떨어댔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분은 정말 놀라운 실력을 가졌습니다.”

“귀하의 화공이 엄청나게 뛰어난 걸로 보아, 혹시 말로만 전해듣던 화원성(火源星)에서 오셨습니까?”

* * *

“다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소? 당신들의 실력으로는 청란성지의 제자 입문은 꿈도 꾸지 못할 겁니다. 다들 주제 파악이나 잘들 하고, 살고 싶으면 빨리 돌아가시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말고.”

적예자는 커다란 손을 흔들며 이 말만 던지고 난 뒤 돌아섰다. 그는 몸에서 적색빛을 뿜어내더니 하늘로 날아올라 한줄기의 붉은 빛이 되어 날아갔다.

희강 무리는 서로 마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희 도우, 이곳에서도 이미 지계 후기의 요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나아가다가는 더욱 위험해질 게 뻔해요.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피부가 거무칙칙하고 긴 꼬리를 끌고 있는 요족 청년이 희강에게 물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은 계속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희강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귀가 뾰족하고 송곳니가 길게 뻗어 있는 이족 여자가 말했다.

방금 전에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고, 또 누군가 앞장서서 포기하자 다들 이쯤에서 물러나려는 듯했다.

“저 역시 더는 깊이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점수보다는 목숨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영초만 조금 채집할 참이었습니다. 목숨까지 버릴 수는 없죠.”

자릉은 석목의 옆에 서서 큰 눈으로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석목은 사람들을 지켜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강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머리를 들어 먼 곳을 몇 번 바라보더니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러분, 보아하니 이 비경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외곽 지역도 더 위험해졌고 높은 경지의 요수들도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들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다면 저도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우리 가문에서 표시해놓은 안전지대와 상당히 가깝습니다. 우리 일행은 제가 제안을 해서 뭉친 것이니 제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저와 함께 그 안전지대로 간 뒤에 각자 흩어지는 건 어떤가요?”

“희 도우가 말하는 안전지대는 어디인가요?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긴 꼬리의 요족 청년이 물었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오십 리 정도 가면 작은 산골짜기가 있는데, 그 근처는 요수가 출몰하지 않아서 안전합니다. 또 골짜기에 영초도 많이 있습니다.”

희강이 답했다.

“희 도우님은 그렇게 좋은 곳이 있는데 왜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귀가 뾰족하고 앞니가 튀어나온 요족 여자가 경계하듯 물었다.

“앞서는 다들 자신만만하게 비경으로 들어가서 보물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도 별다른 말씀을 드리지 않은 것이지요. 그 구역은 우리가 가는 방향과 다른데, 제가 미리 말씀을 드렸다 해도 이중에서 몇 명이나 가기를 원했겠습니까?”

희강이 한숨을 쉬며 되물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 두리번거리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함께 한 정을 봐서 가문이 비밀리에 기록해둔 안전지대를 공개하는 겁니다. 결정은 여러분이 하세요. 의심을 거둘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바쁘게 그는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희 도우, 기분 나빠하지 마시지요. 저는 함께 가겠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희강이 떠나려 하자 여전히 의심이 가시지 않는 몇몇 사람 외에는 다들 어쩔 수 없이 뒤따라갔다.

석목은 멀지 않은 곳에서 희강을 한 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 오라버니, 우리도 따라갈까요?”

자릉이 일행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따라가보자.”

석목은 긴 말을 하지 않고 바로 사람들을 따라갔다.

희강을 따르는 무리가 반 각 정도 걷자, 멀지 않은 곳에 초원과 언덕 사이로 작은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희 도우, 당신이 말한 안전지대는 이 산맥 안에 있나요?”

누군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우님, 성급하게 굴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아마 이 산맥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저도 이곳에 오는 건 처음입니다. 다들 천천히 따라오세요. 제가 먼저 가서 안전한지 확인하고 다시 여러분에게 알리겠습니다.”

희강은 앞쪽 산맥을 바라보더니 하늘을 날아서 그쪽으로 향했다.

“조심하자. 뭔가 심상치가 않아.”

석목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자릉을 향해 전음으로 말했다.

“석 오라버니, 왜요?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자릉은 그의 말을 듣자 급하게 신식을 구사하며 다시 물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뜻이야. 이 근처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고 요수의 기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러니 뭔가 더 이상하지 않니?”

석목은 변함없는 안색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는 자릉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은 걸음걸이를 늦추어서 앞쪽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

반 각 후, 무리는 작은 산맥 근처까지 도착했다. 앞쪽에서 길을 안내하던 희강은 산맥 속으로 들어간 이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희강이 들어간 지 꽤 오래 지났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요?”

“아닐 겁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근처에 강한 요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기다려봅시다.”

그들은 산맥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수군대며 의논하기 시작했다.

석목은 무리의 끝에 서서 앞에 있는 조용한 산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의심이 밀려왔다.

산맥은 크지 않았지만 그 안은 천지의 기운이 짙었고, 분명히 특별한 점이 있었다. 지형을 보니 앞쪽에 산골짜기 입구가 여러 개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 듯했다.

시간이 흘러 이 각 정도가 지났지만, 희강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희강이 우리를 버리고 혼자 도망간 것은 아닐까요?”

“대체 어쩌자는 거야?”

다들 초조해하면서 의논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때 앞쪽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이건 삼백 년 묵은 도액초(渡厄草)잖아!”

“태일지(太一芝)도 있어!”

“여기에는 원양화(元阳花)가!”

“희강이 말한 게 맞았어요. 이 산맥에는 영초가 잔뜩 있네요.”

앞에 있는 누군가가 산맥의 입구에서 귀한 영초를 발견한 듯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전부 그쪽으로 몰려갔다.

“석 오라버니, 우리는 가지 않나요?”

자릉은 석목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을 보더니 물었다.

“자릉, 너는 희강의 행동이 이상하지 않니? 희강의 가문에서는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지금까지 그대로 뒀을까?”

석목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요.”

자릉은 눈을 깜박이며 이상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큰일이다!”

순간 석목은 낮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일으켜 뒤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펑!

커다란 소리가 나면서, 석목은 멀리 가지 못하고 무언가에 부딪혀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날아왔다.

석목은 몸을 굴리며 운철흑도를 손에 쥐고, 진기를 잔뜩 불어넣은 뒤 한 손으로 흔들었다.

날카로운 소리가 칼에서 흘러나왔고, 칼의 표면에서 흙빛이 반짝이더니 십 장이 넘는 검고 긴 빛이 앞쪽의 허공을 찔렀다.

하지만 앞쪽의 허공에서는 형태가 없이 파동만 일어났고, 칼날이 떨어진 곳에서 자색 부문이 촘촘히 생겼다가 다시 사라졌다.

자릉은 그것을 보더니 다급하게 오색 비단을 앞쪽으로 날렸다.

픽! 픽!

소리가 들리며 허공에서 오색의 빛이 번쩍이더니 이내 사라졌고, 다시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석목과 자릉 두 사람이 소란을 피우자 주위 사람들도 산골짜기에서 다시 돌아왔다.

석목과 자릉은 다시 한 번 다른 방향으로 공격을 해보았지만, 주위는 똑같이 막혀 있었다. 보이지 않는 막이 형성되어 일행을 이 구역에 가두고 있는 것이었다.

“큰일이다. 곤진(*困阵: 상대를 가두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진법)이야!”

누군가가 손에 쥔 영기로 곧바로 주위를 공격했다.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각양각색의 빛이 주변에서 폭발했고 허공에서 무형의 파동이 일어났다.

표면에 촘촘하게 자색 부문이 나타났다가 한참을 구르더니, 이내 원래대로 회복하여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유문진(幽门阵)은 지계 후기 무인들도 한참을 애먹어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니, 다들 힘을 빼지 마시오!”

비선 위에는 네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희강이었다.

나머지 세 명은 얼굴에 검은 비늘이 돋아 있었는데, 같은 종족인 듯했다.

“희강, 이게 지금 뭐하자는 건가?”

“빨리 우리를 내보내주시오!”

밑에서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희강, 애써 이곳까지 우리를 데리고 오더니……. 수작을 부린 것이었군!”

독수리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이제 알겠다는 듯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하하, 그건 저를 과대평가하신 겁니다. 원래는 당신들을 좀 더 오래 끌고 다니면서 더 많은 요핵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다들 고작 풍령후 몇 마리에 놀라 도망치려는 겁쟁이들이라 어쩔 수 없었지요. 그럼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청산령이나 내놓고 사라지시지요.”

희강은 그 남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내 청산령을 가져가려고? 꿈도 꾸지 마라!”

귀가 뾰족한 이족의 여자는 그 말을 듣자 화를 내며 몸에서 푸른빛을 뿜냈고, 긴 칼을 앞으로 꺼내들었다.

“분수도 모르는군요. 그럼 당신을 먼저 보내드리지요.”

희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옆에 있던 청년들이 푸른빛을 번쩍이며 내려왔다. 그들은 용의 머리에 검게 반들거리는 박쥐의 몸을 하고 있었다. 내뿜는 기운으로 보아 지계 중기 정도에 도달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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