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시험
석목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엄지손가락 크기의 제련 망치였다.
그 작은 망치는 온통 검은색이었고, 특별한 금속으로 제작한 것 같았다. 표면에는 복잡하고 오묘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특수한 진법으로 보였다. 그것은 독특한 불 속성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이것이 저의 조부님께서 남겨주신 신물입니다. 계속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취환이 옷매를 매만지며 그 제련 망치를 석목에게 건넸다.
석목은 그것을 보자마자 신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특별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취환 같은 사람이 절대 복제품을 만들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그 작은 망치를 받았다. 그것에는 사람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었고, 소녀의 몸에서만 나는 향기로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는 다시 망치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망치의 아래쪽에는 촉(烛)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저희 조부는 성이 냉(冷) 씨이고 이름은 선(蝉)입니다. 돌아가시기 전 그 연기대사의 이름이 용촉(庸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신물만 있으면 누구든 그 영기를 가져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취환은 석목의 표정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듯 말했다.
“그래, 가서 제풍과 사람들을 주실로 모이라고 해라. 할 이야기가 있다.”
석목이 취환에게 말했다.
“네, 부주님.”
취환이 대답하고 몸을 돌려 나갔다.
시간이 지나고 관사들이 주실로 전부 모였다. 석목이 들어서자 제풍을 포함한 사람들은 불안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석목은 사람들을 쭉 훑어보더니 마지막으로 제풍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풍, 오늘 취환을 그들에게 보내지 않은 건 아주 잘한 일이다.”
제풍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저희는 전부 부주님의 시종입니다. 부주님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동부 사람을 내보내지 못합니다.”
“아주 좋아!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누구도 이 동부 영지의 시종들을 데려갈 수 없다. 제풍, 내일부터 조용한 방 하나를 취환이 수련할 수 있도록 내어주고, 동부의 잡다한 일은 그녀에게 시키지 마라.”
석목이 명을 내렸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부주님.”
시종과 관사들은 참지 못하고 머리를 들어 취환을 바라보았다. 담이 좀 큰 사람들은 석목과 취환을 번갈아보며 무언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석목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명을 내린 후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뒷산의 석실로 다시 들어갔다.
가는 도중 공중에서 작은 그림자가 날아와서 익숙하게 석목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래도 돌아올 줄은 아는구나.”
석목이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석두, 나 억울해! 아까 그 사람들, 얼마나 무섭게 생겼는데! 제풍과 아랫사람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너를 찾으러 갔었어. 근데 네가 먼저 돌아왔지 뭐야.”
채아가 낮은 소리로 재잘댔다.
“됐으니까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너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어차피 싸워도 질 게 뻔한데.”
석목은 소리 없이 웃으며 말했다.
“석두, 그런데 수련에서 큰 성과를 얻은 것 같다!”
채아가 말했다.
“뭐, 아무래도 환경이 좋으니 수련 효과가 좋은거야.”
석목이 말했다.
“그럼 이제 임무를 받으러 가는 거야? 나 심심해 죽는 줄 알았어. 이제 나가서 놀고 싶어!”
채아가 말했다.
“우선 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 시간이 더 지나야 해. 그러니 잘 지키고 있어. 그 무리가 또 찾아오면 나에게 알려줘.”
“그래!”
석목은 석실의 문을 열며 채아에게 당부했다. 채아는 재미없다는 듯 답하고 날개를 펼치더니 허공으로 날아갔다.
석목은 석실 문을 닫고 방석에 앉아서 작은 망치를 꺼내들고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는 며칠 뒤 용촉 대사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상급 영기를 받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의식 속에 숨겨져 있는 번천곤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동성성에 도착한 후에는 시험과 수련으로 바빠서 그 물건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지가 꽤 오래되었다.
석목은 제련 망치를 저장반지에 넣었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두 눈을 감고 의식 속으로 들어갔다.
의식의 세계에서 작은 곤봉이 한 개 나타났다. 그것은 여전히 조용하게 공중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 곤봉 위에서는 촘촘한 부문이 옅은 금빛을 발산하고 있었고, 반짝이는 빛이 매우 부드러웠다.
석목은 이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그는 동성성으로 오는 삼 년 동안 의식 속에서 이 신물을 수도 없이 관찰하고 연구했다. 그래서 이 신물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의 연결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푸른 옷의 늙은 원숭이가 말하는 숨겨진 공법의 비결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의식 속에서 석목의 원신은 작은 금색 그림자로 변했다. 그리고 가운데 세워져 있는 작은 곤봉을 향해 걸어갔다.
금색의 작은 그림자는 곤봉을 위아래로 한참을 훑어보았다. 이어서 그의 두 손이 바퀴로 변했다.
순식간에 신식이 얇은 실로 변하더니 손바닥 사이에서 뻗어나가 그 금색 그림자를 층층이 감싸버렸다.
실은 점점 촘촘하게 둘러싸였고, 금색 곤봉의 표면에서 주술 무늬가 밝아지더니 규칙적으로 빛이 점멸했다. 이어 곤봉의 주변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석목의 원신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다만 눈살을 조금 찌푸리는 게 실망하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눈앞의 이 광경은 지난 삼 년 동안 수도 없이 봐온 것이었고, 그래서 그는 알고 있었다. 잠시 후면 이 곤봉 위의 금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흔들림도 멈출 것이며, 모든 것이 평온해지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석목은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의식의 세계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변이 발생했다.
곤봉 위의 빛은 예상과 다르게 사라지지 않았고, 시계 방향으로 빠르게 돌고 있었다. 그리고 곤봉의 중심에 눈 깜박할 사이에 금색의 소용돌이 한 개가 형성되었다.
석목의 원신은 이를 보자 깜짝 놀랐고,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금색의 소용돌이는 점점 빠르게 돌았고, 그 중심에서 회색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것은 회색의 안개처럼 천천히 그 속에서 흘러나와서 원신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그는 하늘이 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곧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의식을 잃어버렸다.
* * *
석목은 다시 깨어난 뒤에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회색 안개가 자욱한 공간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전부 일렁이는 회색 안개뿐이었다.
회색 안개는 그렇게 짙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야를 가렸을 뿐만 아니라 신식마저 가두어버린 것 같았다. 신식을 멀리 내보낼 수가 없었다.
“여기가 번천곤 속인가?”
석목은 바닥에서 일어서며 자신의 두 손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가 막막해하고 있을 때, 앞쪽에서 소리가 울렸다.
석목은 머리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회색 안개가 빠르게 들끓더니 굳어서 안개의 벽이 되어버렸다.
그 안개의 벽에 미양성역에서 통용되는 문자가 서서히 나타났다.
깜짝 놀란 석목은 그 벽을 훑어보고는 문득 깨달았다.
그가 지금 있는 곳은 정말로 번천곤의 한 공간이었다. 반듯하게 나열되어있는 눈앞의 문자들은 전부 백원왕이 비법으로 남겨둔 것인데, 누군가와의 약속을 기록해둔 것이었다.
그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백원왕이 번천곤 안에 남겨놓은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구전현공 두 번째 단계의 법결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안개의 벽에 있는 문자에는 금제가 걸려 있었다.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그것이 촉발될 것이었다.
석목은 삼 년 동안 금제를 풀지 못했다.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마도 그가 구전현공의 첫 단계 수련을 끝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금제의 내용을 본 석목은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문자의 내용에 의하면, 이 금제된 공간은 사람에 의해 촉발되고, 그 사람이 약속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바로 사라진다고 했다.
하지만 금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그에 의해 다시 한 번 촉발되었다. 이 부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백원왕과 약속했던 사람이 어째서 이곳까지 들어오지 못했던 것일까?
석목은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백원 왕이 그 사람을 위해 남겨둔 약속인데, 어떻게 이곳에 들어오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 일은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찌되었든 이곳의 금제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석목에게 좋은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는 두 번째 단계의 공법 비결을 얻을 수 있었다.
시험만 통과하면 구전현공의 새로운 공법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석목은 가슴이 벅차올랐고, 두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때 눈앞에 있는 안개의 벽이 갑자기 출렁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안개의 벽은 순식간에 다시 안개로 변했고, 그 위에 적혀 있던 문자도 사라져버렸다.
출렁이는 안개들은 뒤쪽에 더 두껍게 쌓인 안개의 바다 속으로 흘러갔고, 안개 바다가 다시 소용돌이쳤다.
여러 갈래로 굳어진 회색 안개가 그 속에서 파도를 일으켰고, 잠시 후 석목의 주위에는 회색 통로가 몇 개 생겼다.
주위를 훑어본 석목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을 중심으로 주위의 회색 안개 속에 여덟 갈래의 통로가 생겨 있었다. 양쪽에는 높은 회색 벽이 쌓여 있었고, 동굴 모양이었는데 안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이 통로들은 입구가 전부 똑같이 생긴 것이 참으로 기이했다.
석목은 그중 한 곳을 신식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신식은 한 장 정도 들어가다가 말랑말랑한 벽에 부딪쳤다. 손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들어갈 수도 없는 것 같았다.
석목은 그 광경을 보자 쓴웃음이 나왔다. 시험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긴 백원왕이 남긴 시험이 쉬울 리가 없었다.
석목의 눈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영목신통이 순식간에 발동됐다. 그는 여덟 갈래의 입구를 다시 오랫동안 자세히 관찰해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런 차이점을 찾아내지 못한 석목은 어쩔 수 없이 그중 한 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통로 속에는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다만 양쪽의 안개벽보다는 많이 옅었고, 손으로 거두어보니 눈앞에서 양쪽으로 흩어졌다.
순간 석목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고, 손을 뻗어서 왼쪽의 안개벽을 만졌다. 벽을 뚫을 수 있을지 시도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에 닿은 벽은 차갑기만 할뿐 실체와 다른 게 없었다. 뚫어버리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보아하니 이 벽들은 안개가 굳어져서 만들어졌지만, 어떤 금제의 보호를 받고 있는 듯했다.
석목은 그것을 힘으로 부수려는 시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백원왕이 남긴 금제라면 고작 구전현공 첫 단계를 완성한 사람이 힘으로 무너뜨릴만한 것은 아닐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잘못하면 오히려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크게 실망할 것도 없었다. 석목은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안개 통로를 백 장 정도 걷자 드디어 조금 넓은 구역이 나타났고, 안개도 다소 옅어진 걸 보니 출구 같았다.
석목은 눈썹을 튕기더니 발걸음을 재촉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통로를 벗어나서 그 구역에 도착한 그는 잠시 멍해졌다. 또 다시 여덟 개의 회색 통로가 나타난 것이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처음 나왔던 여덟 개의 통로와 똑같이 생겼고, 영목신통으로 관찰한 세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똑같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건가?’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석목은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서 다른 통로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 다른 통로를 선택했다.
시간이 지나고 석목은 그 통로의 출구에 다다랐다. 주위를 돌아보니 예상대로 첫 번째 통로에서의 상황과 똑같았다.
석목은 다시 또 원점으로 돌아가서 세 번째 통로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