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선계와 천정
석목을 두 번이나 놓친 소요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두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먹구름이 다시 한 번 소용돌이치면서 그 속에서 검은 안개 줄기가 줄줄이 튕겨 나왔다. 안개 줄기는 칼날로 변하여 칠흑 같은 홍수를 이루며 석목을 공격했다.
그러나 석목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나섰다. 그는 불과 물로 이루어진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어 몸을 빛냈다. 검은 칼날은 매우 촘촘하게 날아왔지만 석목을 다치게 하지는 못했다.
그림자가 희미해지더니 석목이 귀신처럼 소요의 위로 다가갔다. 햐앟고 검은색이 뚜렷하게 나뉜 두 팔의 경계가 살짝 흐려지더니, 주먹 그림자가 촘촘하게 나타나서 바람이 휘몰아치듯 소요를 향했다.
쾅!
허공이 격하게 흔들리면서 주먹이 지나간 곳마다 균열을 만들어냈다.
소요는 두 손으로 법결을 시전하며 몸에서 검은빛을 번쩍였다. 이어 그 빛은 다시 검은 안개로 뭉쳐져 커다란 방패를 만들어냈다.
펑! 펑!
충돌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흑백의 두 갈래 빛이 검은 안개로 만들어진 커다란 방패 표면에서 튕겨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패의 표면에서 균열이 생기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안개는 점점 얇아져서 곧 부서지기 직전까지 갔다.
“네 이놈, 너무 좋아하지 마라!”
소요는 그 틈을 타 뒤로 물러나더니 다시 주문을 외우며 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검은 방울이 나왔다.
그가 손가락으로 앞의 허공을 짚자 검은빛이 나와서 방울 속으로 스며들었다.
방울이 순식간에 몇 배나 더 커지더니, 표면에 현묘한 금색 부문이 빼곡히 나타났다.
딸랑! 딸랑…….
검은 방울이 표면에서 부문을 반짝이며 빠르게 돌아갔고, 그 속에서 방울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매우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듣다보면 소리에 홀려버릴 것 같았다.
곧 석목의 눈빛이 흐릿해지면서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그걸 본 소요의 눈에 우쭐함이 스쳤다. 그가 손을 흔들자 검은 불의 공 여러 개가 손바닥에서 튕겨나가더니 터져버렸고, 검은 안개가 다시 긴 화염의 창이 되어 석목의 가슴으로 향했다.
검은 창은 이내 석목의 가슴 앞까지 다가왔다. 석목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고, 눈빛이 더 흐릿해졌다.
그러다 막 정신을 차린 그는 긴 창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에 그가 이를 악물며 손을 흔들자 손바닥에 하얀빛이 나타났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긴 창이 석목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소요는 우쭐대는 표정으로 차갑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검은 창이 몸을 뚫고 지나가는 순간 하얀빛이 반짝였고, 석목의 몸에서 하얀 털이 자라나더니 원숭이의 허영으로 변했다.
펑!
창은 그대로 터져버리며 검은 화염으로 변했고, 하얀 원숭이의 허영은 그 속에 그대로 파묻혔다.
“체신(替身)!”
소요가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몸에서 검은빛을 뿜어내며 옆으로 이동했다.
하얀 곤봉 그림자 한 줄기가 갑자기 그의 등 뒤에 나타나더니 백 장 가까운 크기로 커졌다. 그것은 표면에 부문을 감은 채 빠르게 떨어졌지만, 소요의 잔영만 때리고 말았다.
쾅!
곤봉 그림자가 떨어지자 허공이 완전히 찢어지면서 커다란 틈이 생겼고, 격한 진동이 일어나서 주변 공기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멀찌감치 물러난 소요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내가 너를 너무 가볍게 봤구나!”
석목을 바라보는 소요의 얼굴에서는 더는 우쭐한 표정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그의 표정은 매우 심각해졌다. 이 싸움에 진지하게 임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다시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몸에서 빛을 번쩍였다. 그의 머리 양쪽에 또 다른 머리가 하나씩 나타났다. 그리고 몸에도 검은 팔이 네 개 더 돋아났으며, 마기가 순식간에 몇 배나 짙어졌다.
석목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이제 모든 수단을 전부 동원했지만, 상대는 여전히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는 지금껏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었다.
천위 경지의 흑마일족은 머리 두 개에 팔 네 개까지 만들 수 있었고, 성계 흑마일족은 머리 세 개에 팔 여섯 개까지도 가능했다. 평상시에는 그들도 인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면 실력이 몇 배나 더 강해지는 것이었다.
그 순간, 석목의 눈빛에서 기뻐하는 기색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소요는 더는 법결을 시전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머리 세 개에 팔이 여섯 개나 달린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액체 같은 빛이 한 층 나타났고, 중간의 파란색 얼굴에는 뾰족한 이빨이 돋아 있었다. 입술은 빨갛게 변했고 가슴과 목에는 자색의 비늘 갑옷을 두르고 있었다.
여섯 개의 팔에도 자색 비늘이 자라나 있었고, 손가락에는 검은 손톱이 붙어 있었다. 손톱에서 유유히 빛이 흐르는 걸 보니 맹독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모습은 흉악하기 그지없었고, 풍기는 위압감도 처음보다 몇 배나 더 강했다.
석목은 심각한 표정으로 등 뒤에 있는 날개를 천천히 흔들며 싸울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소요의 가운데 머리가 음흉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거친 목소리가 마치 철판을 문질러 닦는 것처럼 듣기 거북했다.
그가 한쪽 손을 들어 석목을 향해 흔들었다.
칙! 칙!
검은 반달 모양의 빛 다섯 갈래가 허공을 찢었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수백 장 멀리까지 날아가서 석목의 앞까지 다가왔다.
석목이 큰소리를 지르자 여의빈철곤에서 눈부신 하얀 빛이 나타났다. 그것은 다섯 갈래의 곤봉 그림자를 만들어내 검은 칼날과 부딪쳤다.
이어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은 칼날이 찢어지면서 석목도 뒤로 튕겨 나가서 간신히 몸을 세웠다.
그 순간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조금 전의 방울이 석목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방울은 표면에서 금빛을 크게 뿜어내며 격하게 흔들렸고, 딸랑딸랑 소리가 울리며 검은 물결이 방울에서 퍼져나가서 석목을 감쌌다.
그것은 듣기 좋은 방울 소리 같았지만, 듣다보면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느낌이 몰려왔다.
석목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빠르게 손을 흔들었고, 하얀 탑 하나가 그의 몸에서 나왔는데, 바로 정신탑이었다.
정신탑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빛의 방패를 이루어서 석목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방패는 방울소리가 닿자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얇은 방패는 생각보다 훨씬 튼튼해서 계속되는 방울 소리의 파동을 전부 막아버렸다.
“진혼영보!”
멀리 떨어져 있던 소요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다시 빛을 뿜어내며 공격을 취하려 했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한 줄의 틈이 생겼고, 그 속에서 하얀 빛줄기가 가득 뿜어져 나와서 소요의 가운데 머리를 감쌌다.
소요는 순간 멍해지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바로 그때 하얀 그림자가 그 틈에서 튕겨 나왔다.
석목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것은 너무 익숙한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연나였다.
연나는 전신에서 엄청난 기운을 풍기며, 온몸에 하얀 갑옷을 두르고 손에 긴 창을 들고 있었다. 긴 창에서는 짙고 신성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고, 번개에 줄줄이 감겨 있었다. 여전히 남아 있는 사령의 기운만 아니라면, 마치 드넓은 하늘에 서 있는 여전사 같았다.
그녀의 엄청난 기운은 이미 천위 정상까지 도달한 듯, 성계 경지와 매우 가까웠다.
연나의 하얀색 긴 창이 희미한 그림자로 변하더니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가 소요의 등을 뚫고 가슴 앞으로 튀어나왔다.
풋!
소요의 가운데 머리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희미해졌던 그의 두 눈이 다시 맑아지더니, 몸통이 터지며 끈적한 검은 기운으로 변하여 긴 창에서 빠져나왔다.
연나는 멀찌감치 벗어난 소요를 보며 멈칫하더니 의외라는 듯한 기색을 내비쳤다.
끈적이는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쳤고, 소유는 눈 깜박할 사이에 다시 머리 세 개에 팔이 여섯 개 자라난 몸으로 변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몸의 검은 빛도 매우 어두워졌으며, 가슴에는 커다란 상처가 하나 생겨 있었다. 피가 묻은 살갗이 밖으로 뒤집혀 있었는데, 피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 기운은……. 너는 선계에서 온 자로군!”
소요는 연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연나가 나타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석목은 소요의 말을 들고 의아해져서 연나를 바라보았다.
‘선계?’
석목은 통천선교에서, 그리고 채아의 입을 통해 선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소위 선계에 오른다는 것은 남해성을 벗어나 다른 성역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번천곤 속에서 백원왕의 입을 통해 만선을 죽이고 현공 보장을 획득하라는 말을 들었고, 그 뒤에 성전각에서 관련된 기록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일부 야사에 의하면 천정과 선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흑마일족의 성계 강자가 선계를 입에 올리고, 또 연나를 선계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듣자 마음속에서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연나는 소요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하얀빛이 반짝이면서 등 뒤에서 하얀 날개가 돋아났다. 연나는 날개를 한 번 펄럭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어 그녀는 갑자기 소요의 위쪽에 나타났다.
그녀가 손에 든 하얀 창이 진동하며 수많은 창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그림자는 저마다 은빛이 유유히 흐르며 차가운 빛을 뿜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을 가리며 소요를 덮었다.
소요의 머리에 달린 여섯 개의 눈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연나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여섯 개의 팔로 허공을 짚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도끼, 칼, 창, 망치 등 병장기가 하나씩 나타났는데, 그것들은 표면에 마문이 가득 새겨진 채 마기가 끊임없이 맴돌고 있었다. 전부 등급이 높은 마보(魔寶)였다.
소요는 여섯 개의 팔을 흔들며 마보들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림자를 줄줄이 만들어내 하얀 창의 그림자에 맞섰다.
콰르륵!
사납고 맹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천둥 번개보다 더 강력한 소리였다. 이어 하얗고 검은 두 갈래의 빛이 하늘 전체를 덮었다.
허공이 격하게 흔들리며 공간의 균열이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연나와 소요는 이런 것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수련의 경지로만 놓고 보면 소요가 훨씬 위였다. 비록 연나 역시 성계와 한 끗 차이였지만, 천지의 원기를 움직이고 무기나 힘을 사용하는 데는 이 한 끗이 큰 차이였다.
다만 소요는 방금 전 연나의 기습 공격으로 크게 다친 상태였다. 그리고 연나가 시전한 공법의 하얀 빛은 양의 속성으로, 소요의 마기를 억제하기에 매우 유리했다.
결국 두 사람의 전력은 백중세였다. 심지어 연나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소요가 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연나와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낮게 소리를 지르더니 여섯 개의 팔을 흔들었다. 그의 마보에서도 검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쿵!
이삼십 장은 되는 물통만 한 검은 빛 여섯 갈래가 연나에게 향했다.
그것을 본 연나는 등 뒤의 하얀 날개를 펼쳐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하얀 창에서 은색의 빛이 뿜어져 나왔고, 순식간에 지름이 몇 장 정도 되는 커다란 꽃 여섯 송이를 만들어서 검은빛을 받아쳤다.
큰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고, 성역에서 하얗고 검은 두 갈래 빛 여섯 개가 터져버렸다. 마치 천지가 파멸에 이를 것 같은 기운이 주변으로 퍼졌다. 가냘픈 연나의 몸은 격하게 흔들리며 마치 버들가지처럼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