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약속을 지키다
용촉 대사는 곁눈질로 석목을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눈을 돌려 제련 망치를 보았다.
“그럼 이 신물을 준 사람이 영기를 교환할 수 있는 기한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런 말은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석목이 놀란 듯 답했다.
“내가 만든 물건을 먼지가 쌓이도록 방치해둘 리가 없잖아? 냉선과 약속을 할 때 삼십 년이라는 기한을 정해두었고, 사십 년을 기다렸다. 그 영기는 몇 년 전 다른 사람에게 팔고 없다.”
용촉 대사의 말에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대사님께서는 어떠한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기한에 대해 말씀하시다니, 대사님께서는 장사를 이렇게 하십니까?”
그러자 용촉 대사가 말했다.
“성급하게 굴지 마라. 그 영기는 기한이 다 되도록 가져가지 않았지만, 네가 신물을 가져왔으니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두 가지 선택지를 줄 테니 네가 결정하도록 해라.”
“무슨 선택입니까?”
석목이 물었다.
“첫 번째, 몇 년만 기다리면 널 위해서 영기를 만들어주지. 네가 수련한 공법 특성에 적합하게 만드는 상급 영기다. 내 연기 실력은 그 당시보다 훨씬 뛰어나니, 필요한 재료는 따로 가져올 필요 없다. 하지만 만드는 비용은 어느 정도 지불해야 한다.”
“다른 선택은요?”
용촉 대사의 말에 석목이 물었다.
“두 번째, 내 영기 창고에는 아직 좋은 주인을 만나지 못한 영기들이 있다.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가져가라.”
용촉 대사가 답했다.
“아무 것이나 선택해도 되는 겁니까?”
석목이 다시 물었다.
“너무 좋아하지는 말고 끝까지 들어라. 내 영기 창고에는 하급부터 최상급까지 각종 등급의 영기가 섞여 있다. 게다가 내가 설치해둔 금제 밖에서 골라야 하고, 영기의 재질이나 성질, 등급은 전혀 알 수 없을 거다. 그러니 온전히 운에 맡기는 선택이지. 그리고 그 영기 중 절반 이상은 하급이다. 이제 선택해라.”
용촉 대사가 말했다.
“두 번째를 선택하겠습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용촉 대사는 깜짝 놀랐다. 석목이 이렇게 빨리 선택할 줄도 몰랐거니와, 단호하게 두 번째를 선택할 거라고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왜 안전하게 첫 번째를 선택하지 않는 거냐? 몇 년도 기다릴 수 없다는 거냐?”
용촉 대사가 석목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좋은 영기가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오래 기다릴 수 없습니다.”
석목이 대답했다. 물론 급한 건 맞았지만, 이는 석목이 두 번째를 선택한 이유 중 아주 작은 부분이었다.
그가 첫 번째를 선택하지 않은 건, 그의 수련 공법이 워낙 특수해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촉 대사가 그의 공법 특성에 따라 영기를 만들게 할 수는 없었다.
또 두 번째를 선택한 이유가 또 있었다. 석목은 자신의 영목신통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고, 금제 밖에서도 품질이 좋은 영기를 고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결정했으니 번복은 없다. 날 따라와라.”
용촉 대사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잠시 후, 그는 평범해 보이는 벽 앞에 섰다. 그리고 손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며 벽을 살짝 밀었다.
쿵!
눈앞의 돌벽이 내려앉더니 반 장 크기의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따라와.”
용촉 대사가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고, 석목은 그를 바짝 따르며 통로로 들어갔다.
통로는 깊이가 십여 장쯤 되어 보였고, 어느 석실로 연결되어 있었다.
석실로 들어간 석목은 그곳의 천장에 주먹만 한 야명주(夜明珠)가 일곱 개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은 북두칠성처럼 나열되어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는데, 이 방의 유일한 빛이었다.
방 안에는 흑단으로 만들어진 진열대가 있었고, 그 위에 기이하고 괴상한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내 창고의 영기들은 전부 이곳에 있으니 마음대로 고르도록. 단, 기회는 한 번뿐이다.”
용촉 대사는 창고의 구석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석목은 머리를 끄덕이며 바로 신식을 사용했다. 진열대 위에는 무형의 금제가 쳐져 있어서 신식이 그곳을 뚫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석목은 의외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에서 금빛을 반짝이며 진열대 위의 영기들을 훑어보았다.
석목은 원래부터 긴 칼을 즐겨 사용해왔기에, 왼쪽 위에 있는 오초장도(烏鞘長刀) 한 자루를 먼저 바라보았다.
그 장도의 도신은 너비는 손가락 세 개 정도였지만, 칼날은 상당히 길었다. 전체는 검은색이었고 칼날에서는 매서운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석목은 영목신통으로도 그 칼의 영력이나 재질, 등급을 알아낼 수 없었다. 단지 보통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흔한 칼 같았다.
석목은 그 옆에 있는 공 모양의 영기를 보았지만, 역시 등급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여러 번 시도한 후 석목은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영목신통은 이곳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너무 교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선택은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눈에서 금빛을 거둔 석목은 진열대의 왼쪽에서부터 영기들을 한 개씩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가 영기를 반 시진 동안이나 보는 동안, 용촉 대사는 재촉하지 않고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가끔 턱을 만지기만 할 뿐이었다.
석목은 이 방에 있는 영기들을 전부 한 번씩 훑어보았다. 하지만 영기의 등급이나 속성을 알 수 없어서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번 고민한 끝에 그는 처음에 눈에 들어온 오초장도를 선택하기로 했다. 어찌됐든 그는 칼을 사용하는 게 익숙했고, 이 칼의 등급이 높지 않다고 해도 손에 잘 잡힐 것 같았다.
그런데 석목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진열대 옆에 검은 곤봉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 곤봉은 진열대와 색깔과 길이가 똑같아서 지금껏 눈에 띄지 않았다. 또 석목이 진열대 위의 영기들에 정신이 팔려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석목은 곤봉의 앞으로 다가가서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 곤봉은 길이가 한 장 정도였고, 팔뚝만 한 굵기에 전체가 검은색이었다. 표면은 매끄럽지 않고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마치 망치로 백 번 정도 두드린 것 같았다.
곤봉의 양쪽 끝에는 각각 색이 짙은 부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부문이 촘촘하게 그려져 있었다.
검은 곤봉을 자세히 훑어보는 동안 석목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늘에서 떨어진 번천곤이 자신의 손에 쥐여지던 장면이 갑자기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그는 손을 들어 곤봉을 가리키며 몸을 돌려 용촉 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말을 하기도 전에 용촉 대사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짜증이 섞인 것을 발견했다.
“이 영기를 가지겠습니다.”
그러자 용촉 대사는 눈썹을 여러 번 치켜뜨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깊게 내뱉으며 말했다.
“알겠다. 네놈은 운이 좋군.”
그가 손에서 붉은 빛을 뿜어내더니 두 손가락을 붙여 천장에 걸려 있는 야명주를 가리켰다. 그러자 일곱 개의 야명주 중 한 개가 어두워졌다.
용촉 대사는 한 손으로 그 검은 곤봉을 석목에게 날려 보냈다.
석목은 곤봉을 받아서 바로 신식을 사용해서 살펴보고, 몇 번 휘둘러보았다. 그 순간 기쁨이 어렸던 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상급 영기로군요. 다만 너무 가벼워서 사용하기에 약간 불편할 것 같습니다.”
석목이 아쉬운 듯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손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석목은 하마터면 곤봉을 떨어뜨릴 뻔했다.
석목은 진심으로 놀라서 머리를 들어 용촉 대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사님, 이 영기는…….”
석목이 입을 열었다.
“흥, 네놈이 물건을 몰라보는구나. 감히 내가 만든 여의빈철곤(如意镔铁棍)을 가볍다고 하다니.”
용촉 대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대사님, 가르쳐주십시오.”
석목이 손을 모으며 말했다. 그가 공손한 태도를 보이자 용촉 대사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이 곤봉을 여의라고 이름을 지은 건 안에 있는 경중법칙(轻重法则)의 힘 때문이다. 쓰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크기를 변경할 수 있고 무게도 조절할 수 있지. 내가 제련한 영기 중 등급이 가장 높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 중 하나다. 적당한 주인을 찾지 못해 계속 남겨두었는데, 엉뚱한 녀석에게 좋은 일만 시켰군.”
그 검은 곤봉을 바라보는 용촉 대사의 눈빛은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것처럼 온화했다.
“대사님, 감사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곤봉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거친 표면을 매만지며 말했다.
“됐다. 등급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물건을 선택한 것부터가 너와 인연이 있다는 거다.”
용촉 대사가 말했다.
“이 여의빈철곤은 크기나 무게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한계도 있나요?”
석목이 물었다.
“크게는 천장까지, 작게는 이쑤시개만큼 변할 수 있다. 또 무게는 가볍게는 깃털처럼, 그리고 무거움은 십만 근까지 도달할 수 있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정도가 이 보물의 한계는 아닌 것 같다. 나도 빈철곤이 네 손에서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궁금하구나.”
용촉 대사가 말했다.
그의 말을 듣고 석목은 크게 기뻐하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대사님, 제가 여기에서 시험을 해봐도 되겠습니까?”
“그 영기는 이미 네 것이다. 뭘 하든 네가 결정하면 된다.”
용촉 대사가 대답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등 뒤의 운철흑도와 곤봉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합친 뒤 한 손에 힘을 주었고, 빈철곤을 향해 휘둘렀다.
탕!
석목의 손에 있는 운철흑도가 진동했다. 그러나 검은 곤봉에는 조금의 흔적도 없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이건…… 운성현철(陨星玄铁)?”
순간 용촉 대사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석목의 손에 들린 운철흑도를 바라보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운성현철이요?”
석목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리 줘봐.”
용촉 대사가 말했다. 운철흑도를 보는 그의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석목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에게 흑도를 건네주었다.
용촉 대사는 흑도를 가로로 들고 가볍게 두들겨보더니, 코로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리고 맥박을 짚듯 손가락으로 칼날을 눌러보기도 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석목에게 운철흑도를 돌려주며 말했다.
“너는 정말 운이 좋은 놈이구나. 이 운성현철은 구하기 힘들기로 소문난 물건인데, 이렇게 큰 걸 만들어서 들고 다니다니. 이 철은 신성한 별이 소멸한 후 생기는 것이다. 먼지가 된 상태로 별의 난류 안에 숨기 때문에 거두기가 어렵지만, 무기로 만들 경우 그 안에 천지 영기가 저장되어 위력이 커지지.”
용촉 대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네가 원한다면 내가 시간을 들여서 이 흑도를 여의빈철곤 안에 정련해줄 수 있다.”
“정말입니까?”
석목이 기뻐하며 물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믿을 사람으로 보이냐? 이 흑도를 정련하는 데는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겠다. 다만 이 흑도의 반 정도만 빈철곤 안에 정련하면 충분하다. 많아도 의미가 없어. 남은 운성현철은 나에게 주는 건 어떠냐?”
용촉 대사가 물었다.
“그럼 얼마나 걸립니까?”
석목이 고민하다가 물었다.
“정련만 하고 단조(锻造)를 하는 것은 아니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한 달이면 충분해.”
용촉 대사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대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지요.”
석목은 그 말을 듣더니 머리를 연신 끄덕였다.
“그럼 약속했다.”
용촉 대사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석목은 약속대로 망설이지 않고 운철흑도, 곤봉과 여의빈철곤을 용촉 대사에게 넘겼다.
“정련에는 한 달이 걸리니 그 뒤에 와서 가져가면 된다. 다음에 올 때도 이 신물을 들고 날 찾아라.”
용촉 대사는 앞서 받았던 작은 제련 망치를 석목에게 넘기며 말했다.
석목은 제련 망치를 받고 인사를 한 뒤, 더 지체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