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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499화 (499/916)

499화. 발목을 잡다

석목은 큰 걸음으로 총전의 대문을 나섰다. 보초를 서던 두 제자는 석목의 안색이 굳어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석목은 문 앞에서 잠깐 멈칫하더니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비차를 불러 어디론가 빠르게 날아갔다.

반 시진 후, 석목은 붉은 총전에서 나왔다.

그의 전맹령(战盟令) 속에 있던 공훈점은 전부 사라지고, 그 대신 현영벽의 현영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전부 합쳐서 총 십만 점이나 되었다. 웅도 등에게서 획득한 마혼 덕분이었다.

이 현영점을 가지고 성지로 돌아가면 남은 단계의 구전현공 구결을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석목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주영산의 동부에도 들리지 않고 곧바로 부공성 요새의 항구로 갔다.

드넓은 항구에는 각양각색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백 척이 넘는 금과 은 두 가지 색의 전함이 오른쪽에 가지런하게 정박해 있었다.

십여 척의 은월전함이 이제 막 날아오르려 했고, 주변에 수많은 비차의 빛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느라 매우 시끌벅적했다.

성지 연합의 제자들은 대장의 인솔 아래 항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 모두 기세가 등등해서 열정이 가득했고, 행장을 가지고 흥분한 기색으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석목이 처음 왔을 때보다 훨씬 활기 넘치는 광경이었다.

석목은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마음속에서 혐오감이 올라왔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항구의 왼쪽으로 걸어갔다.

항구의 왼쪽에는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그 위에는 문과 작은 창문이 하나씩 있었는데, 마치 어두운 보루 같았다.

보루의 문 위에 있는 암석에는 전운전이라는 세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일전에 석목이 많은 사람 앞에서 대드는 바람에 막린우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석목은 이미 너무 큰 죄를 저지른 셈이었다.

막린우는 자신의 위치 때문에 코앞에서 석목을 어쩌지는 못했지만, 석목도 어차피 이곳에 더 머물 생각은 없었다.

보루의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곳의 벽은 매우 두터웠다. 내부는 넓은 편은 아니었고, 중앙에는 오목한 탁자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양쪽에는 각각 마름모꼴 옥간이 가득 있었다.

오목 탁자 뒤에는 귀가 뾰족하고 얼굴이 까만 노인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노인은 한 손에 옥간을 들고 다른 한 손의 손가락에서 빛을 뿜으며 끊임없이 옥간 위를 짚고 있었다. 마치 영력을 옥간에 불어넣으며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것 같았다.

“장로님.”

석목이 다가가서 손을 모으며 말했다.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고개도 들지 않고 석목을 보았다. 그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석목은 한쪽에 서서 기다리다가 한참이 지나도 노인이 말을 하지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장로님, 저는 청란성지의 석목입니다. 십 년의 기한이 지났으니, 번거롭겠지만 전함으로 동성성으로 이송해주십시오.”

그러나 검은 옷을 입은 장로는 계속해서 손에 빛을 뿜으면서, 전혀 듣지 못한 듯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약 반 각이 흐르자 노인이 드디어 손을 거두고 기록을 마친 옥간을 한쪽에 놓았다. 그는 그제야 무엇인가 생각난 듯 다시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석목은 그를 향해 손을 모았다.

“석목이라고 했나? 수련 경지를 보니 대장을 맡았을 텐데, 나가서 싸우지 않고 무슨 일로 왔는가?”

노인이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석목은 자신의 임기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다시 말해주었다.

“동성성으로 돌아간다고? 이미 몇 차례 임기를 마친 제자들을 전함으로 돌려보냈다. 자네는 왜 그때 오지 않은 건가? 지금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흑마일족과 수년 동안 싸우면서 이제 막 국면이 전환되려는 참이다. 전방에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전함을 그쪽으로 전부 배치해서 지금은 남아있는 게없다.”

“그럼 언제 전함을 사용할 수 있나요?”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때가 되면 생기겠지. 지금 나에게 물어본다고 어떻게 알겠는가? 기다리지 못하겠으면 알아서 잘해보도록 해. 됐다. 별일 없으면 방해하지 말고 이만 가보게.”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석목은 무언가 더 말하려고 했지만, 노인은 손을 저으며 다시 자기 일에 집중했다.

석목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우선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전운전에서 나온 석목은 항구를 오르내리는 전함들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부공성에서 동성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나 멀었다. 구 호 거점에서 부공성까지의 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영우비차 하나로는 절대 안전하게 갈 수 없었다.

노인의 언행과 태도를 보니 아마도 막린우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일면식도 없는 전운전의 장로가 석목을 그런 태도로 대할 이유가 없었다.

막린우가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뒤로 이런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여우같은 놈!”

어쨌든 이곳에서는 성지로 돌아갈 수 없게 됐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 했다.

잠깐 망설이던 석목은 손에서 빛을 반짝이며 영우비차를 불렀다. 그는 허공에 빛 한줄기를 그으며 주영산 방향으로 날아갔다.

잠시 후 그는 한 동부 앞에 도착했다.

그 동부는 산 중턱의 한 평대에 자리 잡고 있었고 매우 조용했다. 하지만 이곳은 석목의 동부는 아니었다.

“청훤 사형, 동부에 계십니까? 석목이 뵙고자 합니다.”

석목이 동부를 향해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동부 안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석 사제로군요. 오랜만입니다. 장천이 성지로 돌아간 후 오랫동안 이곳을 찾지 않으셨지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곧이어 동부의 대문이 열렸다. 석목은 안으로 들어가서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곳은 석목의 동부보다 훨씬 컸다. 안에는 필수품 외에 책장 세 개가 놓여 있었는데, 책들로 꽉 차 있었다.

청훤은 갑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푸른 옷으로 몸을 두르고 손에는 푸른 표지의 책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용맹한 기운은 사라지고 상당히 온화한 인상이었다.

“석 사제, 제가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청훤은 석목에게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청 사형, 혹시 선견지명이 있으신가요?”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제가 그런 능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석 사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또 안색이 어두운 것을 보니, 아마도 제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청훤은 큰 소리로 웃더니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석목은 가볍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지난 전투, 그리고 총전과 전운전에서 있었던 일을 청훤에게 대략 설명해주었다. 물론 웅도가 자신의 입을 막기 위해 죽이려 들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이번 승리의 배후에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막린우라는 자는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는군요. 석 사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서든 동성성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청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청훤 사형.”

석목이 손을 모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 요새에서 꽤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공개적으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손이 여러 곳에 닿아 있습니다. 우리 청가의 가세를 바탕으로 사람 한 명쯤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석 사제, 걱정하지 말고 이곳에서 며칠 머물고 계십시오. 며칠 뒤 새로운 제자들이 전함으로 도착할 것입니다. 그때 제가 해결해드리지요.”

청훤이 말했다.

“참, 그리고 항구를 보니 전함의 움직임이 빈번하더군요. 전부 큰 전투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인가요?”

석목이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지난번 작전으로 연합이 흑마일족의 두 중요한 거점을 단번에 차지한 후, 전선에서 주도권을 거머쥐게 되었지요. 최근 막 장로가 서둘러서 많은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연합에 요청했습니다.

단번에 흑마일족을 물리치려는 계획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흑마일족을 그들의 성역으로 몰아내고, 결계를 다시 완벽하게 복구하겠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는 큰 포상이 내려질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청훤이 말했다.

“이번에 유독 제자들의 기세가 등등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군요.”

석목이 머리를 끄덕였다.

“허허, 큰 상이 내려져야 용감한 사람도 나타나는 법이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청훤이 말했다.

석목은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눈 뒤 자리에서 일어섰고, 자신의 동부로 돌아갔다.

그는 동부에 도착해서 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연합의 고위층에 대한 불만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석목은 두 손을 흔들며 법결을 시전했고, 동부 내에 설치해둔 결계를 펼쳤다. 하얀빛이 동부에 드리워졌다.

허리춤의 영수 주머니에서 검은빛이 반짝이더니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주변의 검은 기운이 전부 사라지고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나타났다. 푸른색의 짧은 피풍을 두르고 석목과 매우 비슷하게 생긴 그 아이는 바로 그가 얼마 전에 제련한 분신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분신은 키가 조금 자랐고, 검푸른 피부색이 점점 옅어져서 평범한 아이와 매우 흡사해졌다. 다만 옅은 마기가 몸을 둘러싸고 있었다.

분신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바로 석목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머리를 그의 가슴에 비비며 마치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 같았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분명히 분신의 의식을 전부 지워버렸는데, 여전히 영성이 매우 짙었다. 영영과의 과핵은 상상 이상으로 신묘한 물건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만큼 분신의 잠재력이 크다는 뜻이니,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빨리 이 분신의 실력을 키워야 했다.

다만 이 분신은 이미 완전히 마 속성으로 변했기에, 실력을 높이려면 대량의 마기를 주입해야 했다. 부석 성해는 흑마일족 성역의 공간 통로와 근접해 있는데다 결계가 파손되었고, 또 흑마일족이 존재하기에 천지에 마기가 어느 정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청란성지로 돌아간 뒤에는 마기를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석목은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손을 흔들었다. 검은 수정석이 그의 손에 나타났다. 소요의 저장 반지에서 찾은 최상급 마정이었다.

분신은 마정의 기운을 느끼기라도 한 듯 갑자기 얼굴에 흥분된 기색을 드러냈다. 분신이 석목의 손에서 마정을 빼앗더니 품에 안았다.

그가 입을 벌리자 마정 속에서 마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와서 분신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마기가 흘러나오자 짙은 마기를 머금고 있던 마정의 표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분신이 마기를 전부 빨아들이자 마정은 그대로 깨져버렸다.

마정 한 개분의 마기를 흡입한 분신은 기운이 한층 강해졌고, 그걸 본 석목은 기분이 좋아졌다

석목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분신을 영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정을 몇 개 더 꺼내서 주머니에 넣어주고 마기를 흡입하게 했다.

이어서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몸에서 파란 물빛이 뿜어져 나왔다.

영해 속에서 흑백의 금단이 빛을 뿜어서 남정기와 청명검을 감쌌다. 석목은 법보의 제련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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