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화. 음의 기운
석목은 침묵을 지키며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 사제만 괜찮다면 먼저 백 개의 최상급 영석을 주고, 성지에 돌아간 후 나머지를 더 쳐드리겠습니다.”
요용은 석목이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이었고, 그 말을 들은 여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팔지 않겠습니다.”
석목이 차갑게 답했다.
그는 요용이 하는 말의 숨은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음의 기운을 팔지 않으면 앞으로 청산성지에서 조용히 지낼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가 음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한, 하급 음의 기운 물건만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상급 음의 기운 물건은 석목이 구전현공을 수련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고, 어렵게 구해낸 물건인 만큼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가격이 오르기 전 음의 기운의 가격은 가장 낮은 등급이라 해도 최상급 영석 천 개에 달했다. 가격이 폭등한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성지에 돌아가면 영석을 주겠다는 말은 그냥 내놓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석목의 말을 듣자마자 원래 못생긴 요용의 얼굴이 더욱 흥해졌고, 그의 두 눈에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요용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경이 먼저 소리를 질렀다.
“석목, 이렇게 분수를 모르다니. 팔 필요 없으니 목숨이나 내놓아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경의 몸에서 초록빛이 반짝였다. 이어 안개가 그의 발에서부터 피어올라서 빠르게 석목을 향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석목은 초록 안개에 포위되었다.
퍽!
초록 안개가 몸에 닿기 전, 석목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등 뒤에서 붉은빛을 크게 뿜어내며 날개를 펼쳤다.
그가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자 땅 위의 모래알이 휘날리며 초록 안개가 밀려났고, 석목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서 하늘 위로 날아갔다.
“요 사형, 빨리 막아야 합니다. 저 놈은 엄청나게 빨라서 도망가 버리면 곤란합니다.”
여경은 그 모습을 보더니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요용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허공에 있는 석목의 머리 위가 어두워졌다. 석목이 위를 보자 흑백이 섞인 짙은 안개가 나타났다. 이어서 안개의 가운데 부분이 갈라졌다.
석목은 깜짝 놀라 안개를 바라보았다. 갈라진 틈에서 커다란 얼굴이 나타났는데, 절반은 칠흑 같고 나머지 절반은 하얗게 질린 게 요용의 얼굴과 똑같았다.
석목은 다급하게 날개를 펼쳐 안개를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콰쾅!
커다란 얼굴이 갑자기 입을 크게 벌리자 그 속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펴졌다.
하늘이 빛에 의해 순식간에 밝아지면서, 흑백의 천둥과 번개가 거대한 얼굴에서 다닥다닥 솟구쳤고, 그것들은 석목이 있는 곳을 향해 내리꽂혔다.
번개의 반은 하얀색이고 반은 검은색이었는데, 굵기는 팔뚝만해서 기괴하고 강한 기운을 발산했다.
석목은 놀랐으나 당황하지 않고 두 눈에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등 뒤의 날개를 계속 움직이며 번개를 이리저리 피하는 한편, 몸에 금빛 비늘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번개의 수가 워낙 많았고, 날아오는 간격도 촘촘했다. 석목은 온 힘을 다해 피했지만 곧 연이은 공격을 당하고 말았다.
하얀 번개가 몸에 닿자 마치 주먹으로 맞은 듯 비늘이 터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차가운 음의 기운을 품은 검은 번개는 몸속으로 파고들어가서 석목의 의식 세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여경은 기회를 틈타 두 손으로 바퀴를 만들었고, 입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자 땅 위에 깔려 있던 초록 안개가 갑자기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고, 그것은 흑백 번개의 주위로 원형의 막을 만들어냈다.
곧 석목은 위에서 내리치는 번개와 밖으로 둘러싼 안개에 포위되어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순간 석목은 입을 벌려서 이쑤시개만 한 검은 곤봉을 뱉어냈다. 이어 곤봉은 그의 손 안에서 순식간에 길어졌다.
그는 몸을 돌려서 번개 두 갈래를 피하자마자 두 손으로 곤봉을 휘둘렀다.
휙! 휙!
검은 곤봉 주변으로 그림자가 촘촘히 나타냈고, 이어 하얀 기류가 모여들어 소용돌이치더니 회오리바람으로 변했고, 그 속에서 용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순간 석목은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손에 여의빈철곤을 들고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잠용등연(潜龍腾淵)!”
통천십팔곤의 전팔식 중 하나였다.
쿵!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석목의 주변이 강하게 흔들렸다.
석목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기류가 하얀 용으로 변해서 난폭한 기세로 사방팔방을 향해 공격했고, 흑백 번개는 난폭한 용에 의해 터져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자 하늘에 있던 거대한 얼굴의 두 눈에서 빛이 번쩍였고, 얼굴은 입을 더 크게 벌리더니 수많은 번개를 뿜어냈다.
다시 한 번 번개들이 떨어지자 석목은 등 뒤의 날개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곤봉을 들고 땅에 있는 요용의 본체를 공격하려 했다.
석목은 큰 소리를 지르며 두 손에 든 곤봉을 위아래로 미친 듯이 흔들었고, 하얀 물결이 주변에서 흩어지면서 몸 전체가 하얀 교룡처럼 빠르게 아래로 날아갔다.
이어 하늘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흑백 번개는 계속해서 석목을 공격했고, 그것들의 속도는 석목보다 빨랐고, 곧 공격이 명중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석목은 일부러 피하지 않고 몸으로 공격을 받았다. 순식간에 흑백 번개의 반 이상이 석목의 몸에 떨어졌다.
석목은 하얀 기류로 번개를 최대한 막아냈지만, 피하지 못한 일부가 몸의 비늘 위에 떨어졌다. 금세 비늘의 반 정도가 찢어지면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도 석목은 아래를 향해 공격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여경의 얼굴색이 변했다. 도망갈 곳이 없는 석목이 이런 무모한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요 사형, 조심해요!”
여경은 석목이 이번에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기에, 그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초록색 독 안개를 멀리 퍼지게 했다. 그러면서 그는 몸속의 진기를 전부 소진해버렸기에, 석목이 날아오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얼굴의 두 눈에도 놀란 기색이 어려 있었다.
잠시 뒤 거대한 얼굴이 안개와 함께 눈 깜박할 사이에 흩어졌고, 허공에서 떨어지던 번개도 멈추었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던 요용도 다시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망할 놈! 죽여 버리겠다!”
요용은 깃발을 한 개 꺼내들더니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순간 석목의 눈에서 금빛이 반짝였고, 그는 급강하하던 몸을 재빨리 멈췄다.
이어 그의 왼팔에서 하얀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등 뒤의 날개도 더욱 커졌고, 활활 타오르는 붉은 화염 속에 하얀 화염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그는 두 날개를 힘차게 펄럭이며 몸을 공처럼 움츠린 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변을 둘러싼 초록 안개에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는 한줄기 빛으로 변해 멀리 도망가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게다가 하얀 화염의 힘이 더해진 날개가 내는 속도는 너무 빨랐기에, 요용과 여경은 석목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제는 다시 쫓아간다 해도 너무 늦어버렸다.
* * *
보름 뒤, 청산성지로 돌아간 석목은 시종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혼자 산속의 동부로 들어갔다.
그가 동부에 도착한 순간, 어디 있었는지 채아가 날아와서 그의 어깨에 내려앉으며 재잘댔다.
“석두, 어디 갔다 이제 온 거야? 나 혼자 여기 내버려두고!”
“일이 있어서 나갔다 왔어. 너무 급하게 나가느라 너를 데려가지 못한 거야.”
석목은 웃으며 동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문을 닫는 순간 석목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마른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석두, 너 다쳤어?”
채아가 놀라서 물었다.
“치명상은 아니니까 괜찮아.”
석목이 손을 흔들었다. 그는 여경과 요용 두 사람과 싸우면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치료도 하지 않고 보름이 걸려서 급하게 돌아온 것이었다. 그 바람에 상처 부위가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채아, 나는 문을 닫고 요양을 좀 해야 할 것 같아. 아무도 못 들어오게 잘 지키고 있어.”
석목은 채아에게 당부의 말을 몇 마디 하고는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상처를 치료하는 단약을 삼켰다. 그리고 묵묵히 약의 기운을 정화했다.
석목의 상처는 사흘이 지나서야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통류방의 천보각을 찾아갔다.
“석두, 이곳에는 왜 왔어? 음의 기운을 사러 온 거야?”
이번에는 죽어도 따라오겠다고 한 채아가 석목의 어깨 위에 앉아서 물었다.
“아니, 물건을 팔러 왔어.”
석목은 그렇게 말하며 천보각 안으로 들어갔다.
천보각은 사람들로 붐비는 게 장사가 꽤 잘되는 것 같았다. 바쁘게 움직이던 뚱뚱한 관사가 바로 석목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사람을 불러 가게를 지키게 한 뒤 석목에게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석 도우, 꽤 오랜만이군요. 혹시…….”
석목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실례했습니다. 자리를 옮겨서 말씀을 나누시지요.”
뚱뚱한 관사는 바로 지난번의 편청으로 석목을 안내했다.
관사는 채아를 한 번 바라보더니 석목에게 눈짓을 했다. 채아가 듣는 곳에서 이야기를 해도 되겠느냐는 뜻이었다.
“괜찮아요. 제 영총입니다.”
석목이 대답하자 뚱뚱한 관사는 머리를 끄덕이더니 웃으며 말했다.
“석 도우, 눈빛을 보아하니 이번 동굴 탐색에서 괜찮은 수확이 있었나봅니다.”
“천보각에서 주신 정보 덕분에 음의 기운을 찾아내긴 했습니다.”
석목은 그렇게 말하며 하얀 옥병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뚱뚱한 관사는 옥병을 들고 한참을 보더니 안색이 조금 바뀌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석 도우, 이것은 왜 꺼내셨나요?”
“보시기에 이 음의 기운의 가치가 어느 정도 될 것 같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석 도우, 이 음의 기운을 팔려고 하시는 겁니까? 전에는 이 물건이 필요하다고……. 아하, 이번에 정말 큰 수확이 있었나보군요.”
뚱뚱한 관사는 의아한 듯 말하다가 이내 웃으며 마무리했다.
석목의 얼굴에도 옅은 웃음이 어렸고, 그는 그 말을 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뚱뚱한 관사는 병 속의 음의 기운을 자세히 살피더니 얼굴이 어두워졌다.
“석 도우, 우리도 꽤 알고 지냈으니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져오신 음의 기운은 비록 수는 많지만 매우 난잡해서, 하급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아무리 지금 가격이 폭등했다지만, 이 정도 품질이라면 최상급 영석 구백 개 정도밖에 쳐줄 수 없습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한 것과 비슷한 가격이었다. 확실히 뚱뚱한 관사는 정직한 상인이었다.
관사는 석목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 얼굴에 웃음을 띠며 일어섰다.
“좋습니다. 석 도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영석을 가져오겠습니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저에게 다른 물건이 있는데 함께 팔려고 합니다.”
석목이 손을 흔들자 탁자 위에 이런저런 물건이 나타났다. 모두 얼음 거미의 몸에서 가져온 재료였다.
관사는 탁자 위의 물건들을 살피더니 이내 안색이 밝아졌다.
“이 재료들……. 이렇게 짙은 영기를 풍기는 것을 보니 지계 요수는 아닌 것 같고, 천위 요수의 몸에서 뽑아낸 것이군요?”
뚱뚱한 관사가 중얼거렸다.
“맞습니다. 우연치 않게 큰 상처를 입은 얼음 거미를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건 얼음 거미의 요단입니다.”
석목은 하얀 옥합(玉盒)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채아는 깜짝 놀란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았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