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눈의 전쟁
땅을 바라보던 석목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땅은 순식간에 검푸른 습지로 변했고, 그 위에 초록색 안개가 퍼져나갔다. 그리고 울퉁불퉁한 기포가 생기더니 갈라져버렸다.
불바다와 습지로 변해버린 땅 위의 허공에서 싸우던 두 사람도 동작을 멈추었다. 그들은 각각 불바다와 습지 위에 서 있었다.
불바다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석목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전에 보았던 대추색 피부의 민머리 남자 적예자였다.
습지 위에 서 있는 사람도 눈에 익었다. 그는 온 몸에 푸른 옷을 두르고 그 안에 초록색 천을 휘감고 있어서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오로지 밖으로 내놓은 두 눈만 밝게 빛을 내고 있었다.
적예자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그는 흉악한 표정으로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적예자, 네가 화원성에서 수련한 화공(火功)이 나의 독공(毒功)을 어느 정도 막을 수는 있겠지만, 나 여경(吕景)도 천독성(天毒星) 가문의 적통 제자다. 우리가 사흘 밤낮으로 싸워봐야 어차피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은 적예자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한 듯 담담하게 말했다.
“흥!”
적예자는 콧바람을 내뱉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대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 심장 성액을 오 씨 형제(乌氏兄弟)에게 빼앗겨서 남 좋은 일만 시킬 텐가?”
푸른색 옷을 입은 사람은 상대가 아무 답이 없자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말했다.
“됐어! 내가 천동성 사람들을 싫어하는 건 맞지만, 오 씨 형제가 속해 있는 자금성(地禽星)은 우리 화원성에게는 더 큰 적이야. 청장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나중에 다시 실력을 겨뤄보자고!”
적예자는 차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래를 한 번 보더니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런데 밑에 있는 그 인족은 또 뭐야? 왜 전처럼 쫓아 보내지 않았어?”
청장천은 그 말을 듣더니 히죽 웃으며 답했다.
“쉽게 쫓아낼 수 있는 상대였다면 그렇게 했겠지. 저 사람은 인족이지만 어쩌면 실력이 우리보다 뛰어날 수도 있어.”
“호오, 정말인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여경은 그 말을 듣더니 적예자가 말하기도 전에 신기한 듯 석목을 바라보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눈에서 초록색 빛이 스쳤다.
석목은 그의 눈빛을 느끼고는 머리를 들었다.
쿵!
석목은 여경이라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 순간,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머릿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의식의 바다에서 소용돌이가 일었다. 그의 눈은 멍해졌으며 혀끝까지 마비가 오는 듯했다.
그의 눈빛이 희미해지며 거대한 나무 불바다 습지와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져버렸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검푸른 세상이었다.
청장천은 석목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서, 눈을 얇게 뜨더니 그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적예자의 눈길이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을 향했고, 그 눈빛에는 경멸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다시 가여워하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고, 고작 인족 따위는 여경과 상대도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 석목의 의식 바다 주위에 초록색의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바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금색의 사람이 작은 돛배처럼 파도를 따라 밀려가고 있었고, 하늘을 뒤덮은 안개가 그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그의 의식을 뚫고 들어가려는 듯했다.
그 순간 금색을 띠는 사람이 한줄기의 금빛을 뿜었다.
금빛은 고리형 물결이었는데, 몸을 중심으로 주위로 퍼져나가더니 순식간에 초록색 안개를 의식 밖에서 차단해버렸다.
석목의 동공 주위로 금색이 감돌더니 빛이 크게 번졌다. 이어 빛이 그의 눈에서 층층이 뿜어져 나와서 얇은 막을 형성했고, 동공 밖에서 굳어졌다.
석목의 동공 앞에서 얇은 초록색 안개가 피어올랐고, 순간 그 안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얇고 긴 줄을 형성하여 꿈틀거리며 금빛의 막을 뚫고 석목의 동공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했다.
하지만 얇은 금색 막은 엄청나게 단단해서, 안개가 아무리 꿈틀거려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초록색이 흩어지면서 무색의 안개로 변하더니 금빛 막에 스며들려 했다. 그 순간 석목이 정신을 되찾고 소리쳤다.
“꺼져!”
그의 두 눈에서 금빛이 더욱 크게 번졌다.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처럼 뿜어져 나오더니 안개를 향해 뻗어갔다.
칙칙!
석목의 귀에만 들릴 듯한 작은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의 눈앞에서 피어오르던 안개들은 금빛에 둘러싸여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졌다.
석목의 눈앞에 있던 초록색 바다가 사라지면서 원래 보이던 것들이 고스란히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두 눈의 금빛은 사라지지 않고 위로 피어오르더니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을 향했다.
“아!”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이 허공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며 그의 몸이 격하게 흔들렸다. 유난히 밝아 보이는 두 눈도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두 눈가에서 뱀처럼 까만 피눈물이 흘러내려 두 볼을 타고 초록색 천에 스며들었다.
“망할 놈. 저 인족 놈의 영동지체(灵瞳之体)가 내 입목독고대법(入目毒蛊大法)을 깨버렸어!”
여경이 얼굴을 가리며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 광경을 본 적예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다시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음…….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
적예자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잃어버린 초원에서 잠시 봤습니다.”
석목이 담담하게 답했다.
“어쩐지! 내가 그때 눈이 어두워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군.”
적예자가 이마를 치면서 말했다.
청장천은 이 모든 것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적예자와 청장천은 여경이 당하는 것을 보고 석목과 한판 붙어보려는 생각을 접었다.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여경이 초록빛을 반짝이더니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은 원래대로 회복돼 있었다. 그는 화가 나서 초록빛을 내뿜으며 다시 석목과 싸우려 했다.
석목은 그 모습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면서 몸에서 붉은 빛을 내뿜었고, 그의 몸에서 토템의 힘이 발동되며 금색 교룡 같은 흉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여경은 안색이 변했고, 석목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점점 더 심각해졌다.
두 사람이 칼을 뽑으려던 찰나, 그들 사이에 청장천이 끼어들며 말렸다.
“그만하세요!”
“청장천, 너도 내 독공을 맛볼 작정이냐?”
여경이 화를 내며 말했다.
“여 형이 흥미가 있으시다면 다음에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다만 수령왕이 깨어난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이렇게 우물쭈물하다가는 나무 심장 성액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것이 뻔합니다.”
청장천이 웃음기를 거두며 말했다.
여경은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침묵하더니 몸에서 빛을 거두었다.
석목은 그 광경을 보고 한숨을 길게 내뱉으며 기운을 가라앉혔다.
“여러분, 우기가 이곳에서 이렇게 만났으니 잠시 힘을 모으는 건 어떤가요? 지금 비경 속에서 나무 심장 성액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 씨 형제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고수들이 있을 수 있어요. 우선 나무 심장 성액을 차지하려는 자들을 물리치고, 그 다음에 다시 힘을 합쳐 수령왕을 쓰러뜨리는 건 어떤가요? 여기서 싸움을 벌이다가는 전부 손해 볼 것이 뻔합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청장천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적예자는 그 말을 듣더니 살짝 흔들리는 듯했다. 석목도 고민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흥, 그럼 수령왕을 죽이고 난 다음은? 나무 심장 성액과 수령왕이 지니고 있는 보물들을 어떻게 나눌 건데?”
여경이 말했다.
“적을 물리친 다음에는 남은 사람들이 각자의 능력대로 가져가는 것이지요.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청장천이 웃으며 말했다.
여경과 적예자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마음이 움직이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어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 도우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는 합류하겠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좋습니다, 석 도우. 시원시원하네요.”
청잔천은 그의 말을 듣고 좋아했다.
석목이 응하자 여경과 적예자도 결국 머리를 끄덕였다.
“하하, 좋습니다. 우리 네 명이 힘을 합치면 이 비경을 휩쓰는 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청장천은 의기양양해하며 크게 웃었다.
“흥, 누군가가 피해를 주지만 않는다면 그렇겠지.”
여경은 석목을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석목은 여경을 보며 눈빛이 흔들렸지만, 뭐라 반박하지는 않았다.
적예자는 아무 말 없이 몸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며 비경의 중심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허허, 보아하니 적 형은 급하시군요. 우리도 빨리 갑시다.”
청장천이 웃으며 몸에서 푸른빛을 뿜어내더니 놀라운 속도로 날아갔다.
석목과 여경은 서로를 마주본 뒤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네 사람은 보란 듯이 나란히 비경 중심을 향해 날아갔다. 그들이 내뿜는 무시무시한 기운 때문에 안에 있던 요수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가 버렸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참가자들의 실력은 전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녔는데, 그렇다 해도 네 사람의 실력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네 명 중 누가 나서도 한 무리를 가볍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한 사람이 공격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먹잇감에 손을 대지 않았다. 상대의 청산령은 자연스럽게 처음 공격한 사람의 몫이 되었다.
그동안 석목의 청산령에도 점수가 많이 쌓였다. 그도 드디어 백팔 명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네 사람은 비경의 중심에 도착했다.
그 순간 석목이 눈에서 금빛을 반짝이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앞쪽은 골짜기였는데, 하얀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석 도우, 왜 그러십니까?”
청장천도 멈춰서며 물었다. 적예자도 석목을 보더니 멈췄고, 여경 혼자서만 그대로 앞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가 막 협곡 위까지 날아갔을 때, 그 속에서 하얀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그러더니 길고 좁은 노란 그림자가 번개처럼 튀어나와서 그의 몸을 휘갈겼다.
여경은 안색이 변하더니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몸의 표면에 초록색 빛으로 보호막을 형성했다.
펑!
노란 그림자가 여경의 몸을 격하게 때리면서 굉음을 냈다.
여경은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튕겨나 버렸고, 그는 마치 거센 바람 속의 나뭇잎처럼 빙빙 돌며 뒤쪽으로 멀리 날아갔다.
여경이 초록빛을 뿜어내며 다시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화가 나서 붉게 부풀어 올랐다.
“여 형, 잠깐만요!”
청장천이 여경 옆으로 다가가서 공격을 가하려는 그를 막아섰고, 석목과 적예자도 그쪽으로 날아왔다. 그들의 표정이 심각해보였다.
여경이 앞을 바라보는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고, 골짜기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그 속에서 튀어나왔다. 몸집이 큰 요수들이었는데, 스무 마리 정도 되는 듯했다.
요수들은 전부 같은 종이 아니었고, 온갖 기괴한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풍기는 기운도 각각 달랐다. 비익각망(飞翼角蟒), 사호수(狮虎兽), 접랑(蝶狼),악갑웅(鳄甲熊)……. 함께 공존할 수 없는 흉악한 요수들이었지만, 서로 공격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들은 석목 일행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사람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 요수들이 내뿜는 오행지력(五行之力)의 기운은 전부 지계에 도달해 있었고, 지계 후기도 있었다.
맞대결을 한다면야 네 사람 중 누구 하나도 밀리지 않겠지만, 그 수가 워낙 많다보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