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424화 (424/916)

424화. 멸선곤법

연나는 아득한 산봉우리에 서서 산 밑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심장이 갑자기 요동쳤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장면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거기에는 화려한 궁전도 있었고 처참한 전쟁도 있었으며, 아름다운 미소와 흉악한 얼굴들도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의식 세계에 한줄기 핏빛 부문만 남겨졌다가 다시 사라졌다.

“아…….”

연나가 낮은 신음을 내며 한 손으로 가슴을 부둥켜 잡았다.

잠시 후, 그녀가 갑자기 머리를 들었다. 그녀는 분노가 들끓는 두 눈으로 이를 악물고 두 글자를 뱉어냈다.

“천……정!”

그 말을 내뱉은 후 연나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짓누를 수 없는 분노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솟아났다.

그녀는 갑자기 한 발을 앞으로 내딛더니 마치 암석처럼 아래쪽을 향해 몸을 던졌다.

쿵!

연나의 가냘픈 몸이 수백 장 높이의 산봉우리에서부터 땅 위로 떨어졌다.

땅 위에는 순식간에 한 장 정도 되는 둥근 웅덩이가 생겼고, 그 바람과 기운에 의해 주변에 있던 해골 사병들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한참 전투를 치르던 양쪽 대군은 놀란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때 웅덩이에서 은빛이 반짝이며 사람의 모습이 튀어나와서 망령 대군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검은 갑옷을 두른 무야와 반투명 해골 비령은 서로 한 차례 마주보더니 다시 그 은빛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서 영혼의 화염이 흔들렸다.

은빛 사람 형체는 강시 대군 쪽에 다가가더니 한줄기 은빛의 창으로 변했다. 그것은 순식간에 수많은 시체를 뚫고 지나갔고, 시체들의 몸에는 커다란 구멍이 한 개씩 생겼다.

강시 대군 쪽에서 한차례 소동이 일어났다. 곧이어 수많은 외뿔 소가 몸에서 노란빛을 뿜어내며 은빛을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은빛 형체는 전혀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방향을 돌려서 그대로 소떼를 공격했다.

펑! 펑!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허공에서 초록색 핏빛 비가 쏟아졌다. 이어 외뿔 소들의 뿔이 끊어져서 땅 위에 떨어졌다.

이어 달려오던 몇 마리 외뿔 소의 몸이 땅에 뒹굴었고, 소들의 이마에는 구멍이 크게 나 있었는데, 그 모습이 섬뜩했다.

소들이 무너지자 은빛 형체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손에 투명한 뼈 창을 들고 있는 연나가 나타났다.

그러자 세 마리의 백골과 교전을 하던 거대한 강시가 갑자기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연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

핏자국이 가득한 커다란 입에서 짙은 검은색 안개가 뿜어져 나왔고, 소용돌이를 치면서 연나를 공격했다.

검은 안개가 지나가는 곳마다 해골 사병들이 줄줄이 무너져서 뼛가루로 변해버렸다. 몸집이 거대한 짐승들마저 순식간에 영혼의 화염이 터져나갔고, 시체가 부식되어 죽어버렸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연나의 아름다운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녀의 분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았다.

연나가 손에 든 뼈 창을 휘두르자 그 속에서 은빛이 나타나 그녀의 몸을 둘러쌌다. 그것은 마치 빛의 막처럼 안팎으로 공간을 분리했다.

검은 안개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빛의 막에 부딪혔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매우 얇은 빛의 막은 살짝 흔들렸을 뿐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흥!”

연나는 차갑게 내뱉으며 뼈 창을 들고 다시 한줄기의 빛으로 변했고, 순식간에 강시의 앞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강시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어서 그의 몸에서 짙은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고, 강시는 손에 든 낭아봉을 연나를 향해 휘둘렀다.

그 순간 연나가 더 강한 빛을 뿜어내더니 크기가 두 배쯤 커졌다. 그녀의 손에 들린 뼈 창이 눈부신 빛을 뿜으며 낭아봉과 강시의 몸을 뚫어버렸다.

강시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목에서 피를 뿜어냈고, 곧 머리 전체가 터지며 푸른 비가 되어 쏟아졌다.

강시의 거대한 몸이 허물어진 뒤 연나는 그대로 사령대군의 뒤쪽을 공격했다.

우두머리인 강시가 쓰러지자 수많은 사체가 앞 다투어 그녀를 둘러싸고 공격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무야가 검은빛을 뿜어내며 빠르게 연나에게 날아갔고, 비령도 몸에서 빛을 번쩍이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사령의 공격에도 연나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죽어!”

그녀는 고개를 들어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순간 몸에 두르고 있던 갑옷이 부풀어 오르더니 투명에 가까운 은빛이 번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은빛이 폭발하면서 그녀가 지니고 있던 기운도 흩어졌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이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그 위압감에 무야는 빠르게 날아가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등 뒤에서 물결이 일어나더니 비령의 모습도 서서히 나타났다.

은빛과 스치기만 해도 사체들은 눈 속의 영혼의 화염이 터져나갔고, 수많은 점으로 변하여 사라졌다.

하지만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사령들은 여전히 두려움 없이 돌격해왔다. 그들은 연나가 있는 곳을 향해 밀물처럼 끝도 없이 밀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나 주변에는 크기가 각각 다른 썩은 시체들이 작은 산처럼 쌓였다.

연나는 혐오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을 번쩍 들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은색 빛이 반짝이더니 땅을 향해 강하게 내리꽂혔다.

쿵!

은색 빛이 하늘로 날아올라 번개로 변했다가 다시 주변으로 흩어졌다. 촘촘하게 모여 있던 사체들이 은빛 번개의 공격에 부서지고 찢겨지며 여기저기 튕겨나갔다.

그러나 허공에 있는 연나가 두르고 있는 밝은 은색 갑옷에는 오물이 조금도 묻지 않았다.

붉은 달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쏟아지면서 예쁜 얼굴을 붉게 비추었다.

그녀가 시선을 아래로 돌려 사령대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수많은 해골 사병이 마치 어떤 지령이라도 받은 듯, 손에 든 병기를 휘두르며 얼마 남지 않은 강시들을 공격했다. 강시들은 눈 깜박할 사이에 전부 몰살당해버렸다.

연나는 허공에서 가볍게 숨을 몰아쉬었다. 처참한 도살이 끝나자 그녀의 가슴에서 들끓던 화가 점차 가라앉았다.

잠시 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연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분노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고 의아한 기색만 남아 있었다.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는 듯했지만, 그게 확실하지는 않았다.

연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하늘을 향했다. 그는 허공 깊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석실 안에서는 석목이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드디어 환상 속을 벗어난 그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지난번만큼 험악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마음 한구석이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석목이 눈을 감자 의식의 세계에서 번천곤이 천천히 돌고 있는 것이 느껴졌고,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드러났다.

석목은 이 예사롭지 않은 곤봉에 대해 좀처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곤봉과의 연계는 더 끈끈해졌지만, 그것이 과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참, 공법 구결!”

석목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진 문자들이 비로소 떠올랐다. 그는 다급하게 신식을 통해서 의식 세계에서 그것을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의식 세계의 한구석에서 작은 빛의 공을 발견한 것이다.

신혼지력이 닿자 빛의 공은 소리를 내며 터지더니 현묘한 글자들로 변했다.

그는 다시 글자를 훑어보았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작은 글자들은 구전현공 세 번째 단계의 구결이 확실했다.

그는 굶주린 사람처럼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세 번째 단계의 공법 구결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서 빠르게 읽혔다. 하지만 구결이 끝난 뒷부분에 작은 글씨로 무엇인가 더 쓰여 있었다.

석목은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그 내용은 공법이 아니라 어떤 정보 같았는데, 백원왕이 세상에 남겨 놓은 세 가지 보장이었다.

이 세 보장은 백원왕이 정성스럽게 설계하여 남겨놓은 것 같았다. 그것들을 이용해 ‘이기기 어려운 숙명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었다.

“이길 수 없는 숙명의 적?”

석목은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글을 계속 읽기 시작했다.

세 개 보장 중 한 개는 청란성지 두 번째 층의 어느 한 장소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각각 미양성역과 백원왕의 출신지인 어느 외곽 행성에 있었다.

석목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백원왕이 정성스럽게 남겨 좋은 보장이라면 평범하지 않은 물건일 게 틀림없었다.

그가 다시 글을 자세히 읽으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무언가 머리를 조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석목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했다.

머릿속에서 갑자기 수많은 금색 글자와 작은 사람이 나타나서 곤봉으로 다양한 공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이건…….”

통증은 잠시 뒤에 사라졌고, 석목은 그 글자와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는 일 각이 지나서야 작은 사람들이 어떤 곤법을 시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석목의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련의 길을 걸으면서 일평생 다양한 경지의 곤법을 백여 종이 넘게 익혔다. 그러나 신의 경지에 들어서면서 문득 깨닫게 된 게 있었고, 평생 익힌 곤법과 번천곤을 결합하여 멸선곤법(滅仙棍法) 일식을 만들어냈다. 이를 본 자는 나의 뜻을 이어받아 천정의 만선들을 죽이도록 하라. 절대로 그르치면 안 될 것이다.”

크고 아득한 그 목소리는 끊임없이 귀가에서 울리더니 한참 뒤에야 사라졌다.

“멸선곤법…….”

석목은 깜짝 놀라서 다시 멸선곤법에 대해 자세히 읽어 내려갔다. 이 곤법은 누군가의 목소리대로 일식 밖에 없었다. 다만 그 하나가 극도로 어려웠다.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통천십팔곤법을 완벽하게 익힌 후, 석목은 곤법에 대해 상당히 자세하게 연구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멸선곤법 일식은 전혀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오리무중이었다.

그는 멸선곤법의 내용을 백 번이 넘게 훑어보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어렵게 느껴졌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 신묘한 곤법에 점점 빠져들었다.

잠시 후, 석목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의 얼굴에 망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하하하…….”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고, 나중에는 아예 머리를 뒤로 젖히고 웃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웃음을 멈추었고, 그의 얼굴에는 흥분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아니야!”

석목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손가락으로 헤아리더니 눈썹을 치켜떴다. 그가 이 곤법을 깨우치는 동안 이미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멸선곤법은 너무 현묘해서 무인이라면 누구나 매혹될 만했다. 강한 정신력을 가진 석목마저 거기에 푹 빠져버렸다.

한 달간 고민한 끝에 석목은 이 곤법의 위력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는데, 번천곤법보다도 훨씬 뛰어난 곤법이었다.

석목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그리고 채아와 제풍에게 계속 폐관 수련할 것이니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고 전음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답을 하기도 전에 바로 연결을 끊은 뒤 눈을 감고 다시 멸선곤법에 빠져들었다.

동부 화영천 근처에서 놀고 있던 채아는 멍한 표정이 되더니, 석목이 있는 쪽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석두, 정말 너무해. 계속 폐관 수련만 하고 있고, 재미없어!”

채아는 원망이 섞인 말을 한마디 내뱉고는 날개를 펼쳐 동부 밖으로 날아갔다.

제풍은 영지의 한 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석목의 전음을 받고 기분이 좋아졌다.

석목은 이 동부에 온 뒤 대부분의 시간을 폐관 수련을 하면서 보냈고, 영지의 여러 가지 일은 채아와 그에게 일임했다.

채아는 가끔 이상한 제안을 하긴 했지만 동부의 자세한 일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석목이 나누어 가지라고 했던 영지의 수익에 대해서도 캐묻지 않았다. 그래서 제풍은 몰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다만 그도 사리분별은 하는 사람이라,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자신의 이득을 챙겼다. 또 석목이 분부한 일은 최선을 다해 처리했다.

물론 제풍도 겉보기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 석목의 속은 짐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약삭빠른 채아의 두 눈이 한 시도 쉬지 않고 지켜보고 있어서, 그도 과도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전음을 받고 잠시 침묵하던 제풍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석목의 분부를 보아하니 이번에는 수련하는데 꽤 오래 걸릴 것 같았기에, 영지의 일들을 미리 처리해놓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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