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환상은 욕망으로부터 생긴다
용전야는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화를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내가 목숨처럼 아끼는 신통을 쓰게 하다니……. 내 백 년의 수련을 이렇게 날려버렸어! 너를 죽이고 말겠다!”
그가 한쪽 팔을 치켜들었다. 손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그의 피인지 석목의 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석목은 깜짝 놀랐다.
“하하하!”
용전야의 입에서 괴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자신의 심장 쪽을 향한 그의 손가락이 기이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가라!”
석목이 손을 힘껏 흔들자 여의빈철곤이 날아가서 바퀴가 돌 듯 용전야를 향해 갔다.
그것을 본 용전야는 다급하게 발을 이리저리 움직여 곤봉을 피했다. 그림을 그리는 손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너는 오늘 죽었다!”
용전야가 소리를 지르면서 복잡한 주문을 외웠다.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그가 오른손 손가락을 구부리더니 자신의 심장을 긁어댔다.
용전야는 흉악한 눈빛으로 석목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가 원했던 겁에 질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석목은 미소를 짓더니 두 손가락을 가슴 앞에서 두어 번 까딱이며 속으로 외쳤다.
‘커져라!’
용전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의 공심비술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던 그가 등 뒤에서 서늘함을 느낀 순간,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용전야는 다급하게 몸을 돌려서 두 팔을 가슴 앞으로 교차하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펑!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의 여의빈철곤은 바늘크기만 해졌다가 용전야가 몸을 돌리는 순간 커져서 그의 두 팔을 강하게 내리쳤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용전야의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어졌다. 이어 여의빈철곤이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가슴에 부딪혔다.
용전야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몸을 꼿꼿이 세운 그대로 뒤로 넘어졌고, 몸을 땅바닥에 부딪치며 기절해버렸다.
여의빈철곤이 다시 석목의 손으로 날아왔다.
펑!
순간 석목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두 손에 든 여의빈철곤을 꽉 쥐고 땅을 내리찍어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현장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허공의 팔척건곤경만이 유유히 돌아가고 있었고, 푸른빛의 막이 폐허가 된 무대에 드리워져 있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빛의 막을 뚫고 무대 안쪽에 누워 있는 사람을 향했다. 그들은 각양각색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석목과 용전야의 대결 결과는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특히 석목이 펼친 천지무극은 하늘과 땅을 휩쓸어버릴 듯한 기세와 위력으로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석목은 그가 천위 경지의 강자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의 실력을 의심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아무 말도 지껄이지 못하게 되었다.
구경꾼 중 청장천, 강수수, 적예자, 마옥 등은 복잡한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는 놀라움과 감탄, 존경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들과 함께 성지에 들어온 이 인족 청년은 이십 년도 되지 않는 세월 동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청란 성조의 직속 제자로 들어간 조극도 용전야와의 대결에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 용전야는 이 자리에 쓰러져 있고, 석목은 심한 상처를 입긴 했지만 여전히 서 있었다.
여경과 조심뢰, 태타 등 석목과 시비가 있었던 사람들의 표정은 어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실 그들은 처음에는 석목의 소식을 듣고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좋아하고 있었다. 건방진 신입이 된통 혼나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멀지 않은 곳의 관람대에서 지켜보던 남궁 호법이 한손을 흔들어 팔척건곤경을 거두어들였다.
외뿔 노인 금도는 폐허가 되어버린 무대 한쪽에 내려와 용전야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러더니 일어서서 깊은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그의 승리를 선포했다.
“석목이 백년 제자 상위 세 명을 모두 이겼으니, 그에게 환마도에 도전할 자격을 부여한다!”
* * *
칠 일 뒤.
석목이 환마전에 들어서자 전에 만났던 집사 노인이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노인의 옆에는 등 뒤에 긴 검을 꽂고 있는 중년 남자가 있었다. 그는 문중의 형벌을 집행하고 있는 계율당의 악 호법이었다.
“제자 석목, 인사드립니다.”
석목이 그를 향해 손을 모으며 말했다.
“인사는 됐다. 도착했으니 곧바로 시작하자.”
악 호법은 집사를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집사 노인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석목 앞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석목, 자네는 이미 환마도에 도전할 자격을 지녔다. 들어가기 전에 앞서 악 호법이 관련 사항을 미리 알려줄 것이야. 그 내용을 듣고 정말로 들어갈 것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면 된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머리를 끄덕였다.
“환마도는 수천 년 전 문중에서 여러 성계의 존재가 함께 만든 극히 기이한 대진이다. 총 열여덟 걸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걸음마다 한 개의 세상이 나타날 것이고, 한 가지 집념이 온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그 세상에서 무사히 걸어 나올 수 있을지는 온전히 너의 마음에 달려있다. 반드시 기억하거라. 환상은 마음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마(魔) 또한 마음에서부터 생기는 것이다.
네가 그 속에서 수 년 또는 수십 년을 보낸다 해도 바깥세상에서는 그것이 고작 한순간일 수 있다. 다만 너의 정신 대부분이 환마 세계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에, 그 시간이 길어지면 백치가 되거나 심하면 영혼마저 사라져버릴 수 있다. 그 안의 위험이 어떤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지. 그래도 들어가겠느냐?”
악 호법이 말했다.
“저는 이미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 소원을 이루어주십시오.”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좋다!”
악 호법은 그의 말을 듣고 눈에서 칭찬의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이미 결정을 내렸으면 나를 따라오너라.”
집사 노인이 석목을 데리고 대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들어가보니 중앙에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원형 법진이 있었다.
법진의 바깥쪽에는 한 장 높이쯤 되어 보이는 하얀 돌기둥 서른여섯 개가 서 있었고, 그 위에는 용처럼 생겼지만 뿔과 비늘은 없는 괴상한 짐승이 그려져 있었다.
그 괴상한 짐승은 돌기둥에 몸을 칭칭 감은 채 돌기둥 꼭대기로 머리를 불쑥 내밀고 있었다. 짐승들의 얼굴은 진법의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입을 크게 벌리고 있어서 뾰족한 이가 드러났다.
석목은 그 짐승을 여러 차례 바라보았다. 일전에 오래된 책에서 이런 괴상한 짐승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신(蜃)이고 용과 같은 종류였다. 이 짐승은 존재하지 않는 것도 만들어낼 수 있는, 즉 환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다.
석목이 다시 진법의 중앙을 바라보니 모양이 불규칙한 검은 돌들이 세워져 있었다.
검은 돌은 수정처럼 투명한 빛이었는데 현란한 광택을 뿜어냈으며, 그 위에는 촘촘하고 복잡한 주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환마석이다. 정혈 한 방울을 그 위에 떨어트리면 연결될 것이다.”
집사 노인이 석목에게 말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더니 악 호법과 그 집사에게 손을 모아 인사를 올리고는 법진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곧 그의 손바닥에 빨간 정혈 한 방울이 솟아났다.
석목이 손바닥으로 검은 돌을 누르자 그 위에서 한줄기 빛이 반짝였다. 이어 복잡하고 얇은 무늬 위로 붉은빛이 밝혀지며 석목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그대로 한참을 기다렸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석목이 속으로 의아해할 즈음 악 호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환마도는 최소 성계 경지에 있는 무인의 주도로 열어야 한다. 내가 이제 열어주도록 하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손바닥에서 한줄기 파란빛이 뿜어져 나와 하얀 돌기둥에 닿았다.
하얀 돌기둥은 파란빛이 스며들자 밝게 빛났고, 옥석처럼 투명해졌다.
돌기둥에서 하얀빛이 맴돌더니 그 빛이 양쪽의 돌기둥 위로 뻗어나갔다. 양쪽 돌기둥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서른여섯 개의 돌기둥에 전부 불이 밝혀졌다.
그 순간 돌기둥 꼭대기에 튀어나온 짐승 머리가 갑자기 움직였다. 그리고 살아 있는 듯 입을 크게 벌리고 진법의 중앙을 향해 하얀빛을 뿜어냈다.
서른여섯 갈래의 하얀 빛이 석목 앞에 놓여 있는 검은 돌 위에 섞였다.
위윙!
검은 돌 위에서 순식간에 소용돌이가 나타나면서 강한 흡입력이 생겼다.
석목은 자신의 몸을 그 힘에 맡긴 채 소용돌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자취를 감추자 검은 소용돌이도 사라졌고, 대전을 울리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 * *
빙글빙글 돌던 석목의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는 이미 다른 공간에 있었다.
그는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온통 검은색 안개뿐이었다. 마치 허공 속에 떨어진 것 같았다.
바로 앞에는 구불구불한 길이 놓여 있었는데, 얇고 검은 수정석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 길은 짙은 안개의 깊숙한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석목은 서둘러서 길을 걷는 대신, 눈에서 금빛을 뿜어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온통 짙은 안개뿐이었다.
이것은 그가 안개 속을 꿰뚫어볼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공간에는 그 작은 길 말고는 정말로 짙은 안개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앞에 있는 길 외에 갈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석목은 지체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제 막 한 걸음 걸었을 뿐인데 이상한 기분이 몰려왔다. 심장도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가슴을 부둥켜 잡고는 허리를 굽혔다. 그대로 바닥을 바라보니 이목구비가 뚜렷한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하지만 수정석 바닥에 비친 석목은 푸른 옷을 두른 모습이 아니었다. 온통 핏자국이 묻어 있는 금색 갑옷을 두르고 있었고, 둥근 방패막이 가슴 부위에 있었으며, 끈을 허리에 두르고 있는 게 마치 전쟁터의 장군 같았다.
그가 고개를 들자 귀에서 칼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색의 날카로운 화살이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났다.
“아……!”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석목의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그가 머리를 돌려보니 철갑을 두른 한 병사가 있었고, 그는 한쪽 눈에 꽂힌 화살을 잡고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석목은 깜짝 놀라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병사가 손에 무기를 들고 서로 사생결단의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궁수들이 손에 화살을 들고 이쪽을 향해 검은 깃털이 달린 화살을 쏘아댔다.
땅은 온통 피에 물들어 있었고, 여기저기 마르지 않은 핏자국이 곳곳에 자욱했다. 공기에서도 피비린내가 진동할 정도였다. 그리고 하늘을 찢는 소리가 석목의 귀를 아프게 했다.
“석 편장(*偏将, 대장의 아래에 딸린 부하 장수), 지금 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한다!”
석목의 귓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천둥소리만큼이나 크게 울려서 석목은 깜짝 놀랐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산처럼 쌓인 시체더미 위에서 한 남자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무거운 갑옷을 두르고 기골이 장대한 남자는 한손에 반달 모양의 장도를 들고 휘둘렀고, 다른 한손에는 흉악한 머리를 든 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야? 내가 왜 편장이지?’
석목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 몇몇이 얼굴에 피범벅을 하고는 석목에게 달려와서 땅에 무릎을 꿇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석 장군, 저희를 지휘하여 포위망을 뚫어주십시오!”
“포위망을 뚫어주십시오!”
“포위망을 뚫어주십시오…….”
석목은 주변의 지옥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의 심장이 요동치면서 포악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죽여라!”
석목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한손을 들어 장도를 휘둘렀다.
그는 크게 한 걸음 내디디며 허공으로 뛰어들었고, 앞에서 공격해오는 기마병을 향해 장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사람과 말이 전부 두 동강이가 났다.
뜨거운 피와 내장이 함께 뿜어져 나왔고, 그것들이 다시 석목의 몸에 흩뿌려졌다. 뿜어져 나온 피에 두 눈앞이 희미해졌지만, 마음속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쾌감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