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441화 (441/916)

441화. 성금(圣禽)

“이것은……?”

석목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것은 천년계인(千年界印)이다. 성지의 이 층 구역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통행증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묵란이 말했다.

석목은 현영벽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옥벽에 새겨진 천년계인의 특수한 기운을 느끼고 기뻐했다.

“그리고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너는 황계 구역에서 수련한지 아직 백 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기존의 백년 제자 신분도 똑같이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원래 너를 따르던 시종들을 데려갈 것인지 말 것인지는 네가 결정하면 된다. 전부 현계 구역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하지만 네가 머물던 영지와 동부는 전부 회수될 것이다.”

묵란이 말했다.

“장로님, 감사합니다.”

“감사의 말은 필요 없다. 능풍, 그런데 너는 성격이 너무 조용하구나. 사제가 너를 초월해버렸으니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묵란이 몸을 돌리더니 능풍을 향해 말했다.

“묵란 장로님, 아시다시피 저의 검도는 마음의 수련을 중요시하기에, 다급해하거나 초조해하면 안 됩니다. 일이십 년 더 기다렸다가 천년 제자로 진급해도 제게는 늦은 게 아닙니다.”

능풍이 손을 흔들며 담담하게 말했다.

“허허, 그래. 나도 게으른 성격이라 이해는 한다. 그렇지 않다면 너와 이렇게 가까이 지낼 수 없지 않겠느냐. 이제 됐다. 석목은 동부로 돌어가서 해야 할 일이 많은 듯하니, 이제 돌아가거라.”

묵란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네, 제자 물러나겠습니다.”

두 사람은 일어나서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현영탑을 벗어난 석목과 능풍은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동부로 날아갔다.

석목은 동부에 도착하자마자 문밖으로 걸어 나오던 제풍과 부딪쳤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고민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부주님, 용서하십시오.”

제풍은 부딪친 사람이 석목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괜찮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느냐?”

석목은 궁금한 듯 물었다.

“부주님, 부주님께서 환마도의 시험을 통과하고 곧 이곳을 떠나 성지의 이 층으로 들어가시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미리 시종들에게 분부해서 영지에서 수확 가능한 영초와 영재들을 모으고, 오늘 안에 전부 통류방에 팔아버리라고 했습니다. 동부의 재무 상황은 정리해서 최대한 빨리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제풍은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석목은 이내 그가 고민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마도 자신이 떠난 후 성지의 일 층에서 어떻게 지내야 할지 생각이 많은 듯했다.

“그래, 잘했다. 재무 관련 자료를 정리한 다음에 동부에 있는 시종들의 명단을 만들도록 해라. 현계 구역으로 들어갈 때 단 한 명도 빠트려서는 안 된다.”

석목이 말했다.

“부주님……. 그 말씀은 저희도 함께 이 층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까?”

제풍은 뚱뚱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우선 해야 할 일부터 마무리하거라. 현계 구역으로 가면 아마 더 많은 일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네!”

제풍은 기뻐하며 대답한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갔다.

* * *

이틀 뒤 석목의 동부 대실.

제풍 등 몇몇 관사가 손에 장부를 가득 들고 한쪽에 공경한 자세로 서 있었다.

“동부의 장부 내용은 따로 확인하지 않겠다. 몇 년 동안 고생 많았다. 자세한 부분은 제풍이 알아서 하도록 하고, 내일 모두 함께 성지의 이 층으로 옮길 것이다.”

석목이 분부했다.

“네, 부주님.”

제풍 등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때 대실 밖에서 시종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서 몸을 굽히며 말했다.

“부주님, 마옥 부주님이 뵙고자 하십니다.”

“마옥 사매가? 들어오라고 해라.”

석목이 말했다.

잠시 후, 붉은 옷을 입은 마옥이 마열을 데리고 들어왔다.

“석 사형.”

마옥과 마열이 인사를 올렸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석목은 두 사람을 대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석 사형, 채아는 왜 보이지 않나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마열은 첫마디부터 채아를 찾았고, 석목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밖에서 채아의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 어르신을 찾는 거야?”

곧이어 채아가 날아와서 석목의 어깨에 앉았다.

“채아, 나다.”

마열이 웃으며 말했다.

“나랑 잘 아는 사이야? 채아 어르신이라고 불러라.”

채아는 고개를 쳐들고 마열에게 면박을 주었다.

마열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며 어색하게 마른기침을 두 번 했다.

“채아, 이제 그만 놀려.”

마옥이 다급하게 수습했다.

“그래, 마 누님이 저렇게 말하니 더 따지지 않을게.”

마열과 비교하면 마옥에 대한 채아의 태도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채아는 날개를 퍼덕이며 마옥의 어깨에 앉아서 알랑거렸다.

“마 누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세요.”

채아의 눈이 마옥의 손에 있는 저장 반지로 향했다. 그러자 마옥이 피식 웃더니 상급 영석을 꺼내 채아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채아는 눈을 빛내며 바로 영석을 입에 물고 씹었다.

석목은 채아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채아, 어디 갔다 왔어?”

“나? 영천에 갔었어. 우리는 이제 여길 떠나니까, 아직 조금 남아 있는 화정백을 낭비하면 아깝잖아.”

채아가 영석을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했다.

“그럼 또 사람들을 데리고 화정백을 잡으러 갔던 거야?”

석목이 물었다.

“그렇다니까. 한 번에 다 잡았어. 하나도 안 남기고 말이야.”

채아가 영석을 꿀꺽 삼키며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그럼 화정백은?”

석목은 그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물어보나마나 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다 내 뱃속에 있지.”

채아가 날개를 퍼덕이더니 볼록 나온 배를 툭툭 치며 말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마옥과 마열은 그 모습을 보며 소리 내서 웃었다.

“참, 이렇게 다 찾아오시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석목이 마옥을 바라보며 물었다.

“십년 대결이 끝날 때 석 사형이 저와 약속을 하신 것을 기억하시나요?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겠다고 하셨잖아요.”

마옥이 말했다.

“그럼요. 물론 기억합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마옥은 그 말을 듣자 바로 입을 열지 않고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말을 꺼냈다.

“저희가 채아를 데려갈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멈칫했지만, 잠시 후 느긋하게 말했다.

“제게 있어서 채아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부탁은 들어드리기 어렵습니다.”

채아도 한참 멍해 있다가 날개를 퍼덕이며 석목의 어깨 위로 날아가서 말했다.

“내가 잘생기고 기개도 범상치 않으니 우러러보고 숭배하는 것은 알겠는데, 내게는 석두라는 주인이 있어. 너희와 같이 가지는 않을 거야.”

마옥은 석목이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다급하게 말했다.

“석 사형, 오해하지 마세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실은 보여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그녀는 저장 반지에서 손바닥만 한 붉은 자갈을 꺼내 석목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것은 저희 종족의 정혈이 들어 있는 적화석(赤火石)입니다.”

마옥이 설명했다.

이어 그녀의 손바닥에 있는 적화석이 붉은빛을 뿜어냈다. 잠시 후 마옥이 자신이 피 한 방울을 적화석에 떨구었다.

훅!

마옥의 손바닥에 있던 자갈에서 화염이 번졌다. 그러더니 불의 막을 형성하여 유유히 허공에 떴다.

그걸 본 석목의 눈빛이 반짝였다.

곧이어 붉은 불의 막 속에서 커다란 새의 허영이 나타나서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석목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어깨 위에 있는 채아를 바라보았다.

불길 속 새의 허영은 채아와 매우 닮았는데, 마치 채아를 몇 배쯤 크게 확대해놓은 것 같았다.

“이것은…….”

석목이 물었다.

“저희 종족이 대대로 모시고 있는 성금(聖禽)입니다. 아마도 채아와 같은 혈맥을 가졌을 것입니다. 혹은 채아가 저희 성금의 후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옥이 설명했다.

석목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새의 허영과 채아를 여러 차례 번갈아 보았다. 채아가 그 성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채아도 평상시와 달랐다. 그는 석목의 어깨에 가만히 앉아서 화염 속의 새 허영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석목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의 말은, 채아를 데려가서 조상이라도 만나게 하겠다는 것인가요?”

“석 사형, 저희 종족의 성금은 성계 경지의 존재지만, 실은 이미 수만 년이나 넘게 살아서 수원(寿元)이 곧 사라집니다. 저희 종족은 곧 성금의 보호를 잃게 되리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저와 마열이 성지에서 석 사형과 채아를 만나게 된 겁니다.”

마옥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당신들 종족 성금의 수원이 사라지는 것이 채아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채아가 성금을 살리기라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석목이 물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성금의 수원이 사라지는 것은 기정사실에요. 하지만 채아를 데려갈 수 있다면 성금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이어받을 수 있고, 그 본래의 혈맥도 각성시킬 수 있습니다.”

마옥이 말했다.

“채아 본래의 혈맥이요? 채아는 건앵(亁鹦: 앵무새) 일족이 아닌가요?”

석목이 의아한 듯 물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앵무새가 아닌, 황족 앵무새입니다. 처음에는 저도 잘 알지 못했는데, 채아가 영석을 삼킬 수 있고 또 화정백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확신이 생겼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종족에게 알려서 최종 확인을 받았습니다.”

마옥이 설명했다.

석목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성금이 각성한 후 꼭 종족에 계속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마옥은 석목이 대답하지 않자 계속 설명했다.

“이 일은 제가 섣불리 결정할 수 없군요. 채아는 저의 영총이지만 노예는 아닙니다. 당신들에게 갈 것인지의 여부는 채아의 결정에 맡기죠.”

석목이 말했다.

마옥은 그 말을 듣고 무엇인가 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때 채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석두, 저 화염 속의 커다란 짐승이 나랑 미묘하게 연결돼 있는 것 같아. 나를 소환하고 있는 것이 느껴져. 그들을 따라서 가봐야겠어.”

“네가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면 다녀와.”

석목은 매우 아쉬웠지만 강제로 채아를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찌되었든 마옥을 따라가면 채아에게도 좋은 점이 훨씬 많을 것이었다.

“석 사형,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형은 저희 종족의 은인이십니다. 이곳은 저희 종족이 사는 행성이니 나중에 언제든 찾아오세요.”

마옥과 마열이 석목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옥이 그에게 옥간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 없습니다. 저도 채아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습니다. 언제 돌아갈 건가요?”

석목이 옥간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마열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

“석 사형, 실은 종족에서 어제 소식을 보냈는데, 저희 성금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채아를 데려가야 할 것 같아 바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빨리요?”

석목이 놀라서 말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습니다. 부디 이해해주세요.”

마옥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이해는 합니다.”

석목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석두, 아니면 나랑 같이 가자.”

채아가 갑자기 말했다.

“바보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잖아.”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일 끝나면 바로 나를 찾으러 와야 해. 어쨌든 신식의 연결도 끊기지는 않을 테니까.”

채아가 말했다.

“그래.”

석목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마열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석 형이 동의했으니 그럼 저희는 바로 떠나겠습니다.”

석목은 그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마열은 그가 후회하기 전에 빨리 채아를 데려가고 싶은 것이었다. 석목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언짢았다.

마옥도 마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기에 바로 그를 꾸짖었다.

“마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석 사형과 채아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잠시 나가자.”

그녀는 석목을 향해 손을 모으더니 마열을 끌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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