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458화 (458/916)

458화. 방가의 은인

순간 석목의 눈이 반짝였다. 금색 갑옷의 거인 법상이 왠지 눈에 익었지만, 어디에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금오귀가 손에 든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켰고, 금색 갑옷의 거인이 앞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그의 두 눈에서 핏빛이 번졌고, 격하게 소용돌이치는 핏빛 안개가 뿜어져 나와서 피안개의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막을 수 없는 강한 흡입력이 그 안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공기가 수축하는 것 같았다. 석목은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그쪽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그는 손에 든 곤봉으로 땅을 내리찍어서 간신히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방박정이 두 손으로 회색빛의 막을 드리워서 흡입력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빛의 막은 잠깐 사이에 그대로 터져버렸고, 방가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일고여덟 명이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서 갈가리 찢겨버렸다.

“큰일이다! 뒤로 물러나라!”

방박정이 낮게 소리를 지르며 소매를 흔들었다. 그러자 방정덕과 방정해 형제를 포함한 사람들이 수십 장 멀리까지 날아갔다.

그러나 조금 늦게 반응한 사람들은 흡입력에 이끌려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십여 명의 사람을 삼킨 채찍은 이제 완전히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금오귀가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채찍이 허공으로 튕겨 날아가면서 두 피안개의 소용돌이 사이에서 꼿꼿하게 펴졌다.

그러자 피안개가 동시에 가운데로 몰려오더니 한 개로 합쳐졌고, 십 장 정도 되는 해골의 머리로 변했다. 그 해골의 머리는 입을 벌리고 석목을 향해 괴성을 질렀다.

석목은 그 소리에 귀가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주변의 힘은 수십 배나 더 강력해진 것 같았다. 그가 몸을 의지하고 있는 여의곤이 땅에 깊은 자국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석목은 끌어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피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퍽!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해골의 입으로 들어갔다.

해골의 입 속은 온통 끈적끈적했다. 수십 갈래의 핏줄기가 혈침처럼 가볍게 석목의 몸을 찌르며 순식간에 피를 빨아들였다.

“아!”

허공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석목마저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본 방박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궐잔검을 꽉 쥐었다.

“방가는 이제 끝이로구나…….”

그런데 그 순간, 피 안개로 만들어진 해골 안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뒤를 이어 검은 곤봉의 그림자가 잔뜩 나타났다.

석목이 곤봉을 휘두르자 그 속에서 강한 파멸의 힘이 흘러나왔다.

금오귀는 순간 긴장해서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마치 천지의 모든 영력 원기가 전부 봉쇄된 듯했다.

이어서 커다란 흑백 곤봉이 허공에 나타났다.

금오귀의 두 눈에서 두려운 기색이 스쳤고, 그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허공으로 떠올랐다.

“안 돼! 나를 죽이면 영원히 후회하게 될 것이야!”

금오귀가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나 석목은 후회라는 글자를 쓸 줄도 모른다.”

석목이 말했다. 그리고 눈에서 금빛을 뿜어내며 손에 들린 곤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하얗고 검은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그림자가 밀려왔다.

금오귀는 큰소리로 울부짖으며 마지막 남은 법력을 전부 시전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금색 갑옷의 거인, 그리고 앞에 있는 핏빛 해골이 빛을 뿜어내며 온 힘을 다해 흑백의 빛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석목이 뿜어낸 하얗고 검은 빛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점점 중간을 향해 좁혀갔다. 그것들은 마치 두 개의 맷돌처럼 빙글빙글 돌며 마찰하고 있었다.

“아악!”

소름 돋는 마찰음과 함께 처절하게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금색 갑옷의 거인 법상과 핏빛 해골이 순식간에 해체됐고, 금오귀의 몸도 짓눌려서 피 안개로 변해버렸다.

흩날리는 핏빛 속에서 석목이 번쩍이며 땅에 내려왔다.

그는 빛을 거두자마자 비틀거렸다. 진기를 상당히 소모한 것 같았다.

그는 여의곤으로 땅을 짚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방박정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방정덕이 눈치 빠르게 상처를 치료하는 단약을 석목에게 건넸다.

석목은 신식으로 그 단약을 한 번 훑어본 후 입에 넣었다.

단약을 삼키자 따뜻한 기운이 몸속에서 흐르면서 순식간에 정신이 들었다.

“석 도우, 우리 방가를 위해 배신자 금오귀를 죽였으니, 석 도우는 방가의 은인입니다. 절을 받으시오.”

방박정이 감사한 마음으로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가주가 절을 하자 그 뒤에 있던 가문의 사람들도 전부 몸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아마 석목이 아니었더라면 방가는 금오귀의 음모에 의해 벌써 파멸했을 것이고, 석목이 아닌 다른 제자가 왔더라면 금오귀의 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방 가주님, 괜찮습니다. 제가 이렇게 한 것도 저희가 한 약조 때문입니다.”

석목은 체력과 진기를 조금 회복한 후 여의곤을 거두며 말했다.

“석 도우, 우선 안으로 들어가 잠시 쉬도록 하십시오. 저녁에 연회를 열어서 석 도우를 제대로 모시겠소.”

방박정이 말했다.

“방 가주님의 성의는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저는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오래 머무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음……. 그렇다면 나도 억지로 권하지는 않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바로 약속한 것을 가져오리다.”

방박정은 방정해 형제에게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이른 뒤, 고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가부좌를 튼 자세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방박정이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반듯한 걸음으로 나왔다. 다만 망가진 얼굴만은 여전히 추악했다.

그가 석목에게 다가와서 아름답게 장식된 긴 나무상자를 건네주었다.

석목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상자를 받아 열었다. 그러자 짙은 약의 향기가 코끝으로 몰려왔다. 나무상자 안에는 손바닥만 한 화삼이 들어 있었다.

화삼은 전체가 짙은 붉은 색을 띠고 있었고, 마치 노인의 주름 같은 깊은 골이 줄줄이 나 있었다. 천년 화삼이었다.

그리고 화삼 옆에는 검은 옥간도 놓여 있었다.

석목은 옥간을 손에 쥐고 기운을 잠깐 느껴보았다.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은 매우 현묘한 물 속성의 공법이었다. 지금은 자세히 읽어 볼 수 없었지만, 방박정도 감히 가짜를 내놓아서 그를 속이지는 못할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석목은 나무상자를 저장 반지에 넣었다. 그리고 방가 사람들에게 손을 모아 인사했다.

“석 도우, 잠시만 기다리시오. 이것도 우리의 마음이니 부디 불쾌하게 생각하지 말고 받아주십시오.”

방박정이 영석이 불룩하게 들어 있는 큰 주머니 한 개를 건네며 말했다.

석목은 잠깐 망설였지만 그 주머니를 받아서 저장 반지에 넣었다.

“혹시 나중에 벽파성에 올 일이 있으면 꼭 우리 방가보에 들러주시오. 그때 제대로 된 대접을 하리다.”

방박정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석목은 곧바로 청익비차를 불렀고, 한줄기 푸른빛이 되어 하늘을 날아갔다.

* * *

방가를 나온 석목은 벽파성에서 더 머물지 않았다.

이틀 후 석목은 다시 전송진에 나타났고, 청란성지로 돌아왔다.

그는 곧바로 백진곡과 선약재에 들러 여러 가지 보조 재료를 샀다. 그리고 동부의 비밀 석실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갔다.

칠 일 뒤, 동부 비밀 석실 안에 있는 석목의 앞에는 작은 옥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수가 모두 수십 개는 되었다.

옥병에 담겨 있는 것은 전부 그가 만들어낸 영액이었다.

석목이 옥병 하나를 꺼내 들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붉은색 액체가 들어 있었다. 석목은 향기를 풍기고 있는 액체를 목을 뒤로 젖히며 단숨에 삼켜버렸다.

액체가 입과 목구멍을 지나 단전으로 흘러들어가자 따뜻한 기운이 몰려왔고, 온몸에서 시원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어 석목은 두 눈을 감고 적원화경 십이 단계의 공법 구결을 시전하였다.

석목의 중얼거림에 따라 그의 온몸에 드리운 붉은빛이 점점 밝아졌다. 그것은 서로 얽히고설키며 희미한 원형을 만들어냈다.

하루가 지나자 희미한 원형을 감싸는 붉은 띠가 나타났다.

석목은 천천히 눈을 뜨더니 또 다른 옥병을 들어 영액을 들이마셨다. 잠시 후, 약효에 의해 몸의 붉은 빛이 더 강해졌다.

또 하루가 지나자 띠가 한줄기 더 나타났다.

석목은 이번에도 눈을 뜨고 세 번째 영액을 들이켰다.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총 사십구일이 지났다.

비밀 석실 속에서는 불빛이 번쩍였고 화염이 들끓었으며, 온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까지 높아져 있었다. 허공이 이글거리며 물결을 만들어냈다.

석목은 비밀 석실의 중앙에서 웃통을 벗은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의 몸은 마흔아홉 개의 붉은 띠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원형으로 감싸여서 표면에서 빛을 반짝였다.

그의 입은 여전히 주문을 외우는 중이었는데 몸에 둘러진 붉은 띠는 천천히 맴돌고 있었는데, 그 광경이 매우 기이했다.

“음?”

순간 석목은 주문을 멈추고 낮게 소리를 냈다.

그러자 천천히 돌고 있던 붉은 띠가 빛을 뿜어내더니 다시 몸의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띠는 몸속의 근맥을 따라 흐르더니 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곧이어 석목의 얼굴 근육이 파르르 떨렸고, 참지 못할 정도의 고통이 갑작스럽게 밀려왔다.

단전 기복에서 마흔아홉 갈래의 영문이 엉켜 원형을 이루었다. 액체 같던 진기가 어떤 붉은 원형 속에 금제된 것 같았다.

이 붉은 영문들은 공의 겉면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한 바퀴 돌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면서 그 속의 진기도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영문이 흐르는 속도도 많이 줄어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석목의 안색은 나빠졌고, 콩알 같은 굵은 땀방울이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그의 모습은 점점 더 고통스러워보였다.

잠시 후, 아이 주먹 크기만 하던 단전의 붉은 공이 용의 눈알만큼 작아졌다. 그 표면을 둘러싼 마흔아홉 개의 영문이 마치 혼연일체가 된 것 같았다. 그 속의 진기의 온도는 매우 높았다.

석목은 조금씩 몸의 긴장이 풀리며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사라졌고, 곧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두 눈을 번쩍 뜨더니 금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다는 듯 통쾌하게 소리를 질렀다.

“하-앗!”

석목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화염이 활활 타오르더니 용처럼 튕겨 나갔고, 그것은 회오리가 되어 그의 몸에 감겨 있었다.

그가 입을 크게 벌리자 타오르던 화염 회오리가 꺼졌고, 전부 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 석목의 등 뒤에 붉은 원숭이 법상이 나타나더니 빛을 크게 뿜어냈고, 화염에는 금색이 은은하게 섞여 있었다.

석목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두 눈에서 금빛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몸의 기운이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그때 그의 단전에서 드디어 가단이 응결되었다. 지계 대원만의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단전 속의 기부가 용의 눈알만 해졌고,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진기는 기존보다 두 배 정도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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