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7화. 추궁하다
허공에서 천지무극이 서서히 사라졌다.
빛이 흩어지자 석목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린 채, 손에 최상급 영석을 쥐고 빠르게 진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구영흉수의 잘린 머리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흉수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여덟 개의 머리가 울부짖었고, 웅장한 몸이 또다시 석목을 덮쳐왔다. 번개, 광풍, 화염, 폭우 등등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석목은 날개에 아주 옅은 하얀빛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것은 붉은 화염 속에 섞여서 눈에 띄지 않았다.
그가 날개를 펄럭이자 몸이 순식간에 십여 장 거리까지 이동하면서 구영흉수의 공격을 피해냈다.
“호시출납!”
석목이 낮게 소리를 지르더니 손에 든 여의빈철곤을 휘둘렀고, 곤봉에서 나온 붉은빛이 호랑이로 변하여 구영흉수를 향해 날아갔다.
양쪽은 서로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허공에서 치열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비록 구영흉수의 수련 경지가 더 높았고 또 다양한 비술을 사용했지만, 토템 비술로 몸을 보호한 데다 놀라운 곤법을 사용하는 석목도 싸워볼 만했다.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강수수의 눈에서 복잡한 기색이 어렸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새 일 주향(향 한 개가 탈 시간, 약30분)의 시간이 흘렀다.
허공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영흉수가 입을 크게 벌리자 굵은 번개가 수도 없이 뿜어져 나왔고, 석목은 한참 동안 피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석목은 곧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안색이 매우 어두워졌다. 그가 간신히 잘라낸 구영흉수의 머리 한 개는 또다시 자라 있었다.
그제야 석목은 야사에 기록된 구영흉수가 절대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을 알 것 같았다.
구영흉수가 소리를 지르며 다시 한 번 석목을 덮쳤다.
그때 긴 호흡의 피리소리가 어디선가 흘러나왔다. 곧이어 눈부신 번개가 날아오더니 순식간에 근처에 도착했다. 바로 조극이었다.
조극을 본 석목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와 석목은 별다른 접점이 없었지만, 지금은 같은 입장이라 힘을 합치면 구영흉수와 싸워볼 만했다.
영영과는 총 세 개가 있고, 이곳에 있는 사람도 세 명이니 각각 한 개씩 나눠가지면 될 듯했다.
석목은 강수수 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조극이 나타난 것을 보자 그녀의 입가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지만, 그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석목은 그녀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녀는 조극과 원한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가 나타나니 오히려 좋아하는 것 같았다.
‘도와줄 사람이 나타나서 구영흉수를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건가?’
조극은 영영과 나무에 열린 세 개의 영영과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하지만 곧이어 구영흉수를 알아보고 눈가가 살짝 떨렸다.
“조 사형, 빨리 오셨군요. 다만 저 영영과를 가지려면 어려움이 조금 있을 것입니다.”
석목이 몸을 번쩍이며 조극의 옆으로 날아왔다.
조극은 석목을 보더니 단번에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대답했다.
“좋습니다. 함께 힘을 합쳐 흉수를 죽이고 영영과는 똑같이 나누어 가집시다.”
석목은 강수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때마침 영양과가 세 개 있으니 앞서 약속한 대로 한 개씩 가지도록 하죠.”
그러자 조극이 곁눈질로 강수수를 슬쩍 바라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저 여자 말입니까? 고작 저 정도 실력으로 영영과를 가질 자격이나 있습니까?”
그러나 강수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말했다.
“조 사형 말이 맞습니다. 저 따위는 두 분과 비교도 할 수 없지요. 영영과는 두 분이서 나눠 가지십시오.”
조극은 차갑게 웃더니 강수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강수수의 말을 들은 석목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더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구영흉수가 울부짖으며 덮쳐 왔기에 싸움에 집중해야 했다.
“조 사형, 조심하십시오. 이 흉수는 강하기 그지없습니다. 머리가 잘려도 일 주향쯤 시간이 흐르면 다시 자라납니다. 죽이려면 아마도 일주향 이내에 아홉 개의 머리를 전부 잘라내야 가능할 겁니다.”
석목이 다급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조극이 머리를 끄덕이며 낮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에서 검은 햐얀 빛이 뿜어져 나왔는데, 그것에서는 뜨거운 기운과 차가운 기운이 동시에 느껴졌다. 하지만 서로 상극인 그 두 가지 기운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로 조화된 것 같았다.
그것을 본 석목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조극은 이미 구전현공의 세 번째 단계를 끝낸 듯했다.
구영흉수가 달려들자 조극이 큰소리를 지르더니 몸을 날려 공격하려 했다.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조극은 깜짝 놀라서 몸을 옆으로 날려 피하려 했지만, 강력한 힘에 허리를 강타당하며 앞으로 날아가 버렸다.
“강 사매, 당신…….”
석목이 안색이 변하서 소리를 질렀다.
조극을 습격한 사람은 바로 강수수였다.
그녀의 손에는 반투명한 긴 채찍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 조극을 공격한 무기였다.
조극은 앞으로 날아가서 구영흉수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그러자 구영흉수의 머리 하나가 비린내를 풍기며 입을 크게 벌리더니 그대로 그를 물어버리려 했다.
조극은 안색이 변하더니 몸을 굽혀 간신히 흉수의 입을 피했다. 그리고 낮게 소리를 지르며 주먹을 날렸다.
검고 햐안 한줄기 빛기둥이 날아가서 구영흉수의 몸을 때렸다. 그러자 구영흉수의 거대한 몸이 몇 장이나 튕겨 날아가 버렸다.
한편 강수수의 얼굴은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차갑고 매서운 빛이 흘렀고, 방금 전의 연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가 두 손을 흔들자 주변의 땅이 벌어지더니 그 속에서 십여 개의 하얀 돌기둥이 나타났다. 그것은 빛을 뿜어내며 단번에 커다란 계란형 빛의 막을 만들어내서 조극과 구영흉수를 안에 가두었다.
구영흉수에게 달려들던 조극의 몸이 빛의 막에 강하게 부딪혔다. 빛의 막은 격하게 흔들리며 물결치다가 이내 원래의 모양으로 회복됐다. 그걸 보니 매우 단단한 게 틀림없었다.
구영흉수는 빛의 막은 신경도 쓰지 않고 조극을 덮쳐왔고, 순간 조극의 표정이 굳어졌다.
조극의 손에서 자색 빛이 번쩍이더니 자색 도끼가 나타났다. 그는 도끼의 그림자를 줄줄이 만들어내며 구영흉수와 싸우기 시작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석목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하지만 다행히 그는 먼 곳에 있었기에 빛의 막 속에 갇히지 않았다.
그는 강수수 쪽을 본 뒤, 그녀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수십 장 정도를 날아갔다.
석목을 바라보는 강수수의 눈에서 기이한 빛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빛의 막을 바라보았다.
“구영, 잠깐 멈춰라!”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그러자 빛의 막 속에서 조극과 싸우고 있던 구영흉수가 갑자기 멈추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조극 뿐만 아니라 석목도 깜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조극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구영흉수와 싸우는 동안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적지 않은 원기를 소모한 탓이었다.
그는 단약을 한 알 꺼내 삼키고는 석목과 강수수를 바라보며 눈을 차갑게 반짝였다.
“좋아……. 너희 둘, 이런 식으로 나를 가둬버린 의도가 뭐야?”
석목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온갖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났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수수를 바라보았다.
“조극, 백원왕의 행방을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오늘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
강수수가 차갑게 소리를 질렀다.
“백원왕?”
그 말을 들은 석목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백원왕? 흥! 아직도 듣지 못한 거냐? 청란성지에 있는 백원왕의 혼등은 이미 꺼졌다. 그는 죽었어.”
빛의 막 속에서 조극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다시 한 번 놀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극에게 놀란 것이었다.
그는 백원왕의 혈맥을 가지고 있는 후예였다. 하지만 그의 언사에는 백원왕에 대한 존경심은 조금도 없었다.
“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 내가 묻는 건 너희 선조의 시체가 어디 있냐는 거다. 백원왕의 후예이니 모른다고는 하지 마!”
강수수가 다시 차갑게 소리를 질렀다.
조극은 강수수를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렇군……. 어쩐지 이 비경을 발견할 당시 너의 행동이 이상하다 싶었지. 일부러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건가? 십 년 동안 이런 걸 준비해놓고 고작 백원왕의 행방을 궁금해 하는 거냐?”
“맞아. 내가 청란성지에 들어온 것도 백원왕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야. 그런데 백원왕의 후예인 네놈을 만나게 되다니, 하늘이 도운 셈이지.”
강수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큰 소리로 웃었다.
이어 그녀가 몸에서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러자 하얀 이마에 비뚤비뚤한 무늬가 떠올랐는데, 매우 신기하게 생긴 그림이었다.
조극은 그 그림을 보더니 갑자기 안색이 굳어지며 소리쳤다.
“그 그림은……. 네년은 와요족(娲妖族)이군! 백원왕을 찾는 이유가 뭐야!”
“흥! 우리 종족의 요왕 강북도가 수천 년 전 갑자기 사라져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찾아본 결과 요왕의 실종이 백원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
강수수의 말을 듣는 순간 석목의 안색이 급변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다니…….’
그의 머릿속에서 번천곤 금제 속에서 만났던 요족 청년의 신혼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직접 백원왕을 찾아라. 나는 그의 행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안다고 해도 말해줄 이유가 없다.”
조극이 말했다.
“조극, 넌 지금 내 손바닥 안에 있어.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네가 청란성조의 직속 제자든 뭐든 죽여 버릴 거야!”
강수수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그녀가 냉랭한 말투로 소리쳤다.
“날 죽인다고? 고작 이 구영흉수로? 하하하! 그럼 어디 해봐!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굴 무서워해 본 적이 없어!”
조극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곧이어 그의 몸에서 하얗고 검은 빛과 함께 흉악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흩날리는 빛 속에서 흉악하게 생긴 거대 원숭이의 허영이 나타났다. 그 허영은 한 쌍의 금빛 눈으로 구영흉수를 노려보았다.
구영흉수가 낮게 소리를 지르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그러자 강수수는 안색이 변하더니 고개를 돌려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 사형, 이 조극 놈은 석 사형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놈이니, 힘을 합쳐서 이놈을 죽여 버립시다. 일이 마무리되면 저 영영과 세 개는 전부 석 사형에게 드리겠습니다.”
강수수의 제안을 들은 석목은 안색이 변하더니 고개를 돌려 조극을 바라보았다. 조극은 두려운 기색 없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석목과 눈이 마주친 조극이 실쭉 웃더니 말했다.
“석 형, 그 정도로 단순한 사람은 아니겠지요? 당신이 야만족의 토템 비술을 몸에 지니고 있는 걸 강 사매도 다 알고 있을 텐데?”
“야만족?”
석목은 흠칫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 사매는 백타성 강 씨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강 씨 가문이 소속된 와요족은 고대의 대종족이지요. 와요족과 야만족은 옛날부터 원수지간이라 마주치기만 해도 피를 보게 되지요. 혹시라도 저 여자가 정말로 석 형을 놓아줄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함께 나를 죽여 버리고 그다음 차례는 당신일 텐데.”
조극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들은 석목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번천곤의 금제 속에서 강북도가 야만족을 언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석목이 야만족의 후손이라면 더욱더 죽여 버려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도 생각났다.
그는 강수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눈빛이 살짝 변한 것이 느껴졌다.
“조 형,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인족이지 야만족이 아닙니다. 토템 비술은 제가 우연히 배운 비술일 뿐입니다. 그리고 상황을 보니 둘 사이의 문제인 듯합니다. 제가 끼어 들 자리가 아닌 것 같으니, 이곳에 더 머물지 않고 먼저 가보겠습니다.”
석목은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하, 석 사형. 이제 와서 도망간다고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강수수가 갑자기 깔깔 웃기 시작했다.
“내가 가고 싶다는데 당신이 날 막을 수 있을까요?”
석목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때 허공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동생은 막지 못하겠지만, 저는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