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488화 (488/916)

488화. 긴급 소집

같은 시각 은월전함의 다른 한쪽, 석목과 싸우고 있는 흑마일족의 검은 갑옷은 이미 심하게 파손되어 있었다.

이어 석목이 손에 든 곤봉을 흔들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흑마일족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흑마일족은 곤봉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고, 그의 목젖과 얼굴 부위에 새겨진 마문에서 갑자기 금빛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의 몸 전체가 금물을 한층 뒤집어쓴 듯 황금빛을 뿜었다.

퍽!

여의곤이 검은 갑옷을 입은 흑마일족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석목은 곤봉을 든 팔에서 엄청난 힘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고, 팔이 마비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흑마일족은 머리가 옆으로 살짝 꺾이기만 했을 뿐, 석목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의 커다란 손이 단번에 석목을 덥석 잡았다.

피하지 못하고 팔을 붙잡힌 석목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인족 놈, 죽어버려라!”

검은 갑옷을 입은 흑마일족의 입가에 흉악한 웃음이 어리더니, 손에 힘을 주어 석목의 팔을 부러트리려 했다.

그러나 그가 온 힘을 다해 쥐어짜도, 예상했던 것처럼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뭐지?”

그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석목의 오른쪽 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석목의 손바닥과 손목은 이미 칠흑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흑마일족의 얼굴에서 놀란 표정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얗게 변한 석목의 다른 한쪽 손바닥이 그의 목을 잡고 왼쪽으로 힘껏 비틀었다.

뿌드득!

무엇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갑옷을 입은 흑마일족의 머리가 힘없이 한쪽으로 꺾였고, 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검은 안개의 마혼이 흑마일족의 두개골에서 유유히 떠올라서 석목의 마혼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시체를 던져버린 석목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흑마일족의 과반수는 성지 연합의 제자들에 의해 죽어버린 뒤였다.

상대적으로 성지 연합의 손실은 크지 않았지만 일계술사가 한 명이 큰 부상을 입었고 지계 제자 몇 명이 죽었다. 그리고 석목 소대에서도 한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석목은 다른 한쪽에서 한창 싸우고 있는 고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개를 펄럭이며 남은 흑마일족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 * *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칠 년이 지나갔다.

부석 성해 중부의 파괴된 연합 거점 주변에 시신이 널려 있었다. 일부 흑마일족 시신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성지 연합의 제자들이었다.

거점의 깊은 곳에 있는 흑석 대전의 입구에는 온몸이 피범벅이 된 성지 연합 제자 십여 명이 숨을 몰아쉬며 서로 기대어 있었고, 그들의 눈에는 절망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는 덩치가 커다란 사람들이 촘촘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몸에 마기를 두르고 있었다.

가장 앞쪽에 서 있는 사람은 키가 오 장 정도나 되었고, 근육이 울퉁불퉁했다. 몸에는 마문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으며, 머리가 세 개에 팔이 여섯 개였다.

그의 몸에 새겨진 마문이 반짝이더니 좌우 양쪽의 머리와 팔 네 개가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부석 성해 밖의 광활한 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소요(萧遥) 대령님, 저 자들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상반신의 절반을 검은 갑옷으로 감싼 흑마일족 사람이 물었다.

“다 죽여라.”

“네!”

* * *

수백 리 떨어진 다른 흑마일족 거점.

몸집이 커다란 하얀 노루 한 마리가 온 힘을 다해 머리를 미친 듯이 흔들고 있었다. 뿔에 걸려 있는 흑마일족 사람들의 시체를 떨어트리려 하는 것이었다.

이어 노루는 뒷발로 땅을 차고 하얀 번개처럼 앞으로 날아갔고, 노루의 앞발이 검은 건물을 묵직하게 밟아버렸다.

쿵!

매우 튼튼해보이던 검은 건물은 빛을 번쩍이더니 순식간에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

하얀 노루는 다시 공터에 내려섰다. 그리고 몸에서 빛을 뿜으며 빠르게 크기가 줄어들었고, 순식간에 머리에 노루 뿔이 돋아난 청년으로 변했다.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몸을 돌려서 뒤에 서 있던 십여 명의 성지 연합 제자들에게 말했다.

“삼십육 호 거점으로 가자.”

사람들은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는 듯, 뒤를 따라서 작은 전함에 올라탔다.

* * *

전쟁 초기에 흑마일족은 맹공을 펼쳐서 자신들의 영역을 급격하게 확장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는 기습을 통해 거점을 파괴하고, 성지 연합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공격 방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삼대 성지 연합은 무슨 이유에서지 인원 충원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연합 측은 대규모 돌격 작전을 펼치지 못했다. 그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전술로 빼앗긴 영역을 되찾는 한편, 상대 거점을 기습하는 전술을 써야 했다.

전쟁은 점점 거점 쟁탈전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양쪽의 성계 존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소규모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이런 거점 쟁탈전은 단기적으로는 사상자를 많이 감소시켰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성지 연합 측에 전혀 유리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삼대 성지에서 파견된 천위 무인이나 일계술사 중 큰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 죽은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들에게 의지하던 지계 무인과 월계술사 역시 당연히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삼대 성지는 계속해서 제자를 보내긴 했지만, 그간 손실을 입은 자리를 메우는 정도였다. 흑마일족의 우회 전술에 대응하고, 단번에 미양성역을 탈환하려는 대규모 돌격 작전을 펼치기에는 여전히 인원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석목이 이끄는 경465 소대는 임무 수행의 효율과 전적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 그들은 부공성 요새의 모든 소대 중에서도 손에 꼽히고 있었다. 석목 또한 자연스럽게 적지 않은 공훈을 모았다.

그와 함께 온 고예나 사슴뿔 청년, 그리고 웅도가 이끄는 부대 역시 요새에서 빛을 발했다.

웅도는 석목과 함께 적과 대치한 적도 많았지만, 석목에 대한 그의 악의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러 석목을 도발해서 몇 번의 갈등이 생기면서 둘 사이의 앙금은 점점 깊어갔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갈등이 격화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이삼 년 간 지속됐다. 석목 등 사람들은 어느새 십 년의 기한을 채웠고, 대부분은 빨리 요새를 떠나서 종문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석목은 자발적으로 전장에 남기로 했다. 그는 자경타나과를 손에 넣어야 했고, 또 구전현공 네 번째 단계의 구결도 얻어야 했다. 그러기에는 공훈점이 아직 많이 부족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웅도도 이곳에 남기로 했다.

* * *

석목이 부공성 요새에 온 지 십이 년이 되던 해,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요새를 지키던 요족 장로 독고천이 청란성지로 돌아갔고, 이진종 출신의 성계 장로가 그 자리를 대체하여 새로운 당직 장로로 선임되었다.

독고천 장로는 임기가 끝나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시찰을 나갔다가 매복 중이던 흑마일족 성계 강자 세 명에게 기습을 당했고, 그 바람에 중상을 입어서 물러나게 된 것이었다.

새로 부임한 장로는 의욕이 대단했다. 그는 오자마자 그동안의 전술을 완전히 바꿔서 몇 차례나 지령을 내렸다. 거점을 여러 곳 포기하더라도 병력을 집중해서 공세를 퍼붓고, 흑마일족을 성역 밖으로 몰아내려는 의도였다.

반 년 뒤, 어느 육지 조각 위의 산골짜기에 십여 구의 흑마일족 사체가 너저분하게 누워 있었고, 그 사이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산골짜기 한쪽의 커다란 돌 위에는 석목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는 이제 막 소대를 데리고 매복 공격 임무를 한 차례 수행한 뒤였다. 상대방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한 데다, 석목이 나서서 맹렬한 기세로 적장을 죽여 버려서 임무는 매우 순조로웠고, 석목의 대원 중에는 사상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때 그가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우며 영패를 꺼내 들었다. 영패의 표면에 빛이 감돌더니 작은 글자가 한 줄 나타났다.

“속히 총전으로 복귀 요망.”

석목은 명령을 내려 대원들을 소집한 후 복귀했다.

반나절 후 석목은 부공성 요새에 도착했다. 그는 키가 큰 청년을 돌아보며 말했다.

“곽참, 대원들을 데리고 돌아가서 잘 준비하고 있어라. 총전이 나를 부르는 것을 보니 새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것 같다.”

부석 성해에서 십 년 동안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처음부터 석목과 함께 한 대원들은 대부분 무사히 살아남았다. 다만 십 년이 지나자 거의 모두 돌아갔고, 원옥경과 곽참 두 사람만 남기로 했다.

석목은 그들과 수많은 생사의 순간을 겪으며 실력과 지도력을 입증했다. 그래서 곽참과 원옥경은 석목을 매우 믿고 따르고 있었다. 뛰어난 대장을 따라다니면 위험도 크게 줄어들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공훈을 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달 전, 거점 쟁탈전에서 아군보다 몇 배나 많은 흑마일족 대군과 전투가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원옥경이 중상을 입고 종문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지금은 곽참 혼자 남게 되었다.

“대장,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확실히 준비해놓겠습니다.”

곽참은 그렇게 말한 뒤 대원들을 데리고 주영산 방향으로 날아갔다.

석목은 사람들이 가는 것을 바라보더니 이내 총전 앞 광장으로 향했다.

대전에 들어서자 이미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풍기는 기운이나 영력의 파동을 보니 다들 천위 무인이 아니면 일계술사였다. 아마도 각 조의 대장들인 것 같았다.

그가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도 전에 석목의 귓가에 누군가의 경멸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목, 너 이 자식, 너무 늦게 왔잖아. 이 많은 사람이 너 한 명을 기다렸단 말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웅도였다.

석목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고, 초록 옷을 입은 중년 남자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막(莫) 장로님께 보고합니다. 이제 막 임무를 수행하고 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그래, 임무는 잘 끝냈는가?”

막 장로가 물었다.

“네, 천위 흑마일족 한 명, 지계 열일곱 명을 모두 죽였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좋아, 대열에 합류하도록.”

막 장로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흡족해하며 말했다.

석목은 대열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막 장로를 훑어보았다.

그는 독고천을 대체하여 이곳에서 주둔하게 된 성계 장로로, 이름은 막린우(莫鳞禹)였다.

막린우는 검푸른 머리카락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묶고 있었고, 몸에 걸친 옷에는 구김살 하나 없어서 매우 엄숙하고 말끔해보였다. 하지만 이마와 광대뼈가 돌출되어 있어서 안색이 다소 어두워보였다.

막린우의 행동은 너무 포악하고 괴팍했기에, 석목은 그의 일을 해결하는 방식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 이제 다 모였군. 여러분을 긴급 소환하게 된 이유가 궁금할 터이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하니 천천히 설명하겠다.”

막린우는 사람들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독고 장로가 있는 동안 우리 연합군은 흑마일족과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승부가 엇갈리며 팽팽하게 맞서 싸워왔지만, 부석 성해에서 흑마일족이 차지한 거점 수는 날로 늘어가고 있다. 이것 또한 실패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나는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여러 성계 장로와 논의해서 전략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뛰어난 무인들을 한데 모아서 흑마일족의 중요한 거점 한 곳을 급습하는 것이다. 지금 이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요새에서 가장 뛰어난 소대다. 이번 임무는 너희가 맡게 될 것이다.”

막린우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사람들의 얼굴에 우쭐대는 기색이 어렸다. 석목만이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막 장로님, 이번에 습격하게 될 흑마일족 거점은 어느 곳인가요?”

석목이 갑자기 물었다.

“구 호 거점이다.”

막린우는 석목을 슬쩍 바라보더니 덤덤하게 답했다.

“네?”

“그곳을 어떻게 습격합니까?”

갑자기 사람들이 놀라서 시끌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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