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백수진황(百兽震惶)
능풍이 웃으며 말했다.
“환마도에 들어가려면 우선 백년 제자 중 앞 순위의 세 명과 대결해서 이겨야 합니다. 다시 말해 현재 삼 위인 운예(云翳) 사형, 그리고 이 위의 나, 마지막으로 일 위인 용 사형을 꺾어야 합니다.”
석목은 그 말을 듣더니 안색이 변했다.
세 사람 중 용전야와 능풍의 실력은 지난 대결 때 이미 확인했다. 하지만 삼 위인 운예가 싸우는 것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삼 위 또한 실력이 절대 평범하지 않을 것이고, 호락호락한 인물도 아닐 게 틀림없었다. 이 세 사람을 연달아 무너뜨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환마도에 들어가려면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깊은 숨을 내뱉었다.
“허허, 석 사제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이미 결정을 내린 것 같네요. 제가 직접 성지로 인도한 정을 봐서 한 가지 주의를 더 드리겠습니다.”
능풍이 웃으며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능풍 사형.”
석목이 손을 모으며 말했다.
“대결에서도 보셨다시피 용 사형의 실력은 저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 부분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리고 운예 사형도 순위는 제 뒤에 있지만, 저보다 실력이 뛰어나면 뛰어났지 절대 뒤처지는 사람은 아닙니다.”
능풍의 말에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능풍의 영지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인사를 올린 뒤 그곳을 떠났다.
능풍은 떠나가는 석목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목은 능풍 사형이 거주하고 있는 대나무숲 앞에서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줄기 붉은빛으로 변하여 멀리 떠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의 동부에 도착했다.
“부주님, 인사드립니다!”
몇몇 시종이 정원을 지나가며 석목을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석목은 능풍이 말해준 것들을 속으로 생각하느라 대충 손을 흔들고 동부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몇 걸음 걷다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몸을 돌려 물었다.
“혹시 채아를 봤나?”
“채 어르신은 사람들을 데리고 영천에 갔습니다.”
시종 한 명이 답했다.
“알았다.”
석목은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동부 쪽으로 향했고, 바로 뒷산의 비밀 석실로 들어갔다.
비밀 석실의 문을 열자마자 그는 깜짝 놀랐다.
안에 있는 돌 의자에 궁중의상을 입은 한 여자가 자신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석목은 멈칫하며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석실 밖에서부터 이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신식으로 알아차렸어야 당연한데,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바로 눈앞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영력 파동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만약 이 여자가 등 뒤에서 몰래 석목을 습격한다면, 그는 전혀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등 뒤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경계 태세를 취하며 아무런 표정 없이 그녀를 훑어보았다.
여자는 소매가 넓은 흰색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끈을 살짝 조여서 영롱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넓은 치마폭은 달빛처럼 뒤로 드리워진 채였고 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는 검은 폭포처럼 어깨에 퍼져 있었다.
조용히 의자에 앉아 옅은 하얀색 빛을 두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선녀처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가 어깨를 살짝 구부리더니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조각 같은 얼굴에 매혹적인 눈, 아름다운 코와 살짝 벌어진 벚꽃 같은 입술까지, 그녀의 얼굴은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그녀의 미간에는 연꽃 모양의 검은 영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무런 흠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깨끗하고 투명한 피부와 어우러져서 오히려 요염한 분위기를 더했다.
석목은 멈칫하더니 확신할 수 없는 듯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연나……. 너야?”
이렇게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사람이 연나 말고 또 누구겠는가?
하지만 은색 갑옷을 벗은 그녀에게서는 선녀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석목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이나 미모에 취해 있었다.
“다 본 거야?”
연나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아, 미안해. 좀 놀라서 그랬어. 그런데 무슨 일로 왔어?”
석목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사실 일전에 약속했던 삼 년이라는 기한이 지난 후, 석목은 계속 그녀를 소환해보았다. 하지만 연나는 그것에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석목은 그녀가 갑자기 나타난 게 의아했다.
물론 그와 연나 사이의 계약은 아직 유효했고, 그들 사이의 신식도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석목은 그런 연결은 지금의 연나에 있어서는 그냥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연나는 석목을 한번 흘겨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일이 있으니까 찾아왔겠지.”
“무슨 일?”
“따라와.”
석목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연나는 마음대로 취선대를 꺼내더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펑!
취선대 표면의 금색 무늬가 빛을 발하더니 검은 소용돌이가 허공에 나타났고, 순식간에 석목과 연나를 그 속으로 삼켜버렸다.
석목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고, 곧 자신이 사령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이 명수호(冥水湖)의 제단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십여 년 전에 연나가 그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명수호의 면적이 기억보다 몇 배는 더 넓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작은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호숫가에는 검은 바위로 만든 수십 개의 궁전이 있었는데, 그 모양은 꽤나 투박했다.
궁전 주변에는 수많은 해골 사병이 촘촘하게 모여 있었다. 석목이 대략 가늠해보니 그 수가 십만 구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보아하니 몇 년간 연나도 쉬지 않고 수련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경지는 열 배 정도는 더 올라 있었다.
“연나, 나를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뭐야?”
석목이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물었다.
“너, 선인들을 전부 죽이고 싶어?”
연나가 물었다.
“너…….”
석목은 연나의 말에 깜짝 놀라서 반문하려다 바로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연나와 그는 계약을 맺은 관계였고, 두 사람 사이의 주도권은 점점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었다. 때문에 연나가 그 일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실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오리무중이야.”
석목이 사실대로 말했다.
“네가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봐.”
연나가 말했다.
석목은 잠깐 고민했지만 연나를 속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그 역시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또 연나는 다른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좋아. 사실은…….”
석목은 구전현공과 번천곤, 백원왕과 그 혈계에 관련된 일을 일일이 연나에게 말해주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어. 그러니까 확실한 건 나도 잘 몰라.”
석목이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지금 너의 실력으로 모든 선인을 죽이겠다는 건 망상이야. 선인 한 명만 있어도 그는 너를 손가락만으로 죽여 버릴 수 있어.”
연나가 말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번천곤의 금제 속에서 보았던 선경이 떠올랐다. 그리고 전혀 피할 수가 없었던 그 금색 손바닥도 생각났다.
“참, 그런데 천정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야? 선인은 정말 존재하는 거야?”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의 말을 듣자 연나의 얼굴에서 차가운 기색이 스쳤다.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듯한 살기가 그녀의 몸에서부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호숫가에 모여 있던 수만의 해골 대군이 그 살기를 느끼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순식간에 주변에서 뼈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나의 이런 살기는 한참 동안 지속되더니 천천히 사라졌다.
한참 후, 그녀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더니 말했다.
“천정이 대체 어떤 곳인지 나도 몰라. 다만 너와 나는 목적이 같고, 우리는 공동의 적이 있다는 것만 알아. 하지만 지금의 너는 너무 약해. 그러니 싸움터에서 실력을 계속 연마해야 해. 아니면 결국은 죽음뿐이야.”
“그 말은…….”
석목은 멈칫했다.
청전에 가서 선인들을 죽이는 것은 둘째 치고, 그는 우선 환마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부터 얻어야 했다.
청란방 일 층의 앞 순위 세 명은 누구 하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모두경지가 천위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일 층에서 오랫동안 기량을 갈고 닦아서 풍부한 실전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너는 네가 한 약속만 잘 기억해. 나머지 일은 내가 알아서 해줄게.”
연나가 말했다.
* * *
두 달이 지났다.
어느 황량한 산골짜기의 적갈색 바위 위, 석목이 긴 창처럼 꼿꼿이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키와 거의 같은 여의빈철곤을 손에 쥐고 있었다.
“영사출동(靈蛇出洞)!”
석목의 눈에 빛이 반짝이더니 큰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며 곤봉을 빠르게 휘둘렀다. 뱀 같은 하얀 회오리바람이 꿈틀거리며 앞으로 날아갔다.
“권조지반(倦鸟知返)!”
이어 석목은 다시 한 번 앞을 향해 손에 든 곤봉을 휘둘렀다. 허공에 빙글빙글 돌고 있는 곤봉의 그림자가 나타났고, 앞서 날려 보냈던 하얀 회오리바람을 다시 끌고 들어왔다.
“잠용등연(潜龍腾淵)!”
“원노반암(猿猱攀岩)!”
“창응개정(蒼鷹蓋頂)!”
“호시출합(虎兕出柙)!”
석목의 몸도 함께 돌면서 그의 손에 들린 검은 곤봉이 위아래로 춤을 췄다. 석목은 통천곤법의 팔식을 물 흐르듯 단번에 시전했다.
산골짜기의 모래와 돌이 회오리바람에 휘날렸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는 모습이 마치 종말의 날이 온 것 같았다.
하얀 기류와 갈색 모래가 섞여서 석목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은 단단한 벽인 것처럼 그와 외부를 단절시켰다.
“아아!”
모래알과 기류로 이루어진 벽 안에서 짐승의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벽 위로도 짐승의 허영이 불쑥불쑥 나타났는데, 마치 벽의 속박을 벗어나려 하는 것 같았다.
석목은 좌우로 돌리던 검은색 곤봉을 엄숙한 표정으로 거두어서 가로로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딛자 곤봉이 앞으로 날아갔다.
“허엉!”
짐승이 포효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호랑이의 울음소리처럼 위엄이 가득한 소리였다.
모래알과 기류가 섞인 벽이 흩어지면서 기류로 만들어진 맹수들이 벽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뛰쳐나갔다.
타다닥…….
혼잡하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서 맹수들이 홍수처럼 밀려나갔다. 수많은 짐승의 허영이 앞 다투어 산골짜기로 몰려갔다. 그 기세에 양쪽에 있던 산 위의 바위들이 줄줄이 굴러 떨어져서 산골짜기가 먼지로 자욱해졌다.
하늘을 울리는 소리가 한참동안이나 지속됐고, 맹수들이 산골짜기를 지나서 백 장이 넘는 거리를 달려간 뒤에야 소리가 잦아들었다.
석목은 산골짜기에 서서 맹수들에 의해 만들어진 수백 갈래의 깊은 골짜기를 보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대결에서 통천곤법 여러 개를 함께 사용하면서 이미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멸선곤법을 일식까지 익힌 뒤 만법귀일(*万法歸一,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간다)과 반박귀진(*返璞歸真, 처음의 순수함으로 돌아간다)이라는 무도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아직 완벽하게 통달하지는 못했지만, 현재 곤법에 대한 이해는 확실히 한층 더 올라가 있었다.
열심히 수련한 끝에 그는 드디어 통천곤법의 팔식을 일식으로 통일시켜 백수진화의 곤법을 깨우쳤고, 스스로 통천곤법의 십구식을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