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423화 (423/916)

423화. 붉게 물든 평원

어린 하얀 원숭이는 석목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같은 말만 내뱉고 있었다. 그것은 깊은 원망으로 가득한 말이었다.

“죽여! 죽여! 죽여!”

“천정의 모든 선자를 죽이고 현공 보장을 가지자!”

석목은 원숭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평정심을 되찾았다.

“천정? 모든 선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 단어들에 대해 짐작되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는 주변을 다시 훑어보았지만 여전히 어두움만 있을 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석목은 조심스럽게 하얀 원숭이를 떠나 걷기 시작했다. 기괴하기 그지없는 이곳의 상황 파악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하얀 원숭이는 비록 큰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석목보다 훨씬 위였다. 게다가 몸에서 무서운 살기를 풍기고 있어서 두렵게 느껴졌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무형의 힘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의 몸을 감쌌다.

석목의 눈앞이 희미해지면서 몸이 가벼워졌다. 잠시 후 그는 다시 하얀 원숭이 앞에 있었다. 방금 전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 것이다.

그는 안색이 굳어져서 다시 어린 하얀 원숭이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하얀 원숭이는 여전히 똑같은 말을 반복할 뿐 석목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제야 석목은 한숨을 내뱉으며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는 더 천천히, 매우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하지만 열 발자국쯤 걸어가자 무형의 힘이 다시 한 번 나타났다.

석목은 낮게 소리를 지르면서 몸에서 붉은빛을 뿜어내어 그 힘을 막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힘은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처럼 가볍게 삼켜졌다.

눈앞이 희미해지면서 그는 다시 한 번 하얀 원숭이의 옆으로 돌아왔다.

“왜 이러지?”

석목은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지만 그의 성격상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양한 방향으로 시도해보았고, 밀려오는 힘에 저항하거나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수백 번 해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

그는 눈앞의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그는 어린 하얀 원숭이를 바라보다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봐, 너는 누구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러나 어린 하얀 원숭이는 석목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고, 여전히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아? 여기는 어디고, 너는 왜 이곳에 있는 거야?”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더 가까이 다가가서 큰 소리로 물었다.

하얀 원숭이는 석목의 말에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눈만 먼 게 아니고 귀도 들리지 않나?’

석목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하얀 원숭이의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안색이 확 변했다.

“너…….”

그는 놀라서 입을 크게 벌렸다. 어린 하얀 원숭이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백원왕과 매우 흡사했다.

석목은 꿈에서 본 것을 떠올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백원왕이십니까?”

그러나 어린 하얀 원숭이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석목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슨 대책을 생각하는 듯했다.

한참 뒤 석목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큰 걸음으로 어린 하얀 원숭이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서 그의 몸에 가져다 댔다.

그러나 그의 손은 하얀 원숭이의 몸을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마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이건…… 환영!”

석목은 깜짝 놀랐다.

지난번 남해성에서 전송되어 올 때 환상 속에서 만났던 백원왕의 혼의 조각이 떠올랐다.

‘이것도 백원왕이 남긴 혼의 기억일까?’

석목은 어린 하얀 원숭이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또 다시 여러 번 손을 대보았지만, 눈앞의 어린 하얀 원숭이는 여전히 환영 같은 존재로 누워 있었다.

다만 이 환영은 실존하는 물체처럼 기운의 파동을 뿜고 있었고, 진짜와 별 차이가 없어서 석목 정도의 경지에 오른 사람도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눈앞의 이 원숭이는 그때 만난 백원왕의 혼의 조각과 달리 석목과 어떠한 소통도 할 수 없었다. 석목은 다시 몇 번이나 시도하고 심지어 공법도 펼쳐 보았지만, 하얀 원숭이는 여전히 석목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시 칠흑같이 어두운 공간을 바라보았다.

환상 속에 들어와 있어서 시간개념이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계산해보니 칠팔 일은 머문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 어린 하얀 원숭이는 중요한 실마리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석목은 말없이 가부좌를 틀고 두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어린 하얀 원숭이가 질러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참이 지난 뒤, 석목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이곳을 벗어날 방법을 반드시 찾고 말겠어!”

그는 몸에서 붉은빛을 뿜어내며 등 뒤의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한줄기의 빛으로 변해 어디론가 날아갔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속도에 의지해서 이곳을 벗어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속도라면 십 장 정도는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갈 수 있었다. 다만 무형의 힘이 이번에도 여지없이 석목을 막았다.

눈앞이 희미해지더니 석목은 또다시 하얀 원숭이 옆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날개를 펼쳤다.

* * *

눈 깜박할 사이에 삼 개월이 지났다.

그동안 석목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곳을 벗어나려 시도했지만, 어떠한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도 하얀 원숭이와 십오 장 거리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거리만 벗어나면 기이하고 신비한 무형의 힘이 나타나서 그를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석목은 수많은 방법을 시도했고 온 힘을 다해 법진을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그 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삼 개월이 지나자 석목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이런 망할!”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초조한 표정으로 큰소리로 외쳤다.

“죽여! 죽여! 죽여!”

“천정의 모든 선자를 죽이고 현공 보장을 가지자!”

어린 하얀 원숭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공간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석목을 놀라게 했던 그 목소리는 이제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저렇게 두 마디만 끝도 없이 반복하면 힘들지도 않나? 내가 다 지칠 지경이군…….”

석목은 하얀 원숭이를 바라보더니 답답한 듯 짜증스럽게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무엇인가 생각난 것 같았다.

석목은 몸을 일으켜서 어린 하얀 원숭이 옆에 다가갔고, 큰 절을 세 번 올린 뒤 한쪽 손바닥을 세우고 말했다.

“백원왕이여, 제자 석목은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당신의 뜻을 받들어 수련이 끝나면 반드시 유언을 들어드리겠습니다. 천정의 모든 선자를 전부 죽여 버리겠습니다.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석목의 말이 끝나자 하얀 원숭이는 하던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서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소리에서는 마치 오랜 시간 짓눌려 있던 돌덩이를 내려놓는 것 같은 후련함이 느껴졌다.

석목은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는 자신이 드디어 정답을 찾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하얀 원숭이는 크게 세 번 웃더니 몸에서 핏빛 화염을 뿜어냈다. 그것은 한줄기 핏빛이 되어 석목의 미간에 스며들어 그의 의식 세계로 들어갔다.

핏빛의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석목은 깜짝 놀랐다.

핏빛은 석목의 의식 세계에 스며들자 순식간에 두 개로 변했다.

한줄기는 석목의 몸을 통해 빠른 속도로 번천곤에 흡수됐고, 이어 번천곤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수많은 부문이 나타났다.

“이건…… 혈계부문…….”

청란성지에 들어온 후, 석목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부적 술사의 신분으로 부문을 어느 정도 익혔다. 그래서 이런 핏빛 부문에 대해 대략 알고 있었는데, 이는 고대에서 전해지는 일종의 혈계비술이었다.

수많은 핏빛 부문이 빠르게 번천곤 속으로 들어갔고, 석목은 번천곤과의 연결이 더욱 단단해진 것을 느끼며 기뻐했다.

다른 한줄기의 핏빛은 그의 의식 세계에 머무르다가 순식간에 터지더니 수많은 문자로 변했다. 하지만 이는 고대의 문자로 이루어진 어려운 공법 구결이었고, 나타났다가 잠깐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석목은 그것을 몇 번 훑어보다가 놀라서 급한 마음에 신식으로 관찰하였다.

그때 석목 주변의 검은 공간이 격렬한 파동을 일으키며 터져버렸다.

석목은 강력한 빛 때문에 한참 동안이나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석목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는 이미 환상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동부로 돌아와 있었다.

* * *

같은 시각, 사령계.

어두컴컴한 허공에 핏빛 달 다섯 개가 걸려 있었다. 그 달은 차갑고 붉은빛을 뿜어내며 하늘을 찌르는 듯한 높은 산봉우리를 붉게 물들였다.

산봉우리 위에 은색 갑옷을 입은 날씬한 사람이 산바람을 맞으며 꼿꼿이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바람이 휘날리면서 허공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산바람이 스치자 그 사람의 검은 머리가 휘날리며 아름다운 얼굴이 나타났다. 미간 사이에는 연꽃 모양의 검은색 부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눈부신 빛을 뿜어내어 요염한 기색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녀는 바로 연나였다.

연나의 눈빛은 어둠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산 중턱에 겹겹이 쌓인 안개를 뚫고 산봉우리 아래의 평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에 의해 핏빛으로 물든 평원에서는 백골 두 구가 소리 없이 싸우고 있었다.

연나 근처에 있는 대군의 앞쪽에는 각각 검고 큰 해골 한 구, 하얗고 작은 해골 한 구가 서 있었다.

검은 해골은 검은 갑옷으로 가슴과 사지를 감싼 형태였고, 드러난 몸과 머리에서는 수정 같은 빛을 뿜고 있었다. 연나가 만년시기로 부활시킨 무야였다.

그는 검은 뼈로 만든 장도를 들고 대군 속을 여기저기 헤집고 다녔다. 그리고 다가오는 시체들을 순식간에 부숴버렸다.

반투명한 하얀 해골은 투명한 빛을 뿜고 있었는데, 바로 비령 이었다. 공격을 받고 시체마저 사라졌던 그도 연나의 손에 의해 부활했다.

비령은 두 손에 수정 뼈 칼을 들고 이곳저곳에서 번쩍이며 나타났다. 그의 몸이 움직일 때마다 사령생물의 머리가 터져나갔고, 그 안에 있는 영혼의 화염마저 흩어져버렸다.

이들 외에도 열 몇 구의 수정 해골과 금색 해골이 앞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부 강력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는데, 지계 중기 이하는 하나도 없었다.

해골들의 옆에는 백 마리나 되는 뼈 짐승이 있었다. 대부분은 호랑이나 표범 등 길짐승이었고, 거대한 코끼리와 새도 있었다. 그들 역시 전부 지계 초기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뒤에는 수만 구의 백골 사병이 있었고, 그들은 손에 각자 뼈 창을 든 채 발맞추어 걸어가며 계속 공격했다. 그 위력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이 대군과 싸우는 상대편은 부패한 시체들로 이루어진 사령대군이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은 키가 십여 장 되는 푸른 피부의 강시였다. 강시의 두 눈은 구리방울 같았고, 밖으로 뒤집혀진 입가로 하얗고 뾰족한 이빨이 드러나 있었다.

강시는 손에 검은 기운이 감돌고 있는 낭아봉(狼牙棒)을 들고 있었다. 그것을 흔들자 십여 구의 해골 사병이 부서져버렸다.

강시의 뒤에는 수많은 시체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거대한 짐승의 사체도 섞여 있었다. 시체들은 전부 몸이 썩어 있었고, 찢어진 상처에서는 비린내 나는 푸른 액체가 계속 흘러나왔다.

양쪽이 본격적으로 부딪치자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수많은 해골 사병이 부스러기로 변했고, 수많은 강시들도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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