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얼음 거미
석목의 눈이 굳어지더니 등 뒤의 날개를 몇 번 퍼덕였다. 그는 하늘 위로 날아올라서 허공에 한줄기의 곡선을 그리며 얼음벽을 공격했다.
하얀 화염으로 둘러싸인 그의 왼손 주먹이 패인 곳을 향해 날아갔다.
우르릉!
동굴이 흔들리며 천정에 붙어 있던 고드름이 석목 주위로 우수수 떨어져 사라졌다.
하얀 화염으로 둘러싸인 석목의 왼쪽 팔이 박혔지만, 얼음벽은 여전히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쩍!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고, 석목의 눈이 반짝였다,
얼음 구멍에 아이 팔뚝만 한 균열이 생기더니 얼음벽 안쪽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균열은 마치 살아 있는 물체처럼 안쪽을 향해 깊게 파고 들어갈 뿐, 주위로 퍼지지는 않았다.
석목은 흠칫 놀랐다.
수많은 하얀빛이 균열을 타고 안쪽으로 들어갔고, 만 년이라는 시간 동안 형성되어 깊이가 십 장이나 되는 두꺼운 얼음에 작은 통로를 만들었다.
얼음벽의 중심을 향하고 있는 균열을 바라보던 석목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어 그의 왼손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하얀 옥병(玉瓶) 한 개가 나타났다.
그는 옥병의 입구를 균열에 가져다 댔고, 그의 손에서 다시 한 번 하얀 화염이 크게 번졌다.
그때 얼음벽 중심에서 차가운 음의 기운 몇 가닥이 무엇인가에 끌리듯 틈 사이에서 빠져나왔고, 그것들은 순식간에 하얀 옥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 한 가닥의 기운이 들어가자 석목은 다급하게 병의 입구를 꽉 막았다.
이것은 그가 특별히 구매한, 음의 기운을 담는 양정(阳晶) 옥병이었다. 차가운 음의 힘을 최대한 가둘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목은 그 병을 손에 쥐자마자 참을 수 없는 한기에 몸서리쳤다.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신식을 사용해서 병 속을 바라보았다. 신식이 닿는 순간 극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신식을 통해 의식의 세계로 들어가 보니, 마치 차가운 얼음이 가득 차 있는 듯 의식의 흐름이 순간 무뎌진 것 같았다.
그때 의식 속에 있는 작은 사람의 몸에서 금빛이 크게 번졌다. 이어 그가 왼팔에서 하얀빛을 밝히자 무형의 물결들이 줄줄이 주위로 퍼지며 극한의 기운을 밀어냈고, 무뎌진 의식도 점차 회복되었다.
석목은 한숨을 내뱉더니 계속해서 병 속을 관찰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어렸던 기쁜 기색이 사라졌다.
그가 수집한 이 몇 가닥의 기운은 여러 기운이 잡다하게 섞여 있었다. 간신히 기준에 부합하긴 했지만, 음의 기운 중에서도 하급이라 그럭저럭 쓸 만한 정도였다.
이 정도 기운으로 구전현공 두 번째 단계를 수련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석목은 잠시 실망했지만 이내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무것도 건지지 못한 것보다는 잘된 일이었다.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며 이곳까지 왔는데 그나마 빈손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최근 시중에서 크게 오른 가격을 감안하면 나름 나쁘지 않은 값을 받을 수 있을 듯했다.
석목은 마음을 가다듬고, 나머지 일은 청란성지로 돌아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등 뒤로 날개를 펼치고 왔던 방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등 뒤에서 하늘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백 장 높이의 얼음벽이 전부 무너져 있었고, 그 안쪽에서 더 큰 공간이 나타났다.
그 공간에서는 강한 영력의 파동이 흘러나왔다.
“아니, 혹시…….”
석목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큰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리더니 땅 위의 얼음들이 깨지면서 주위로 튕겼다.
석목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대로 날아오는 얼음에 맞았다. 상처를 입을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놀라서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왜 이러지?”
석목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순간 한줄기의 하얀 빛이 얼음벽에서 석목의 가슴 쪽으로 뻗어 나왔다. 그 속도는 마치 번개처럼 빨랐다.
석목은 흠칫 놀라서 등 뒤의 날개를 펴고 옆으로 피했다.
퍽!
한줄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석목은 빠르게 반응했음에도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했고, 하얀빛은 어깨를 스쳤다.
그 뒤에도 빛의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고, 계속해서 날아가더니 굉음과 함께 한쪽 벽에 박혔다.
벽의 절반을 뚫고 들어간 그것을 자세히 보니 뾰족한 고드름이었다. 그 고드름은 소름 돋는 한기를 주위로 뿜어내고 있었다.
석목의 어깨에 난 상처 부위에 하얀 서리가 깔리더니 주변으로 빠르게 퍼졌고,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석목의 표정이 심각해졌고, 그는 포효하며 온몸에서 금빛을 반짝였다.
그러자 피부 표면에 금색 비늘이 나타나면서 순식간에 토템 변신이 이루어졌다. 그의 어깨에서 양의 기운이 생기면서 서리가 계속 퍼지는 것을 막아냈다.
석목이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땅이 흔들렸고 하늘을 찢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음벽에서 하얀빛이 수없이 뻗어 나오더니 소나기처럼 석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 하얀빛들은 전부 고드름이었는데, 엄청난 한기를 풍기고 있었다.
석목은 두 눈을 반짝이며 여의곤을 몸 앞에서 빠르게 휘둘렀다. 그의 몸 앞으로 가로세로의 촘촘한 곤봉 그림자가 형성되었다.
소나기가 퍼붓는 소리와 함께 빼곡하게 날아오던 하얀 빛들이 주변으로 튕기거나 부서졌고, 허공에 얼음 가루가 휘날렸다.
석목이 시전한 것은 바로 직전에 수련한 통천십팔곤의 전팔식 중 하나인 광용난무(狂龍亂舞)였다.
여의빈철곤은 역시 명실상부 상급 영기였다. 가짜 영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하얀 고드름의 속도와 힘의 강도는 엄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의곤은 전부 막아냈다. 일반 법기나 등급이 조금 낮은 영기 였다면 막는다 해도 영성을 크게 잃었을 것이다.
석목은 마지막 한 개의 고드름을 깨부수었고, 그 뒤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흔들었다. 여의곤의 검은 빛이 크게 번졌다.
검은 빛 속에서 여의곤이 순식간에 커져 십 장 크기의 거대한 곤봉으로 변했다. 그것은 석목이 팔을 흔들 때마다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채꼴 그림자를 만들었고, 하얀빛이 뿜어져 나온 곳을 강하게 내리쳤다.
쾅!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수많은 얼음 조각이 주위로 튕겼고, 땅 위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쓱!
그때 하얀 그림자 하나가 흩날리는 얼음 조각들 사이에 섞여서 날아왔다. 그것은 반짝이더니 석목의 왼편에서 멈추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것을 바라본 석목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가 손을 흔들자 여의곤이 다시 한 장 크기로 작아졌다. 석목은 그것을 자신의 몸 앞에서 가로로 들었다.
하얀 그림자의 정체는 몇 장 정도 되는 커다란 얼음 거미였다. 몸통 전체는 옥처럼 투명해서 마치 얼음 조각상 같았는데, 주변의 환경과 워낙 비슷해서 주의하지 않으면 절대 찾아낼 수 없었다.
거미의 몸에 달린 튼실한 다리 여덟 개는 땅 위에서 미끄러지며 움직이고 있었고, 입을 벌리자 흉악한 이빨이 드러났다. 머리 꼭대기에서는 두 눈이 극도로 차가운 빛을 뿜고 있었다.
거미의 주변에는 얼음 안개가 옅게 감돌고 있었는데, 강력하고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천위의 요수!”
석목은 실눈을 뜨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 이 정도로 강한 요수가 숨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얼음 거미를 죽일 것인지 이대로 도망갈 것인지를 두고 잠시 고민했다.
석목은 이곳에서 음의 기운을 채집하려 한 것일 뿐, 요수를 사냥하러 온 것이 아니었고, 이곳의 환경은 그에게 너무 불리했다. 반면 얼음 거미에게는 실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얼음 거미는 석목이 대책을 세울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굵고 튼실한 여덟 개의 다리가 튕겨 오르더니 몸통이 한줄기의 하얀 빛으로 변신해 석목을 향해 날아왔다.
석목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반짝였고, 그의 손에 들린 여의곤이 검은빛을 크게 뿜어내며 얼음 거미의 머리를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거미가 입을 크게 벌리더니 석목을 향해 희끗한 액체를 토해냈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여의곤을 거두고 등 뒤로 날개를 활짝 펼쳐 옆으로 피했다.
쓱!
하얀 액체가 그의 몸을 스친 뒤 다시 주위로 퍼졌다. 크고 투명한 거미줄이 만들어져서 동굴 입구 쪽을 막아버렸다.
석목은 그걸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땅에 내려섰다. 얼음 거미도 그의 앞에 내려서서 석목을 바라보았지만, 바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거미의 두 눈이 반짝이더니 그의 입에서 하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이어 안개는 주위로 퍼지더니 순식간에 동굴 전체를 덮었다.
‘큰일이다!’
석목은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이 거미줄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강하게 파고들었고, 몸을 보호하는 진기도 이 정도로 차가운 기운은 막지 못했다.
석목은 고함을 지르며 몸에서 붉은빛을 뿜어내자 뜨거운 기운이 몸속에서부터 뿜어져 나와서 하얀 안개를 막았다.
석목은 몸을 일으켜서 허공으로 날아올라 얼음 거미를 덮쳤다. 그리고 여의곤을 순식간에 몇 배로 키워서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며 거미를 내리쳤다.
‘창응개정!’
여의곤이 닿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얼음 거미를 덮쳤고, 허공에서 물결이 일렁였다.
그런데 얼음 거미가 공격을 더는 피할 수 없게 된 순간, 기이한 장면이 나타났다.
거미가 몸통에서 하얀빛을 반짝이더니 물속으로 들어가듯 얼음 속으로 숨어버린 것이다.
쿵!
여의곤이 얼음 거미가 있던 곳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단단한 얼음으로 둘러싸인 동굴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동굴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얼음 덩어리와 고드름이 위쪽에서부터 떨어졌다.
얼음 거미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눈 깜박할 사이에 도망쳐버렸다.
“빙둔술(冰遁术)!”
석목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는 등 뒤로 날개를 펼치더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동굴에서 차가운 안개가 소용돌이치더니 이내 사라졌다. 주위는 조용했고, 얼음 거미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석목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채아처럼 물체를 꿰뚫어보는 특수한 능력은 없었다. 게다가 신식으로도 땅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없는 만큼, 얼음 거미를 찾아낼 방도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석목은 뒤쪽의 입구를 막은 거미줄을 향해 날아갔다.
하얀 거미줄은 굵기는 손가락 정도였고, 투명하고 단단해보였다.
석목이 빛을 뿜어내자 금전검이 솟아올랐고, 그는 손으로 검결을 부리며 빠르게 휘둘렀다.
금전검은 반짝이며 몇 배로 커졌고, 한줄기의 금빛으로 변해서 거미줄 위를 강하게 내리쳤다.
펑!
거미줄은 잘렸다가 다시 끈끈하게 붙어 해체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시 질기군!”
석목은 손을 흔들어서 금전검을 거두었고, 몸에서 빛을 뿜어내며 붉은 원숭이 법상을 만들었다.
법상이 입을 크게 벌려 화염을 뿜어내자 혼원진화가 하얀 거미줄을 활활 태웠다.
석목은 지계 중기로 경지가 상승한 후 불 속성의 감응력이 더욱 향상됐고, 혼원진화의 위력도 많이 올라갔다. 이에 하얀 거미줄은 곧 녹을 것 같았다.
석목이 기뻐하며 다시 움직이려 한 순간, 그의 옆에서 얼음빛이 반짝였다. 이어 굵고 뾰족한 얼음 기둥이 날아와서 석목의 두 발을 공격했다.
그러나 석목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뒤로 몸을 날리며 공격을 피했다.
그의 손에서 여의곤이 검은빛을 크게 뿜어내더니 왼쪽 땅을 향해 날아갔다.
펑!
여의곤은 쉽게 땅을 뚫었고,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그 안에서 흘러나왔다.
석목의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스쳤고, 그의 몸이 번쩍이더니 여의곤 옆으로 다가가서 곤봉을 잡았다. 이어 여의곤이 순식간에 커졌다.
석목이 곤봉을 잡은 채 손에 힘을 주자 주변의 얼음이 전부 깨져버리면서 강하게 허공으로 튕겼다.
이어서 하얀 그림자가 허공에 나타났는데 방금 전의 얼음 거미였다. 거미는 여의곤에 급습을 당해서 배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고 푸른 피를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