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388화 (388/916)

388화. 영기와 신물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석목이 소리를 지르자 놀라서 전부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우두머리인 표범 머리 이족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못했다.

석목도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몸에서 빛을 뿜어냈고, 순식간에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뭐하는 겁니까!”

“살……살려주세요!”

“당신……당신, 이랬다가는 후회할 거요!”

“아이고!”

“아악!”

석목이 민첩하게 움직이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 십여 명이 마치 병아리처럼 밖으로 내던져졌다. 사람들이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날아갈 때마다 허공에는 한줄기의 곡선이 나타났다. 수십 장 밖에서 비명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모든 일을 마친 석목은 손을 털더니 부저 방향으로 그대로 걸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풍 등 관사와 시종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 황계 구역에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고, 조심뢰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운이 좋지 않아서 이런 황량하고 메마른 영지로 배정을 받았다. 그리고 이곳을 거친 주인들의 실력도 당연히 보잘것없었고 지위 또한 낮았다. 심지어 전 주인은 얼마 전 시합에서 탈락하여 성지에서 쫓겨났다.

주인이 이러니 지위가 낮은 시종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다른 동부의 시종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됐든 이 구역에서는 주인의 지위가 시종들의 지위를 결정했다.

그들은 주인들이 거짓으로 위세를 떠는 것도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인족 부주가 나타났고, 그는 담력도 상당할 뿐만 아니라 성격마저 만만치 않았다. 몇 번 보지 못한 시종을 위하여 눈도 깜짝하지 않고 조심뢰의 시종들을 밖으로 날려버리다니?

이로 인해 시종들은 지금까지 속에 쌓였던 울화가 풀리고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다소 복잡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취환에게 뒷산의 석실로 오라고 전해라.”

석목은 사람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이 말만 던지고 자리를 떠났다. 머리가 복잡했던 관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았다.

“알겠습니다!”

제풍이 대답했다.

석목은 다시 산 속의 비밀 석실로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방석에 앉았다.

그는 옷자락을 접어 자신의 왼쪽 팔을 바라보았다. 왼쪽 팔에서 불빛이 타오르는 게 보였다. 잠시 후 습하고 차갑던 동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석목은 흡족해하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왼쪽 팔의 화염을 거두어들였다.

똑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었다.

“들어와라.”

석목은 옷소매를 내리고 돌 의자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초록색 시녀 옷을 입은 취환이 문을 열고 천천히 들어왔다.

“부주님.”

취환이 몸을 살짝 구부리며 인사를 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공경하는 듯한 표정이 어렸다.

“그 사람들이 말한 게 전부 사실인가?”

석목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취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입술을 천천히 벌렸다. 그러나 곧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나는 네 일까지 신경 쓸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니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면, 나중에 다시 조심뢰가 사람을 보낼 때, 나도 널 계속 남겨둘 이유가 없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그 말을 듣자 취환의 얼굴에 순간 당황의 기색이 드러났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고 눈에는 어두운 빛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심뢰라는 사람은 본 적 없지만, 조삼표라는 자는 한눈에 봐도 동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 같던데. 잘 생각해보도록 해.”

석목은 손가락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취환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어떤 결심을 한 것 마냥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풀며 말했다.

“부주님이 오늘 이렇게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소인은 너무 감사합니다. 실은 그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른 일과도 엮여 있어서 부주님께 폐라도 끼칠까봐 염려됩니다.”

“말해봐라. 결정은 내가 할 테니.”

석목이 담담하게 말했다.

“몇 십 년 전, 저의 조부 또한 청란성지의 백년제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결에서 패배하여 순위에서 밀려났고, 성지에서 쫓겨 나셨지요…….”

취환은 이를 악물더니 사실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석목도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었다.

“조부는 쫓겨나기 전 성지에서 삼십 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마지막의 몇 년을 앞두고는 그동안 모아둔 희귀한 재료와 모아두었던 모든 현령점을 갖고 성지의 무기를 만드는 연기대사(炼器大师)를 찾아갔죠. 상급 영기를 만들어서 대결에서 이기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이유로 인해 영기는 대결이 끝날 때까지도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부는 영기를 바꿀 수 있는 신물만 들고 청란성에서 나가게 되었지요.”

취환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멈추었다.

“상급 영기! 그 뒤에는?”

석목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조부님은 병을 앓다 돌아가셨고, 신물만 남기셨습니다. 저희 가족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영기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신물 때문에 원수들에게 전부 죽임을 당했습니다. 적이 습격해 왔을 때 저희 부모님이 목숨을 걸고 막아주셨고, 그래서 저만 혼자 간신히 도망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취환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럼 너는 어떻게 청란성지에 들어와 시녀가 되었느냐?”

석목이 다시 물었다.

“도망 나온 후에 혼자서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다른 행성을 오랫동안 떠돌아다녔고, 어렵게 빚을 내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이 청란성지에 들어왔습니다. 그 뒤 열심히 지계까지 수련하여 시종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취환이 말했다.

석목은 그녀를 보고 물었다.

“그 상급 영기를 손에 넣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구나.”

“맞습니다. 저희 가족들은 전부 그 물건 때문에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받아내지 못하면 가족들, 특히 돌아가신 부모님과 조부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취환은 이야기를 하며 감정이 격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성지에는 어떻게 들어왔다 해도 고작 저는 일 층의 시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현령탑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는데 어떻게 그때의 연기대사를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급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못했고, 소문이 새어나가는 바람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다시 안색이 어두워졌다.

“조심뢰가 너를 데려가려고 하는 이유는 그 신물 때문인 건가?”

석목이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렇습니다. 조심뢰는 그 소식을 알게 된 후 사람을 보내 저의 빚을 전부 갚아버렸고, 그 뒤로 저를 협박하며 신물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최근 들어 점점 빈번하게 찾아와서 부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취환이 말했다.

“상급 영기가 귀한 건 맞지만 네 안전이 최우선 아니냐? 그냥 줘버리면 될 텐데 어째서 무리를 하는 거지?”

석목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물었다.

“실은 그 연기대사를 만나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해서, 저 또한 영기를 찾는데 더 이상 희망을 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신물을 주고 피신하려 했지요. 그런데 다시 알아보니 이 조심뢰라는 자는 저희 가족들을 죽인 원수의 가문과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저의 영기를 빼앗는 것뿐만 아니라, 저까지 잡아서 수련을 위한 향로(炉鼎)로 쓸 작정이었습니다.”

취환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된 지금, 너는 어떻게 할 셈이냐?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강한 적을 만들고, 너를 평생 보호해야 하는 건가?”

취환은 석목의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듯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석목은 그런 모습을 보고 아무런 재촉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시간은 조금씩 흘러서 일 각이 지났다. 취환은 머리를 들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부주님이 도와주신다면 영기를 바꿀 수 있는 신물을 드리겠습니다.”

“그래?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

석목이 거부하지 않겠다는 듯 물었다.

“그 조심뢰는 부주님보다 두 기수나 앞서서 청란성지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저도 부주님이 그와 정면으로 충돌해서 난감한 일이 생기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숨을 곳만 마련해주시고, 당분간 잡혀가지 않게 도와주세요.”

취환이 말했다.

“그게 전부야?”

석목이 실눈을 뜨며 물었다.

“십 년입니다. 십 년 뒤에 부주님이 저의 보증인이 되어서 제가 다음 청란성지의 제자 선발에 참여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 뒤의 생사는 저의 몫입니다. 부주님은 더 이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취환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 목표는 청란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구나. 좋아, 그럼 다시 묻지. 너의 조부가 부탁한 그 상급 영기가 어떤 무기인지 알고 있느냐?”

석목은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러자 취환은 멈칫하더니 송구스러운 듯 말했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조부님이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어?”

석목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부주님,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실은 저희 조부님도 그 영기가 어떤 모양인지 몰랐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저희 조부가 가져온 재료가 워낙 특이해서, 그 연기대사는 새로운 제련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 영기가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게 할 목적이었지요. 그러나 모양이 결정되지 않아 제련하는 시간이 계속 늘어났고, 결국 조부님이 대결에 나설 때까지도 만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부님도 돌아가실 때까지 그 영기를 볼 수 없었습니다.”

취환은 조부 이야기를 입에 올리며 안색이 차가워졌다.

“상급 영기의 가치라면 널 보호할 이유가 충분한 것 같다. 좋아, 네가 제시한 조건은 받아들이지.”

석목이 눈을 반짝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부주님, 정……정말입니까?”

취환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석목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절박해졌다.

석목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머리를 끄덕였다.

물론 그도 상급 영기로 인해 마음이 흔들린 것은 사실이었다. 어찌됐든 그에게도 하급 영기밖에 없었다. 좋은 상급 영기를 가지게 되면 그의 실력 또한 급격하게 오를 것이었다.

실력이 늘어나면 그가 구전현공을 사용할 횟수도 줄어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의 비밀이 지켜질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십 년 동안 이곳의 모든 자원은 네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 특별한 목적이 있다면 영석으로 바꿔도 괜찮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취환은 석목의 말을 듣더니 다시 물었다.

“진심이십니까?”

석목이 눈썹을 치켜떴다.

“왜? 싫은 거냐?”

“아닙니다……. 부주님의 이 은혜, 반드시 갚겠습니다.”

취환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녀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됐다. 이제 신물을 나에게 다오.”

석목이 말했다.

그러자 취환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올랐다. 석목은 그녀를 바라보며 의아해했다.

취환은 원래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는데, 차갑던 얼굴에 붉은 빛이 더해지자 매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는 갑자기 손을 오른쪽 목덜미 쪽으로 가져가더니 단추를 풀었다.

초록색 옷이 조금 벗겨지며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그 옷 속으로 들어가더니 풍성한 골 사이에서 물건을 꺼냈다.

그녀에게서 눈을 피하려던 석목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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