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천지무급(天地无极)
이 년이 지난 어느 날.
명수호 위로 한줄기의 붉은빛과 은빛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뭐야?”
석목은 여의곤을 어깨에 얹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연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었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더니 호수를 향해 튕겼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한줄기 은빛이 뻗어 나와서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잠잠했던 명수호는 은빛이 들어가는 순간 흔들리기 시작했다.
물결이 호수의 중심에서 주위로 퍼지면서 커다란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쿵!
호수 안에서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굵은 회오리가 소용돌이치며 튕기더니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순간 석목의 표정이 굳어졌다. 회오리바람의 끝자락에는 키가 십 장 정도 되는 푸른 피부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손에 시퍼렇고 커다란 갈퀴를 들고 있었다.
남자의 목 위에는 말의 머리가 있었고, 우람한 상체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이 튀어나와 있었다. 또 두 팔에는 어류처럼 얇은 비늘이 촘촘하게 자라 있었다.
“어디서 온 놈이냐? 감히 나의 수련을 방해하다니!”
말머리 남자가 구리방울 같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며 화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
“오찰귀왕(乌刹鬼王). 실력은 나보다 못하지 않다.”
연나는 이렇게 한마디를 던지고는 몸을 돌려서 멀리 날아가 버렸다.
석목도 더 말하지 않고 여의빈철곤을 들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의 두 눈은 허공에 있는 오찰귀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어라!”
오찰귀왕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물의 회오리 꼭대기에서 내려와서 손에 든 갈퀴로 석목을 내리쳤다.
푸른빛이 폭포처럼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면서 그가 밟고 있던 물 회오리도 함께 덮쳐왔다. 그는 빛과 섞여서 한줄기의 푸른색과 붉은색이 섞인 용으로 변해 석목에게로 향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석목은 뒤로 물러나는 한편, 손에 든 검은 곤봉을 계속 흔들어서 하얀 회오리바람을 앞으로 내보냈다.
물 회오리는 파죽지세로 하얀 회오리를 부숴버렸다. 다만 그 속도는 조금 줄어드는 바람에 석목은 한쪽으로 피할 수 있었다. 그가 피하자 물 회오리는 눈부신 빛을 뿜으며 땅 위에서 부서졌다.
우르릉!
넓은 대기가 흔들리면서 백 장이나 되는 커다란 틈이 생겼다.
석목은 그 틈과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오찰귀왕은 이미 명수호 위에 착지했는데, 두 발이 무겁게 떨어지자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오찰귀왕이 서 있는 곳에서부터 주위로 물결이 퍼졌다. 물결이 스친 곳마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으며, 작은 돌들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석목은 눈썹을 찌푸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뛰어올랐다. 그의 발밑에서 하얀 구름이 나타나서 그의 몸을 받쳤다.
그 순간 석목의 몸에 금빛 비늘이 자라났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이미 지계의 정상까지 도달해 있었다.
“어딜 도망가!”
오찰귀왕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든 갈퀴를 높게 들었다. 갈퀴의 표면에서 빛이 크게 번지더니 그 위에 줄기줄기 무늬가 나타났다. 그의 뒤에 있는 명수호 위에도 원형의 부문이 떠올랐다.
원형 부문의 안에 있는 호숫물이 하늘 위로 올라가더니 핏빛의 거대한 말들로 변했다. 몇 천 마리는 되어 보이는 말떼가 석목을 향해 덮쳐왔다.
이 핏빛 말들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맹렬하게 석목을 향해 달려왔는데, 그 소리가 하늘을 찢는 듯했다.
석목은 평온한 얼굴로 손에 든 여의빈철곤을 미친 듯이 휘둘렀고, 그의 주변에서 하얀 기류가 넘치면서 맹수의 포효가 들려왔다.
핏빛 말들이 엄청난 기세로 몰려오자 석목은 한 발을 앞으로 딛었고, 검은 곤봉을 가로로 들고 앞쪽을 향해 강하게 밀어냈다.
후!
호숫가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얀 기류로 형성된 맹수들은 제멋대로 날뛰더니 맹수의 밀물이 되어 말들을 공격했다.
하늘을 뒤덮은 하얀 짐승과 명수호의 물로 만들어진 말들이 이리저리 부딪치고 뒤섞였다.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오찰귀왕과 석목 사이의 허공에서 하얀색과 붉은색 빛들이 뒤엉켰다. 무형의 기류가 양쪽으로 흘러가더니 순식간에 하늘을 하얀색과 붉은색으로 갈라놓았다.
두 사람의 실력은 엇비슷했다.
그 순간 주변의 대지와 명수호의 수면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땅이 아래로 꺼져버렸고, 출렁이던 호수의 물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서 오찰귀왕의 등 뒤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키가 백 장 정도 되는 푸른 허영이 나타났다. 말의 머리에 물고기의 몸을 가진 거대한 법상이었다.
거대한 법상은 날아오르면서 커다란 물고기 꼬리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가장 앞쪽에 있던 맹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쿵!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명수호에서 순식간에 파도가 출렁이면서 맹수들을 쓸어버렸다.
후!
제멋대로 출렁이는 물이 수많은 돌과 흙을 휩쓸고 순식간에 석목의 맹수들을 덮어버렸다. 기류로 만들어진 맹수들은 그 속에서 잠깐 허우적거리다가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러자 남아 있는 핏빛의 말들이 마치 우리에서 풀려난 듯, 석목을 향해 미친 듯이 덮쳐왔다.
석목은 깜짝 놀라 다시 두 팔을 흔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곤봉이 희미해지더니 주변에 곤영을 만들어내며 앞을 막았다.
허공에서 폭발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석목은 검붉은 빛을 뿜어내어 달려오는 말들을 막아냈다.
하지만 뒤이어 파랗고 거대한 물고기의 꼬리가 다가왔다.
석목은 숨이 턱 막혀 등 뒤의 날개를 펴서 도망가려 했지만 상대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꼬리가 몸을 조금 스쳤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석목은 멀리 튕겨 날아가 버렸다.
그는 허공에서 몇 번 몸을 돌린 뒤 간신히 균형을 잡았지만 그의 몸에 있는 금색 비늘은 많이 찢겨 있었고, 목구멍에서 비린내가 났다. 석목은 피를 삼키지 못하고 그대로 토해냈다.
“겨우 이 정도의 실력으로 나대다니. 조용히 죽어라!”
오찰귀왕은 크게 소리치며 등 뒤의 법상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푸른 갈퀴에서 빛을 뿜어내며 석목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석목의 두 눈에서 금빛이 스쳤다. 그는 등 뒤에서 날개를 펼치더니 거대한 붉은 원숭이 법상을 만들어냈다. 그 속에서는 화염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순식간에 곤봉을 화염에 타오르게 만들었다.
“좋아!”
석목은 땅을 짚고 앞으로 날아올랐고, 그의 몸 속 진기의 흐름이 몇 배는 더 빨라진 것 같았다.
석목의 손에 들린 여의빈철곤이 허공에서 난무하더니 현란한 잔영을 남겼다. 수많은 하얀 기류가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등 뒤의 붉은 원숭이 법상도 속도에 맞춰 허공에서 커다란 화염 곤봉을 휘둘렀다. 붉은 곤봉 그림자가 하늘에서 종과 횡으로 그림을 그렸다.
붉은 곤봉 그림자와 하얀 기류가 융합되어 크고 붉은 회오리를 이루며 석목을 둘러쌌다.
붉은 회오리는 하늘과 땅을 이어놓았고, 그로 인해 구름이 용솟음치며 땅이 심하게 흔들렸다.
석목은 붉은 회오리 사이에서 여의빈철곤을 흔들었다.
“역발산하!”
“직저창공!”
“역진팔방!”
“정천입지!”
“번천부지!”
석목의 움직임에 따라 통천십팔곤의 십식이 물 흐르듯 융합되었다. 이 모든 것을 눈 깜박할 사이에 시전한 것이다.
석목은 손에 든 곤봉으로 하늘을 찔렀다. 그러자 붉은 회오리가 사라지더니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천지무극!”
이는 석목이 이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통천십팔곤과 멸선곤법 일식을 융합하여 만든 십이식이었다.
퍽!
하늘에 하얀 번갯불이 나타났다.
콰쾅!
땅에서 귀가 터질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목이 서 있던 곳의 하늘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커다랗고 하얀 번개 빛이 하늘에서부터 우르르 떨어졌다. 그리고 땅 위에서 수많은 돌이 활활 타며 검은 화염을 만들어냈으며, 번개에 맞아 허공으로 튕겼다.
오찰귀왕은 허공에서 놀란 표정으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고작 지계 경지까지 수련한 인족 따위가 천지가 개벽할 수법을 쓸 거라고는,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더는 싸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고, 바로 도망을 가려 했다.
그 순간 수많은 천둥과 번개가 땅 위에 내리쳤고, 불이 활활 타오르며 번개와 불빛이 섞였다.
“아니! 나 오찰귀왕은 명역(冥域)에서 만 년을 보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오찰귀왕의 두 눈은 이제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그가 손에 든 푸른 갈퀴를 휘두르자 등 뒤에 있던 법상의 커다란 꼬리가 바다를 뒤엎을 듯한 기세로 움직였다.
쿵!
큰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오찰귀왕이 서 있던 곳이 하얗고 검은 빛에 의해 묻혀버렸다.
이어 오찰귀왕의 웅장한 몸과 법상이 그 빛에 의해 먼지로 변해버렸고, 영혼의 화염마저 흩어져버렸다.
하늘과 땅을 뒤엎은 하얗고 검은 빛은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져버렸다. 찬란한 번개와 검은 화염들도 곧바로 사라졌다.
천지는 다시 조용해졌다.
석목은 허공에서 여전히 두 손에 곤봉을 든 채 하늘을 찌르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 다만 몸의 금빛 비늘과 등 뒤의 법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의 몸이 갑자기 축 늘어지더니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여전히 쉽지는 않아!”
석목은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의 눈앞이 어두워지면서 몸에서 타오르던 불빛이 꺼졌다. 그는 허공에서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연나가 하늘에 은빛을 그리며 날아와서 석목을 재빨리 받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서 석목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어려 있는 표정은 기쁨인지 슬픔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연나는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한줄기 은빛으로 변하여 멀리 날아갔다.
* * *
며칠 뒤, 석목의 비밀 석실에서 큰 파동이 일어나더니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검은 빛은 천천히 소용돌이로 변하여 빙빙 돌았고, 그 속에서 한 사람이 튕겨 나와서 땅에 떨어졌다.
그는 바로 석목이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그는 주변을 훑어보더니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석목은 사령계의 음침한 기운과 죽음 같은 적막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삼 년 동안 연나의 가르침에 의해 사령계에서 수많은 사투를 벌이며 실전경험을 쌓았다.
미양성역 전체를 놓고 봐도 사령계처럼 수많은 천위의 존재와 싸울 기회가 많은 곳은 없을 것이었다.
석목은 여전히 지계 후기 경지였지만, 그가 풍기는 기운이나 실전 능력으로 보면 이 년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이제는 천위 중기 정도의 실력자와 싸운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석목은 비밀 석실에서 조용히 앉아 마음을 가라앉힌 뒤, 깊게 숨을 내뱉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석두!”
석목이 동부에서 나오자 멀리서부터 작은 몸집이 날아왔다. 채아였다.
“그동안 어땠어? 시비 걸러 온 사람은 없었지?”
석목이 물었다.
“나와 제풍 뚱보가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참, 사령계에서의 수련은 끝난 거야?”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 앉으며 물었다.
석목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정말로 그 환마도에 도전할 거야?”
채아가 물었다.
“맞아.”
석목이 하늘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이제 곧 십 년 대결이 시작되는데, 정말로 그때 도전한다고?”
채아가 다시 물었다.
석목은 그의 말을 듣고 멈칫했다. 그동안 수련만 하느라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었는데, 벌써 구 년이나 흘러서 대결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석두, 너는 그동안 폐관 수련만 하느라 종문의 임무도 수행하지 못했잖아. 아니면 대결이 끝나고 도전하는 건 어때? 지금의 실력이라면 대결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둘 거야. 그리고 종문의 포상도 챙길 수 있고.”
채아가 말했다.
“그런 건 전부 보잘것없는 것이야. 없어도 돼.”
석목은 잠시 침묵하더니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채아는 석목의 확고한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