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대역부도(大逆不道)
“서방님? 아직도 날 속이려고?”
석목은 웃음기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종수를 바라보았다.
“서방님, 저 종수예요……. 저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종수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외쳤다.
“연기는 이제 그만해.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들켰으니까.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석목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방님,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종수가 울부짖었다.
“그래, 하긴 전부 이야기해야 네가 수긍하겠군.”
석목이 여전히 차갑게 말했다.
“첫째, 이 비경. 환술은 오감을 혼란시킬 수는 있지만 수련을 하던 사람의 본능적인 영적 감각까지 숨길 수는 없다. 이 마을 근처의 산골짜기에서는 아무런 영초도 자라지 않더군. 이렇게 천지 영기가 짙은 곳인데 영초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무들도 전부 평범했고, 요수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석목이 말을 이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다.
“둘째, 마을사람들. 수련의 경지가 없어진 수련자라면 어떻게 해서든 다시 회복하려 했겠지. 절대 이렇게 순응하고 평범하게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엄청난 힘을 가졌던 사람이 갑자기 모든 것을 잃게 되면, 그 사람의 성향이 어떻든 반드시 그 힘을 되찾고 싶어 하는 게 정상이니까. 그게 사람의 본능이고, 성인이라 해도 그 본능을 바꿀 수는 없다.”
석목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셋째, 설의의 사건. 그 일은 너무 조잡해서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종수는 효심이 깊은 여인이다. 그녀는 나와 함께 아버님의 임종을 지켰지. 비록 남해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해도, 그녀라면 혼인이라는 큰일을 치르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 알리기 위해 제사라도 지냈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지.”
석목은 단번에 네 가지의 이유를 나열하고는 차가운 눈으로 종수를 바라보았다.
종수는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켰고, 사람 모양의 검은 그림자로 변했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초가집, 마을, 풀밭 등 모든 것이 사라지며 희미한 회색 안개만 남았다.
“히히히, 그렇다고 너무 좋아하지는 마라. 뒤로 갈수록 어려워질 테니…….”
검은 그림자는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석목은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는 자신이 다시 좁은 길 위에 놓여 있다는 걸 깨닫고 긴 숨을 내뱉었다.
환마가 둔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종수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려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너무 생생해서 현실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깊게 찌푸려진 미간을 손으로 비볐다. 씁쓸한 기분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앞을 바라보니 눈앞은 여전히 검은 길뿐이었다.
그는 더 지체하지 않고 과감하게 발을 내딛었다.
눈앞에서 하얀빛이 번졌고, 잠시 후 석목은 대전 안에 있었다.
주변을 보니 그가 서 있는 곳은 환마전이었다. 부문이 가득 새겨져 있는 검은 비석 옆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때 파란 옷을 두른 악 법보가 미간을 찌푸리며 석목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석목, 너는 이미 환마도의 시험을 통과했다. 법진 위에 서서 뭘 하는 것인가?”
“네? 제가 환마도를 통과했다는 말입니까?”
석목은 그 말을 듣더니 놀라서 되물었다.
“왜 그러냐? 성지의 집법당 호법인 내가 고작 백년 제자 한 명에게 거짓말을 하겠는가?”
악 호법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저는 이제 막…….”
석목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악 호법이 그의 말을 끊었다.
“환마도에 들어간 지 벌써 칠 일이 지났다. 환마도를 통과한 역대 제자 중 가장 빠른 기록은 아니긴 하지만, 천 년 만에 네가 처음이다. 정말 잘 이겨냈다. 어서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이제 성지의 이 층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면 된다.”
악 호법이 말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석목은 여전히 의아한 듯 손을 모으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악 호법이 약간 귀찮은 듯 물었다.
“저는 환마도에 들어가기 전에 총 열여덟 걸음을 걷고, 열여덟 개의 환마 세계를 거쳐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호법은 다시 한 번 석목의 말을 끊었다.
“환마 세계의 시공간은 혼란스럽다. 그래서 예전에 들어갔던 제자들도 일부 기억을 잃어버리고 나오는 경우가 잦았지. 이틀 정도 쉬고 나면 회복될 거다.”
악 호법이 말했다.
“아니, 너는 악 호법이 아니야!”
석목이 갑자기 큰소리를 지르더니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붉은 화염이 맴도는 주먹이 순식간에 악 호법에게 날아갔다.
악 호법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몸에서 파란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날아오는 석목의 주먹을 그대로 부숴버렸다. 그가 두른 피풍이 휘날리면서 보이지 않는 강한 기운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엄청난 위압감이 석목을 향해 밀려왔다. 그의 가슴이 답답해지더니 목구멍에서 피가 올라왔다.
“감히 윗사람을 공격하다니! 종문에서 이런 대역죄를 저지른 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알고 있는가?”
악 호법이 몸을 돌려 석목을 등진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바로 성계 경지의 실력인가? 눈빛 하나로 이렇게 강한 힘을 뿜어내다니.’
석목은 당혹감을 느꼈다. 정말로 벌써 환마도를 통과했다는 말인가?
“이 제자를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아직도 환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줄만 알았습니다.”
석목은 등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손을 모아 말했다.
“됐다. 너는 이제 막 환마도의 시험을 거쳤고, 또 이번이 처음이니 용서하겠다. 돌아가서 푹 쉬어라.”
악 호법이 옷자락을 흔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 제자, 물러나겠습니다.”
석목은 큰 은혜라도 입은 듯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환마전을 나섰다.
현영탑에서 나온 석목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몸에서 빛을 뿜어내며 멀리 날아가 버렸다.
잠시 후 석목은 자신의 동부에 도착했다.
그가 이제 막 마당에 들어서자 제풍이 시종 몇몇에게 무엇인가를 분부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석목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다급하게 걸어와서 손을 모아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부주님, 돌아오셨습니까!”
“그래.”
석목은 느긋하게 대답하고는 더 말하지 않고 주실로 들어갔다.
그때 채아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석두, 이렇게 빨리 돌아오다니! 환마도는 통과한 거야?”
채아가 날아와서 날개를 퍼덕이며 석목의 어깨에 앉았다.
석목은 한참 고민하더니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석두, 너 왜 그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환마도에서 절세미녀라도 나타나서 네 혼을 뺏어간 건 아니겠지?”
채아가 목을 빼고 석목을 훑어보더니 농담을 던졌다.
석목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무엇인가 생각난 듯 채아를 덥석 붙잡고 자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채아는 석목의 손에 잡힌 채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석두, 너 왜 그래? 채……채아의 고기는 맛이 없어…….”
석목은 그 말을 듣더니 피식 웃고는 채아를 던지고, 주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다음 날, 석목이 환마도의 시험을 통과해서 천년 제자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소식이 황계 구역에 널리 퍼졌다.
석목은 한순간에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유명세는 청란 성주가 제자로 데려간 조극 이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며칠 동안 그와 가깝게 지내던 청장천, 마옥, 자릉 등이 축하하러 찾아왔다. 그다지 친분이 없는 사람들도 그를 방문했으며, 심지어 청란방 십 위 안에 드는 제자들까지 선물을 싸들고 석목의 동부를 찾았다.
석목은 이런 접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만 친절하게 맞아들였다. 나머지 사람들은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전부 제풍에게 맡겨버렸다.
그러나 찾아오는 횟수가 잦은 사람은 석목 입장에서도 계속 거절할 수 없었고, 가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
* * *
보름 후, 석목이 본격적으로 천년 제자가 되는 날이 되었다.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전부 찾아와서 인사를 하며 그를 배웅했다. 현영탑 앞에는 사람이 백 명 가까이 모여 있었다.
“석 형, 천년 제자가 되었다고 저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시간 나면 종종 놀러 오세요.”
청장천이 웃으며 말했다.
“석 오라버니. 자주 오셔야 해요.”
마옥도 말했다.
“물론이죠.”
석목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강력한 영기의 파동이 밀려왔다. 석목은 급히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하얀 구름이 떠다니던 파란 하늘이 갑자기 찢어졌고, 검은 구멍이 나면서 금색 비늘로 둘러싸인 용의 발이 튀어나왔다.
석목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그 용의 발에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건 뭐야?”
사람들이 놀라 소스라치고 있을 때, 용의 발이 구름을 찢더니 그 안에서 백 장 정도 되는 머리 아홉 개 달린 교룡이 튀어나왔다.
아홉 개의 커다란 머리가 사람들을 향해 울부짖었다.
“크아아!”
머리 아홉 개 달린 교룡은 몸에서 금빛을 뿜어내더니 순식간에 작아졌고, 금색 옷을 입은 남자로 변했다.
“석목, 이번에는 어떻게 도망갈 테냐?”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오조…….”
석목이 이를 부득 갈며 말했다.
“오늘은 석목 한 놈만 잡으러 온 것이다. 상관없는 놈들은 전부 꺼져라!”
오조가 소리를 지르자 그의 몸에서 셩계의 기운이 순식간에 몰려나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폭한 위압감이 사람들을 덮쳤다.
“성……성계의 존재라니……. 빨리 도망가자!”
사람들이 놀란 기색으로 허둥지둥했다.
“석 형, 저 자는 우리가 상대할 수 없으니 빨리 도망갑시다!”
청장천은 그렇게 말하고 몸에서 푸른빛을 뿜어내며 먼저 사라져버렸다.
“석 오라버니, 저는 실력이 너무 보잘것없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마옥도 그 한마디만 던지고 빛이 되어 멀리 날아가 버렸다.
“석 오라버니, 조심하세요!”
뒤에어 자릉이 몸에서 자색 빛을 밝히며 사라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석목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전부 도망쳐버렸다. 오조는 도망가는 사람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석목만 노려보고 있었다.
석목은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서 허무함이 몰려왔다. 눈빛도 매우 어두워졌다.
그때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채아가 날개를 퍼덕이며 말했다.
“석두, 사람들이 전부 떠난다 해도 나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 너와 함께 싸우겠어!”
그 말을 들은 석목의 눈빛이 다시 맑아졌다. 그는 입을 벌려 여의빈철곤을 꺼내서 손에 꽉 쥐었다.
“오조, 덤벼라. 오늘이야말로 모든 걸 끝내자.”
석목이 소리를 지르며 팔을 흔들자 여의빈쳘곤이 검은빛을 뿜어냈다. 그 주위에서는 하얀 기류가 맴돌고 있었다.
그가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힘껏 곤봉을 휘두르자 수십 장 정도 되는 검은 곤봉 그림자가 허공을 찢었다.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도 재주라고 부리는 거냐!”
오조가 가소롭다느 듯이 말했다.
그가 한손을 구부려서 석목을 향해 내밀자 커다란 용의 발이 허공을 찢으며 나타났다.
곧바로 곤봉 그림자를 부숴버린 금색 용의 발은 이어서 석목을 붙잡으려 했다.
석목은 차분한 표정으로 손에 든 곤봉을 휘둘렀다. 하얀 회오리바람 몇 개가 곤봉에서 튕겨 나와서 용의 발에 닿았다. 회오리바람들은 이내 부서져버렸지만, 발의 움직임도 조금 느려졌다.
석목은 그 사이에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때 용의 발에서 금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순간이동을 하듯 석목의 머리 위에 나타났고, 단번에 그를 눌러버렸다.
콰르르!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석목이 밟고 있던 땅에 수백 개의 균열이 생겼다. 그중 가장 큰 균열이 양쪽으로 찢어지면서 하얀 탑 위까지 이어졌다.
퍽!
석목의 머리가 꺾이더니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그의 몸은 용의 발에 의해 눌려서 여의빈철곤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석두!”
채아가 날아오며 절박하게 외쳤다.
“너는 빨리 도망가…….”
석목은 이를 악물고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나는 도망가지 않을 거야! 우리가 함께한 시간도 있고,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랑 같이 죽을 거야!”
채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너…….”
그러나 석목의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래, 네가 그렇게 죽고 싶다면 내가 직접 보내줄게.”
석목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불이 타오르더니 붉은 원숭이 법상이 나타났다. 법상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탄탄한 두 팔을 들어 용의 발을 위로 밀어버렸다.
석목은 순간 옆으로 구르며 손에 든 여의빈철곤으로 채아를 강하게 내리쳤다.
펑!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채아의 몸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