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피의 늪
“죽여! 죽여! 다 죽여!”
석목은 죽이고 싶은 욕망에 점점 사로잡혔다. 그는 한손으로 뺨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몸을 날렸다. 그는 전쟁터에서 마치 토끼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가 한 번 날뛸 때마다 금속과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석목은 긴 칼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또 다른 곳에서 석목의 긴 칼이 대각선으로 날아갔고, 칼을 들고 있는 병사가 두 토막이 되어 나뒹굴었다. 석목은 몸을 돌려서 또 다른 곳에 나타났고, 그가 칼을 휘두르자 적의 머리 여러 개가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철갑을 두른 보병부터 무거운 갑옷을 두른 기마병, 유병(游兵, 달아나는 척하며 적을 유인하는 병사)과 활을 쏘는 궁수들까지, 석목은 무차별로 사람을 죽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또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그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을 죽일수록 그의 마음속에서 쾌감이 더 차올랐고, 흥분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석목은 점점 감정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자신이 수련 중이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드디어 적의 장수의 목이 석목의 손에 쥐어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손에 장도를 꽉 쥔 그의 눈에는 터진 핏줄이 가득했다. 그는 몸을 돌려서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의식 속에는 온통 핏빛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는 곧 그의 의식 세계를 전부 침식해버릴 것 같았다. 금색 곤봉이 있는 중심부에만 아직 안개가 스며들지 않았다.
석목은 다시 큰 보폭으로 앞을 향했고, 손에 검을 높이 들고 병사들을 향해 휘두르려 했다.
“석 장군……. 왜 이러십니까?”
“장군!”
석목이 칼을 들자 검은 갑옷을 두른 병사 몇몇이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죽여…….”
석목은 그들의 애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입에서는 끊임없이 죽이라는 말만 흘러나왔다.
퍽!
그가 손에 쥔 장도를 휘두르자 한 병사의 검은 갑옷이 갈라졌다. 그 안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와서 땅을 흠뻑 적셨다.
“제발……. 제발 죽이지 마세요……. 아…….”
뒷걸음질을 치던 병사는 절망에 빠진 채 소리를 질렀고, 허둥지둥 몸을 돌려 도망가려 했다.
석목의 두 눈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어 그의 몸이 빠르게 날아가서 그 병사 앞에 멈춰섰다.
석목이 몸을 돌려 장도를 휘두르자 피가 한가득 뿜어져 나왔고, 겁에 질린 표정의 머리들이 땅 위에서 굴렀다.
한편 시체더미 위에 있는 남자는 반월 장도를 시체들 사이에 꽂은 채 석목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죽여라……. 다 죽여라. 너의 살생 본능을 마음껏 풀어버려라!”
남자가 수염을 드리운 입가에 기이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석목의 몸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는 전혀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칼날에 묻은 피를 혀로 핥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났다.
그 순간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그의 의식 세계에서 금색 곤봉이 빛을 뿜어냈다.
그 빛은 잠시 동안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요동치던 무형의 물결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석목의 의식 세계에 흩어져 있던 붉은 피 안개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석목은 머릿속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에 이성을 되찾았다. 눈에 어렸던 핏빛도 사라졌다.
그는 이미 검은색으로 굳어버린 피범벅과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잘린 머리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안 돼. 안 돼…….”
석목은 손에 든 장검을 던져버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주위에서 또다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숨을 들이마시자 그의 눈에 다시 핏빛이 어리며 마음속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
석목이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몸에서 불빛을 뿜어냈다. 붉은 원숭이 법상의 허영이 허공에 나타났다.
화염을 몸에 휘감은 커다란 붉은 원숭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두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땅에서 회오리바람이 솟아오르며 시체의 잔해들과 피비린내가 다시 석목 주위에서 흩어져버렸다.
순간 전쟁터에 있던 모든 병사가 싸움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석목의 두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는 시선을 멀리 향한 채 전장에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훑어보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굳어졌다. 수염을 드리운 남자의 표정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달랐다. 얼굴에 놀란 기색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장난이라도 하는 듯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석목은 엄숙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고 두 글자를 뱉어냈다.
“환마!”
동시에 석목은 한 걸음 다가가며 입에서 검은빛을 내뿜으며 여의빈철곤을 불러냈다. 곤봉은 허공에서 한 장 정도 되는 길이로 커지더니 석목의 손에 들어왔다.
석목은 빠르게 땅을 여러 번 차며 몸을 날려서 수염 남자에게 향했다.
“막아라!”
남자가 두 눈을 크게 뜨자 눈 전체가 흰자가 없는 검은색이 되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 병사들의 눈이 전부 붉게 변했다. 그리고 손에 든 무기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석목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먼저 검은 갑옷을 두른 병사 수십 명이 동시에 달려왔고, 그들은 핏빛으로 물든 장도를 손에 들고 석목을 찌르려 했다.
석목은 두 손에 꽉 쥔 곤봉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여의곤은 절반이나 땅 속에 박혔다. 그의 두 팔에서 힘줄이 튀어나왔다.
그가 다시 곤봉을 앞으로 휘두르자 땅 위의 커다란 암석이 튕겨 올라서 날아갔다. 덤벼들던 병사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바위에 뭉개져버렸다.
석목은 멈추지 않고 커다란 암석을 뛰어넘어 손에 든 곤봉을 휘둘렀고, 그는 밀려오는 병사들 속을 헤치고 수염을 드리운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갑자기 천여 명의 병사가 까마득하게 몰려왔다. 그 속에는 궁수도 수백 명 정도 있었는데, 모두 손에 긴 활을 들고 석목에게 화살을 날렸다.
퍽!
수백 갈래의 검은 화살이 화살의 비가 되어 쏟아졌다. 하늘을 뒤덮은 화살들이 전부 석목을 향했다.
석목은 침착하게 검은 곤봉을 좌우로 흔들며 바람을 만들어냈다.
하얀 기류가 그의 주변에서 들끓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며 거대한 기류가 그의 몸을 감쌌다.
“백수진황!”
석목이 곤봉을 앞으로 힘차게 밀었다. 그러자 공기기 찢어지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콰르르!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하얀 기류 속에서 수많은 맹수가 뛰쳐나와 홍수를 이루었다. 그리고 몇 장 정도의 하얀 기류로 된 벽을 만들어서 곧바로 앞으로 밀고나갔다.
검은 화살의 비는 하얀 기류의 벽에 닿자 전부 끊어지고 부서져버렸다.
천여 명이나 되는 병사도 맹수들에 밀려 흩어졌다.
석목은 놀라운 기세를 뿜어내는 백수진황으로 길을 텄고, 한동안은 그의 앞을 막아서는 병사가 없었다. 그는 한손에 곤봉을 들고 수염을 드리운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석목이 밟는 땅은 맹수들에 의해 심하게 부서졌고, 검은 갑옷을 두른 병사들의 찢어진 시체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땅은 피에 버무려진 흙으로 가득했다.
석목은 울퉁불퉁해진 땅을 밟으며 빠르게 날아갔고, 순식간에 수염 남자 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남자는 사체로 이루어진 산 위에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는 석목의 공격을 받아내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의 두 눈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짙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검은 안개는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땅을 뚫어버리더니 흙과 섞였다.
석목은 큰 보폭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그 시체의 산 위에 도착할 즈음에 강하게 당기는 힘으로 인해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바라보니, 시체더미 속에서 피범벅이 된 손이 여러 개 튀어나와서 석목의 발을 잡고 있었다. 손들은 그를 시체더미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석목은 빠르게 곤봉을 휘둘러서 그 손들을 부숴버렸다.
그가 다시 발을 들어 앞으로 향하려고 할 때,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땅 속으로 푹 빠져버렸다.
그 주변의 땅은 전부 붉은 핏빛으로 변했고, 원래 있던 흙과 암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거무칙칙하고 걸쭉한 피의 늪으로 바뀌어 있었다.
석목의 두 발은 물컹해진 땅에 빠져 있었다.
끈적이는 피의 늪에서 커다란 거품이 올라왔다가 터졌다. 거품이 터질 때 마다 그 속에서 붉은색 기체가 흘러나와서 공기 속에 퍼졌다.
잠시 후 석목의 주위는 온통 옅은 붉은색 기체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힘껏 다리를 올려서 앞으로 움직이려 했으나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몸이 더 깊숙이 땅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벌써 허리까지 빠져버렸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옅은 기체 속에서 수십 개의 사람 그림자를 보았다. 그들은 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기어올라 석목을 덮치려 했다.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석목 앞으로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고, 그를 늪 속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석목은 한쪽 팔을 흔들어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곤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사람들은 곤봉 공격에 부서져버렸고, 찢어진 시체의 조각과 피가 다시 석목의 몸에 흩뿌려졌다.
그 순간 주변에 자욱했던 붉은 기체가 점점 짙어졌다. 피비린내도 더 지독해져서 석목은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귓가에 거칠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죽여, 죽여, 죽여! 마음껏 죽이란 말이야! 이 쾌감을 즐겨! 무엇보다 본능적인 네 자신으로 돌아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자 또렷해졌던 석목의 머릿속이 다시 한 번 피안개로 자욱해졌다. 그의 눈도 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쥐고 있던 검은 곤봉이 허공에서 멈췄다. 석목은 주변에서 덮쳐오는 사람들에게 몸을 맡긴 채 늪의 깊은 곳으로 점점 끌려들어 갔다.
석목의 몸은 눈 깜박할 사이에 전부 늪에 묻혔으며, 머리만 그 위에 남겨졌다.
“안 돼…….”
그때 석목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의 몸 주변에서 불빛이 번지며 눈부신 빛을 자아냈다. 마치 화염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두른 것 같았다.
화염이 나타나자 주변에 있는 피의 늪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버렸다.
석목의 눈은 여전히 붉게 물들어 있었고, 아직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겨우 남아 있는 한줄기 이성으로 피의 늪을 벗어났다.
그는 허공으로 날아올라 몸을 활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 장 정도 되는 곤봉을 등 뒤에서부터 앞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허공에 검은 곤봉 그림자가 나타났고, 산울 부술 기세로 수염 남자에게 날아들었다.
수염 남자는 석목의 공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듯, 얼굴에 놀란 기색을 떠올리며 반월 장도를 휘둘러 막아냈다.
퍽!
무엇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염 남자의 장도가 석목의 곤봉에 의해 두 동강이가 나버렸다.
그의 어깨 절반이 완전히 빠져버렸고, 몸이 반으로 접힌 것처럼 줄어들었다.
“푸웃!”
수염 남자는 입에 고여 있던 피를 뱉더니 기이한 소리로 웃었다.
석목의 눈앞이 희미해졌다. 앞에 있던 남자의 철갑 투구가 떨어지며 그 속에서 수염이 없는 청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석목은 그를 보자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왕천호(王天豪)였다.
“하하. 석목, 너는 천생이 폐맥이라 영원히 쓰레기로 남을 거야. 일생 동안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죽겠지.”
왕천호는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는데도 석목을 향해 목 놓아 소리를 질렀다.
“나는 폐맥이 아니야! 나는 폐인이 아니야! 나는 아니야…….”
석목은 그의 말을 듣자 다시 실성한 듯 소리를 질렀다. 손도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야. 네가 부정해도 바뀌는 건 없어. 하하하.”
석목을 바라보는 왕천호의 눈에 교활한 기색이 스쳐갔다. 그는 몸을 뒤로 빼고 눈에 검은 안개를 드리우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때 석목은 갑자기 무엇인가 정신이 든 듯, 탁해졌던 눈빛이 다시 맑아졌다. 그는 머리를 들고 큰소리로 외치더니 곤봉을 흔들었다.
커다란 곤봉이 엄청난 기운을 뿜으며 왕천호의 몸으로 날아갔다. 그는 순식간에 핏덩어리로 변해버렸다.
그러자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곳에는 석목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소리도 전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