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화. 심경을 돌파하다
“아……. 석두, 왜……?”
채아가 피범벅이 된 날개를 퍼덕이며 물었다.
“채아는 수련의 경지가 낮은 편이지만, 위험한 상황이 다가오면 빨리 알아차리고 가장 먼저 도망갔을 거야. 교룡이 나타났을 때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더니, 지금은 나랑 같이 죽겠다? 그리고 청란성지가 어떤 곳인데, 네가 이렇게 쉽게 찢어버릴 수 있을까?”
석목이 말했다.
“하하하……. 너와 매일 함께한 영총조차 믿지 못하다니.”
채아가 괴상한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나는 채아를 너무 믿기 때문에 너를 믿지 않는 거야.”
석목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화염이 활활 타오르는 검은 곤봉으로 다시 채아를 공격했다.
채아의 몸은 곤봉이 떨어지자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석목은 머리를 들어 허공에 있는 오조를 바라보았다. 오조도 산산조각이 나서 검은 안개로 변해버렸다. 주변의 나무, 산과 현영탑까지 함께 사라졌다.
이어 다시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며 주변이 희미해졌다.
석목은 앞으로 또 한 걸음을 나아갔다.
환마도에서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는 새로운 환상에 빠졌다.
환상은 전부 지난날의 기억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금소채나 진 이모, 심지어 유안까지 나타났다.
모든 환상은 생생하게 피부에 와 닿았고,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부 그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석목은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도 모르게 환상에 빠져버렸고, 진실과 허구를 분별하지 못해서 여러 번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석목은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그리고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경험으로 결정적인 순간마다 깨어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석목의 눈앞이 다시 희미해지면서, 그는 또 한 번 환상에서 벗어나 검은 길 위에 섰다.
주변의 안개는 너무 짙어져서 그의 발만 보일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석목은 가볍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고, 잠시 숨을 고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마지막 한 걸음이다.’
그는 환상 속을 벗어날 때마다 마음이 더욱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강철을 단련하듯 점점 견고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계속해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검은 길 위에서 하얀빛이 크게 번지더니 허공에 흰색 문이 나타났다.
빛으로 이루어진 문은 환마도가 곧 끝날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환상으로 인한 착각이 아니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직감 같은 것이었다.
석목은 다시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문 속으로 들어가자 눈앞의 광경이 다시 바뀌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드넓은 바닷가에 서 있었다.
석목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마지막 환상일까?”
그는 이제 아무런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만만했다.
밖에서 봤을 때는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는 열일곱 번의 시험을 천신만고 끝에 이겨냈다. 그 과정에서 정신력이 단단해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도 눈처럼 맑아졌다. 이제 그는 어떤 환상이든 깨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본 순간 석목의 안색이 변했다.
“아니, 이곳은…….”
그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바닷가 마을이 있었다.
해안에는 낡은 어선 몇 척이 묶인 채 파도에 의해 흔들렸다.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나무 몇 그루가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모든 것이 너무 익숙했다.
이 작은 어촌은 다름 아닌 석목의 고향이었다.
“멍! 멍!”
노란 강아지 한 마리가 마을에서 뛰어나와 짖었다.
“누렁이…….”
석목은 강아지를 바라보며 아련한 눈빛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렁이는 옆집에서 기르는 강아지였는데, 그를 유독 많이 따랐다.
강아지는 혀를 내밀고 꼬리를 흔들면서 석목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기더니 앞발을 몸에 비비며 킁킁거리고 냄새를 맡았다.
석목은 무릎을 굽히고 누렁이를 쓰다듬었다.
“목아, 또 어디 갔다가 이제 돌아오니?”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석목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몸에 흐르는 모든 피가 머리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소박한 차림을 한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은 얼굴은 평범했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인상이었다.
“어머니…….”
석목은 천천히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목아, 너 왜 그래?”
여인이 석목의 옆으로 다가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그의 키는 여인의 가슴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당황해서 두 손을 내려다보니 작고 귀여운 두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물가로 다가가서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있었다.
“내가 아이로 변했어……. 이곳은 환상 속이야.”
석목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을 일깨웠다.
“목아, 너 왜 그래? 몸이 안 좋니?”
여인이 석목의 손을 잡고 이마를 짚어보았다. 그녀에게서 익숙하고 편안한 냄새가 풍겼다. 이것은 어머니의 냄새였다.
석목은 아이처럼 그 자리에 서서 여인에게 안긴 채, 그 편안함에 몸을 맡겼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찬바람을 맞았나보다. 어서 집으로 가자. 날이 차니 바닷바람을 계속 맞으면 안 돼.”
석목의 이마를 만져본 여인은 별다른 이상이 없자 이내 마음을 놓은 듯, 석목의 손을 잡고 마을로 향했다.
석목은 얼떨결에 그녀에 의해 순순히 끌려갔다.
이제 곧 해가 떨어질 때가 되어서 마을 곳곳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길가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두 모자를 향해 인사를 했다.
‘흑어(黑鱼) 형, 대주자(大柱子), 구(九) 숙부…….’
석목은 익숙한 얼굴과 익숙한 목소리를 보고 들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흑어와 대주자도 어렸을 적 모습 그대로였고, 구 숙부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여인은 석목의 손을 잡고 어느 집 마당으로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왜 이제야 왔어?”
두 사람이 막 마당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방에서 걸어 나왔다.
남자의 피부는 거무스름했고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며, 맑은 눈을 하고 있었다. 몸에서는 기운이 넘치는 듯했다.
“아……아버지…….”
석목은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다.
석목의 아버지는 그가 매우 어릴 때 마을을 떠나서 무인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어렴풋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핏줄이 기억하고 있는 탓인지, 석목은 그 남자를 보자마자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목이를 찾으러 갔었어요. 바닷가에서 놀고 있더라구요.”
여인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목아, 앞으로 늦은 시간까지 밖에서 놀면 안 된다. 어머니한테 걱정을 끼치면 안 돼. 그리고 바닷가는 위험하니까 앞으로 가지 마.”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석목을 향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석목은 남자를 바라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지금의 모습은 그의 기억과 맞지 않았다. 그는 지금 일고여덟 살 정도 되었고, 그 즈음 아버지는 이미 어촌을 떠난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아직 이곳에 있는 것일까?
“아버지 말이 안 들려?”
석목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남자는 더 심각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목이가 오늘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 그만 혼내요.”
여인이 석목의 앞으로 다가가며 말렸다.
“뭐? 몸이 아프다고? 마을의 오 의원한테 가봤어?”
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표정이 살짝 굳으며 석목의 손을 잡았다. 뜨거운 기운이 몰려와서 석목의 몸속으로 퍼졌다.
석목의 심경은 복잡해졌다. 아버지는 엄격하긴 해도 진심으로 그를 걱정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저녁을 먹은 뒤 남자는 의원을 데려오겠다며 마을 밖으로 갔다. 그리고 여인은 서둘러 물을 데워서 석목의 몸을 닦아주었다.
이런저런 일을 마치니 밤이 되었고, 다들 잠자리에 들었다.
석목은 누워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서 그의 눈이 빨개졌다.
석목이 고향을 떠나 고생스럽게 수련을 하는 이유는 모두 어머니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렸을 때 그의 꿈은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가정을 꿈꾸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집을 나가면서 그 꿈은 사치스러운 게 되어버렸다.
석목은 이 모든 것은 환상이고, 단지 아름다운 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환상을 깨버리지 못했다.
석목은 일어서서 천천히 집밖으로 나갔고, 그는 눈빛을 반짝이면서 긴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 * *
세월이 빠르게 흘렀고, 석목은 이 작은 마을에서 열흘을 넘게 보냈다.
아버지는 동이 트기 전에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갔고, 가끔 석목에게 권법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집안일을 도맡아 했는데, 집안 살림은 항상 알뜰했다.
세 식구는 그렇게 행복한 일상을 이어갔다.
석목은 그 속에 빠져들었고, 점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루는 석목이 문 앞에 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마당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모든 걸 잘 기억해두려 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이어 한 청년이 초조한 기색으로 나타났다.
“형수님, 큰일 났어요! 석 형이 사고를 당했어요. 바다에서 해수를 만나 배가 부서지고 큰 상처를 입었어요. 주자네 배가 발견하고 구하긴 했는데…….”
청년이 다급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안색이 어두워지며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빨래통이 엎어져 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그는 지금 어디 있어요?”
“지금 바닷가에 있어요. 빨리 가보세요.”
청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목의 어머니는 마당에서 뛰쳐나가서 바닷가로 향했다.
“목아, 너도 빨리 가봐라. 네 아버지,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청년은 문턱에 앉아 있는 석목에게 한 마디를 던지고 다시 해변으로 뛰어갔다.
석목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는 눈을 반짝이더니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천천히 바닷가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사람들 속에서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가 땅에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린 채였고, 복부에 난 커다란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옆에서 한 노인이 약초를 상처에 바르며 지혈하려 애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고 있었는데, 그 울음에는 절망과 슬픔이 가득했다.
주위 사람들도 전부 슬픈 얼굴로 서 있었고 몇몇 여인은 눈물을 훔쳤다.
“목아…….”
아버지가 석목을 바라보며 몸을 움직여 손을 들려고 했다.
석목은 급히 아버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목아, 이 아버지는 힘들 것 같다. 앞으로 네 어머니를 잘 보살피거라……. 너는 석 씨 가문의 사나이다. 꼭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
아버지는 곧 숨이 끊길 듯 힘겹게 말을 이었다.
석목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리고 눈에서 차가운 빛을 뿜어내며 손을 높이 들었다.
한줄기 금빛이 그의 손에서 날아갔다. 빛은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몸을 단번에 뚫어버렸다.
“목아, 너 왜 이러는…….”
어머니는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감정이 북받쳐 올랐지만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 그만하세요. 분명히 정곡을 찔렀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있어서 가장 약한 부분이 맞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생하다 해도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는 법이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석목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순간 어머니의 모습이 검은 연기로 변해버렸고, 주변의 모든 것도 부서져서 사라졌다.
석목의 눈앞이 희미해지더니 다시 검은 길이 나타났다. 그의 몸 절반 정도가 하얀 문에 걸쳐 있었는데, 아직 안으로 발을 내딛지는 않았다.
난생 처음 느끼는 편안함이 몰려왔다. 열여덟 번의 환상이 그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무언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커다란 돌덩이가 사라진 것 같았고, 무언인가를 깨달은 듯한 느낌이 몰려왔다.
그는 다시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하얀 문 속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