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화. 신선이 되어 떠돌다
석목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온통 회색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곤봉 속의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또 한 번 백원왕의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어떤 시련이 닥칠지 몰랐지만, 석목은 이미 결심한 상태였고, 어떤 고난을 마주하더라도 반드시 성공해서 나가야만 했다.
석목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큰 위기가 닥칠 거야.’
주변의 회색 안개가 격하게 소용돌이쳤고, 그는 그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이미 회색 안개에 묻혀버렸다.
눈앞이 희미해지더니 머리카락이 허공을 짚은 채 위아래로 소용돌이쳤다. 그런 미묘한 느낌은 꽤 오랜 시간 지속되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잠깐 동안인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순간 석목의 눈앞이 또렷해졌고,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새로운 세계에 진입해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하얀 구름이 둥둥 떠다녔고, 짙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산맥이 나타났다.
산맥에는 기이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올라와 있었고, 수백 갈래의 하얀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수십 개의 무지개가 피어나서 칠색의 다리가 폭포를 가로질러 산봉우리까지 이어졌다.
석목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산봉우리 위에는 영초들이 자라 있었고 선지가 곳곳에 깔려 있었으며, 하늘에는 수많은 학이 줄지어 다녔다. 숲에서는 원숭이와 오색 빛을 띠는 사슴들이 곳곳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희귀한 짐승들이 마음껏 소리 지르는 모습이 마치 안개가 자욱한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석목은 의식적으로 발을 들어보았다. 그러자 허공에서 하얀 구름 한 송이가 날아와 그의 발밑에 닿았다.
석목은 멈칫하더니 구름 위로 올라갔고, 그의 몸이 순식간에 가벼워지며 하늘 위로 날아갔다.
그는 하얀 구름을 타고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귓가에는 잔잔한 바람이 스쳤고, 땅 위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석목은 한동안 그 풍경에 심취해 있었다. 마음이 이렇게 가벼웠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그때 하늘에서 종을 치는 소리가 울렸고, 소리는 대나무 사이사이에 섞여서 들려왔다. 석목은 그 소리를 듣자 마음이 편안해져 소리가 울리는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는 수많은 구름층을 뚫고 커다란 구름 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종소리는 그 속에서 울려 퍼졌다.
건물들은 전부 옅은 금색 막에 덮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복잡한 부문이 번쩍이고 있었다. 장엄한 기운을 풍기는 것을 보니 엄청난 보호 법진 같았다.
석목이 가까이 날아가서 보니 그 건물 사이에는 한 장 정도 굵기에 높이가 백 장이나 되는, 백옥으로 만든 용 기둥이 두 개 세워져 있었다.
그가 머리를 들자 용 기둥 사이에 비취색의 거대한 편액이 가로로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에는 금빛 찬란한 글씨로 남례(南澧)라고 새겨져 있었다.
석목이 그걸 보며 의아해하고 있을 때, 건물 사이에서 몸집이 가냘프고 우아한 소녀 여럿이 그를 향해 훨훨 날아왔다. 그녀들은 전부 오색의 비단옷을 두르고 어깨를 살짝 드리운 채 선녀처럼 예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내려온 소녀들은 석목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구성진 목소리가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다.
“상선(上仙), 다들 오래 기다렸습니다. 따라오세요.”
석목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소녀는 몸을 돌려 안내하기 시작했다.
석목은 소녀들을 따라 용 기둥 사이에 있는 동굴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옥으로 만들어진 구불구불한 긴 복도와 다리를 지나 어느 궁전 앞에 도착했다.
그가 걸어온 길 주위는 온통 비취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고, 귓가에서는 신선의 소리 같은 음악이 울려 퍼졌다.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부 전설 속의 구천선자(九天仙子)였다. 이 모든 아름다운 풍경을 지나쳐 오는 동안 석목은 그저 감탄만 할 뿐이었다.
궁전 안에는 한 장 정도 넓이의 장방형 저수지가 있었고, 그 중앙의 비취 길에는 온통 연꽃이 둥둥 떠다녔다. 저수지 양쪽에는 열 쌍이 넘는 자색 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는 경장옥액(*瓊漿玉液, 신선이 마시는 감미로운 음료)이 넘치는 자색 주전자와 신선한 과일과 음식이 담긴 금으로 된 쟁반이 놓여 있었다.
낮은 탁자 뒤에는 다양한 복장을 한 십여 명의 남자가 앉아서 잔을 부딪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궁전 정중앙의 궁벽에는 사람 머리만 한 비취 구슬이 박혀 있었고, 그 밑으로 높이가 한 장쯤 되는 금색 병풍이 접힌 채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아홉 마리의 용과 봉황이 춤추고 있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병풍 앞은 궁전의 상석이었는데, 그 위에는 금색 용과 봉황이 조각된 탁자가 있었다.
그 탁자 뒤에는 얼굴에 자색빛이 가득하고 세 갈래 하얀 수염이 있는, 팔괘 도복을 입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선인의 풍채와 도사의 골격을 지닌 노인 같았다.
석목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사람들은 전부 일어서서 그를 형제라고 칭했고, 그를 가운데의 한 탁자로 안내했다.
석목은 의아했지만 그들의 온화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뭐라 말을 하지 못했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악기도 보이지 않는 허공에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이어 십여 명의 절세미인이 허공에서 내려와서 가느다란 허리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두 명의 선자가 석목 곁으로 다가왔고, 그들은 술을 한잔 따라주고 음식을 더 담아주었다.
석목은 쟁반 위의 과일을 음미하며 선자들의 춤을 구경했다. 마치 하늘을 나는 느낌이었는데, 눈앞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점차 그 분위기에 심취되어 벗어날 수 없었다.
시간이 조금씩 흘렀다.
석목은 유유히 탁자 위의 술을 들어 마시려고 했고, 그 순간 잔속의 술에 비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술 위에 비친 것은 온통 회색 안개뿐이었고, 조각이나 보석은 어디에도 없었다.
석목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금세 취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술잔을 바닥에 던지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떤 자인가? 무슨 이유로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거지?”
석목의 고함에 궁전이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이 석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선, 왜 갑자기 화를 내십니까? 무례를 범하지 말고 우선 앉아계시지요.”
여러 선자가 그를 둘러싸자 향기가 밀려왔고, 그녀들은 석목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속삭이듯 말했다.
“얼른 앉으세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이 맛있는 과일과 술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화내지 마세요.”
또 한 명의 선인이 와서 권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자 석목은 다시 정신이 몽롱해졌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자락을 뒤로 휘날리며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밀쳐냈다.
“권하는 술은 마시지 않고 벌주를 마시려 하다니!”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던 팔괘 도복의 노인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손바닥으로 석목을 내리치려 했다.
허공에서 금빛 찬란한 손바닥 허영이 나타났고, 그것은 엄청난 기류를 뿜어내며 석목을 향해 내려왔다.
그러자 손바닥의 허영이 지나간 곳의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심지어 선자와 선인들 까지 희미해지며 사라져버렸다.
마치 세상 만물이 사라지고 손바닥만 남은 것 같았다. 심지어 석목의 눈에는 손바닥 사이의 손금마저 뚜렷하게 보였다.
석목은 낮게 소리를 지르며 두 팔을 들었다. 그리고 두 손에서 각각 하얀 빛과 검은빛을 내뿜으며 온 힘을 다해 손바닥을 막아냈다.
하지만 석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이 밀려왔고, 그 손바닥 앞에서 그는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무력감도 잠시, 그는 몸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호흡도 힘들어진 것 같았다.
“아!”
몸속의 피가 들끓으며 석목은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주변의 모든 것이 흩어지면서 회색빛 세계로 돌아왔다.
“방금 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환각인가?”
석목은 큰 숨을 몰아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땅을 짚고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정신이 완벽하게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선경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이 생생했다. 자칫하면 거기에 심취한 채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다.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아마 깨어나고 싶어도 깨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석목이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자 주변의 회색 안개가 다시 한 번 들끓으며 흩어졌다.
주변의 환경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석목은 이번에는 황량한 대지 위에 놓여 있었다. 주변에서 황사가 휘날렸고, 땅에 생긴 커다란 틈 속에서는 붉은 용암이 끓고 있었다.
콰쾅!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천지로 퍼졌고, 법력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소리가 수많은 번개가 찢어지듯 귓가를 울렸다.
석목은 주변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거대한 노란 행성 위에 있었다. 그 주변에서는 수많은 원숭이 요족이 허공에 떠 있는 금빛의 거대한 배와 싸우고 있었다.
원숭이 진영의 가장 앞에는 커다란 금색 갑옷을 입은 거대한 원숭이가 서 있었다. 지난번 석목이 보았던 머리 셋에 팔 여섯 개를 가진 바로 그 원숭이였다.
석목은 눈앞의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그가 남해성을 벗어났을 때 꿈에서 본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곳에 다시 오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먼 곳에서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색 갑옷의 원숭이가 주먹을 휘두르자 미처 피하지 못한 금색 배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배는 그대로 터지면서 찬란한 금빛을 뿜어냈고, 갑옷을 입은 수많은 병사가 그 위에서 떨어졌다.
금색 갑옷의 원숭이가 한 손을 휘두르자 표면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고, 병사들은 그 빛에 의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가루로 부서졌다.
먼 곳에서 북소리가 울리더니 서너 개의 거대한 배가 나타났고, 그 속에서 금빛 기둥이 뿜어져 나와서 금색 갑옷의 원숭이를 공격했다.
강한 기세의 금빛 기둥들은 원숭이가 두른 금색 갑옷에 닿자 빛을 내며 사라졌고, 갑옷의 표면에는 옅은 흔적만 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주변에 있던 원숭이들은 그리 운이 좋지 않았다. 금빛 기둥이 떨어질 때마다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색 갑옷의 원숭이가 격노하여 머리를 쳐들고 괴성을 지르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감지한 듯 뒤를 돌아봤고, 수많은 원숭이를 지나 석목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석목의 표정이 굳었다. 체온이 급격하게 올라가는 게 마치 화염 속에 서 있는 것 같았으며, 말을 하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때 떨어진 가운데 머리가 갑자기 입을 벌렸다.
석목은 온몸을 달구던 열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그 머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금색 갑옷을 입은 원숭이의 몸이 희미해졌고, 이어 주위의 소리와 피비린내 나는 전투의 광경도 점차 희미해졌다.
석목은 크게 놀랐지만, 몸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어 공간 전체에서 눈부신 빛이 터졌다가 다시 사라졌고, 석목은 다시 칠흑같이 검은 공간에 남아 있었다.
어두움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마치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떨어진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둠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석목이 주변을 보자 가까운 곳에 상처투성이의 어린 하얀 원숭이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물론 어리다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작은 원숭이 일 뿐이었다. 그 몸집은 석목의 두 배는 되어보였다.
원숭이의 몸에 생긴 상처들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몸의 하얀 털도 이미 피로 붉게 물든 채였다.
석목은 원숭이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두 눈알이 뽑힌 채 피가 철철 흐르는 눈구멍만 덩그러니 뚫려 있어서 무섭고 기이했다.
“죽여! 죽여! 죽여!”
“천정(天庭)의 모든 선자를 죽이고 현공 보장을 가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