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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436화 (436/916)

436화. 잃어버린 비경

석목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에 한참 동안 신음을 질렀다. 그러고 나서 차차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는 다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체와 피의 늪은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혼자 작은 길에 서 있었고,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갔을 뿐이었다.

석목은 한참이나 멍하게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환상 속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았지만 현실에서는 정말 한순간에 불과했다.

석목은 손을 들어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손에는 땀이 흥건하게 차 있었다. 몸도 끈적끈적했고 입고 있는 푸른 옷은 푹 젖어버렸다.

그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발을 들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고, 그는 드넓은 초원 위에 서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니 온통 푸르스름했고, 소와 양떼가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따뜻한 햇볕이 석목의 몸에 쏟아졌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코끝에 흙과 풀냄새가 풍겼다. 그는 조용하고 편안한 기분에 점차 빠져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석목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머리를 흔들며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단전의 의식 세계가 텅텅 비어 있었다. 오랜 시간 어렵게 수련한 결과인 진기와 법력이 순식간에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왜 이러지? 내 수련 경지는?”

석목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외쳤다.

순간 그는 무엇인가 생각난 듯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몸의 곳곳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속의 그 어느 곳에서도 진기와 법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태어나서 단 한 번의 수련도 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석목은 깊은숨을 내뱉으며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아니야. 이것은 환상일 뿐이야.”

지금으로서는 그런 해석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환술이라는 게 정말 이 정도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방금 전에는 환상 속에서 살기에 정신이 나가긴 했지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수련 경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석목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생각하다가 다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정말 환상에 의한 것이라면, 이 초원의 어디엔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터였다.

정신을 가다듬은 석목은 한 방향을 정하고 그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한 시진이나 걸은 끝에 해가 떨어질 무렵 어느 산비탈에 도착했다.

산비탈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니 마을 한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십여 가구가 있는 듯했는데,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을에는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고, 가축의 소리도 들려왔다.

석목은 이 광경을 바라보며 막막함을 느꼈다. 바닷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의 마을사람들은 순박했다. 생활은 가난했지만 근심도 걱정도 없는 삶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목숨을 앗아가려는 강적도 없었고, 고작 수련 경지를 높일 기회를 얻기 위해 사투를 벌일 일도 없었다.

“석 오라버니? 오라버니인가요?”

그때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듯했다.

석목은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의 등 뒤에 하얀 치마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그는 손에 물통을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맑은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여자는 연꽃같이 차분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몸에는 성기게 짠 천을 두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미모였다.

그 여자는 바로 종수였다.

“수아!”

석목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석 오라버니, 정말 오라버니였군요.”

수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은 빗방울을 머금은 배꽃 같았다.

그녀의 손이 풀리면서 물통이 땅에 떨어졌다. 안에 들어 있던 맑은 물이 전부 쏟아졌지만, 그녀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석목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석 오라버니, 어디에 있었어요? 오라버니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종수가 석목의 품에 안겨 흐느끼며 말했다.

순간 석목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는 그녀를 안으려다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멈칫했다. 이곳이 환상 속이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품에 안긴 사람 또한 환마가 변신한 것인지도 몰랐다.

“석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종수가 석목의 품에 파묻혀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석목의 눈에는 걱정과 의심이 가득했다.

종수는 천천히 석목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의 눈에 원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석 오라버니, 저희가 서하대륙에서 헤어진 뒤로 벌써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오라버니는 혹시 그동안 다른 여인이 생겨서 저를 버리려고 하는 것인가요?”

종수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눈이 빨개졌다.

석목은 종수의 표정을 보자 너무 마음이 너무 아팠다. 순식간에 의심을 깨끗하게 거둔 그는 종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절대 아니야! 수아, 네가 아무 이유 없이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계속 너를 찾으러 다녔어. 다른 여인이라니, 말도 안 돼!”

“정말이죠?”

수아의 눈에 다시 희망의 빛이 어렸다.

“물론이지. 하늘에 맹세할 수 있어. 만약 내 마음이 변했다면…….”

석목은 손바닥을 펴고 손끝을 하늘로 향해 치켜들었다. 그런데 그가 막 맹세를 하려는 순간 하얀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석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를 믿어요.”

종수가 사랑스럽고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

“수아…….”

석목은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종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입을 막은 그녀의 작은 손을 감쌌다.

“석 오라버니, 방금 전에는 왜 이상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신 거예요?”

종수가 살짝 억울한 듯 물었다.

석목은 잠깐 멈칫하더니 그가 고민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환마도라구요? 석 오라버니, 청란성지에 들어갔나요?”

종수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수아, 네가 환마도를 어떻게 알아?”

석목이 의아한 듯 물었다.

“당연히 알죠. 그 잃어버린 비경은 성지의 선조들이 함께 만든 곳이에요. 각 문파에서 버려진 제자를 이곳으로 보낸답니다. 저도 이곳에 있으니 어느 정도는 알고 있죠.”

종수가 말했다.

“잃어버린 비경? 여기는 환마도의 환상 속이 아닌 거야?”

석목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석 오라버니, 환마도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수련해온 경지가 전부 사라지고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게 맞나요?”

종수가 물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게……. 맞아. 그렇다면…….”

“그렇군요. 석 오라버니, 이곳은 환상 속이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어요. 몸속에 있는 혈맥의 힘이 전부 빨려나간 뒤 이곳으로 보내졌는데, 이미 몇 년이나 됐어요.”

종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매우 슬퍼보였다.

“뭐라고?”

석목은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랐다.

“석 오라버니, 지금 어떤 기분인지 잘 알아요. 저도 처음에는 오라버니와 마찬가지로 이 모든 걸 믿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것은 현실이에요. 우리는 종문에서 버림을 받았고, 남은 인생을 이곳에서 보내게 될 거예요.”

종수의 말에 석목은 표정이 굳어지며 격하게 머리를 흔들었고,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종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더니 석목의 어깨에 기대어 옆으로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손을 잡았다.

해가 떨어지며 옅은 금색 노을 한줄기만 남았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남겨진 마지막 빛줄기 같았다.

석목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종수를 바라보았다.

“수아, 방금 전에 너도 버림을 받아서 이곳으로 왔다고 했지? 그 이유가 뭐야? 너도 청란성지에 들어갔어?”

석목이 물었다.

“저는 미양성계의 또 다른 수련 성지인 이진종(离尘宗)에 들어갔었어요. 그리고 어떤 사건으로 인해 종문에서 버림을 받은 거예요.”

수아가 말했다.

“무슨 사건이지? 나에게 말해줄 수 있어?”

석목이 물었다.

“실은 저도 우연한 기회로 이진종에 들어갔어요. 흔하지 않은 천봉혈맥을 몸에 지니고 있어서 종문의 성녀 후보로 선발되었죠. 하지만 종문의 수련 시험에서 어떠한 이유로 떨어지게 되었어요. 그리고 부주의로 종문의 한 보물에 손상을 입혔죠. 종문의 문주는 화가 나서 원래는 저를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몸속의 천봉혈맥을 뽑아버리고 이곳에 버린 거예요.”

종수가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석목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수아의 말에는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었다. 이곳은 정말로 환상 속이 아닌 비경인 것일까?

“석 오라버니,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각 성지에서 버려진 제자들 이예요. 수련 능력을 전부 빼앗겨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온 거죠. 이곳 사람들은 더는 예전 같은 힘과 능력이 없지만, 전부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어요. 예전처럼 불안했던 삶보다는 훨씬 좋은 것 같아요. 석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이곳에서 함께 살아요. 수아와 같이 살면 안 될까요? 더는 떨어져 있기 싫어요!”

종수가 따뜻한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석목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그는 한참 후에야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아, 나는 이곳에 남을 수 있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수련의 경지를 빼앗기는 건 원하지 않아. 지금 이 비경에서 천지 영기가 느껴지고 있으니 다시 수련을 해보고 싶어. 그건 괜찮을까?”

“당연하죠. 석 오라버니가 이곳에 남을 수만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해요.”

종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석목은 종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물이 쏟아진 물통을 바라보며 물었다.

“수아, 물을 길러 갔다 온 거야?”

“네, 마을에 우물이 없어서 일 리 밖에 있는 산골짜기에서 물을 길어 와야 해요.”

종수가 말했다.

“그럼 내가 해줄게.”

석목은 물통을 들었다. 비록 수련 경지는 전부 빼앗겼지만, 오랜 시간 다져진 체력은 여전해서 물을 긷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종수는 행복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날이 어두워졌을 즈음에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매우 누추했지만 전체적으로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었다.

“종수, 그분은 누구야?”

석목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삼베옷 차람의 청년이 의아한 표정으로 석목을 훑어보며 물었다.

“저는 석목이라고 합니다. 종수의 약혼자입니다.”

석목이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종수가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채 고개를 숙였다. 석목의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삼베옷을 입은 청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종수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한숨을 내뱉으며 구석으로 갔다.

그러자 두 사람이 다가와서 삼베옷 청년을 위로했다.

“허허, 종수의 약혼자였군요. 저희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참, 혹시 괜찮으시다면 어느 종문의 제자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심상치 않은 기세를 풍기는 중년 남자가 걸어와서 손을 모으며 말했다.

“석 오라버니, 이분은 범(凡) 숙부예요. 저희 대구 마을의 촌장님입니다.”

종수가 석목의 귀가에 대고 말했다.

“저는 청란성지의 제자입니다. 이제 막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그렇군요. 너무 낙담하지 마세요. 우리 모두 같은 처지입니다. 전부 종문에 의해 이곳으로 추방된 사람이지요. 우리 마을에 왔으니 앞으로는 다 한 식구입니다.”

중년 남자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범 숙부, 감사합니다.”

석목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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