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엿듣다
부공성 요새에서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는데, 지난 며칠전보다도 훨씬 시끌벅적해졌다. 그중에는 새로운 얼굴도 더러 있었는데 아마 이번에 새로 온 제자들인 것 같았다.
항구에는 백여 척의 거대한 전함이 일렬로 줄을 서 있었는데, 대부분은 은빛을 찬란하게 반짝이는 은월전함이였다.
요새는 전체적으로 큰 전쟁 직전에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석목은 항구의 풍경을 한참 바라보더니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잠시 후 그는 청훤의 거처에 도착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석 사제,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청훤은 곧바로 석목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보아하니 요새에 또 많은 사람이 온 것 같군요.”
석목이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전방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돌파구가 생겼기 때문이지요. 삼 대 성지는 힘을 모아서 단번에 결계를 봉인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반 년 동안 일만 명 가까이 되는 제자를 새롭게 모았고, 최근 그들이 이쪽으로 오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청훤이 말했다.
석목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큰 전투가 곧 시작되겠군요.”
“맞습니다. 석 사제, 최근 전세가 많이 좋아지기도 했고, 이런 대규모의 전투 또한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온 게 아닙니까?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석 사제의 실력도 대단한데 정말 이렇게 떠나려는 겁니까?”
청훤이 말했다.
“하하, 청 사형은 지금 저에게 남을 것을 권유하시는 건가요?”
석목이 청훤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저는 다만 석 사제의 능력이 아쉬워서 이러는 것일 뿐입니다. 이미 결심을 하셨으니 저도 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동성성으로 떠나는 전함이 한 척 있습니다.”
청훤은 웃으며 곧바로 화두를 돌렸다.
“청 사형, 감사합니다!”
석목은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석 사제, 혹시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오늘 빨리 마무리를 하십시오.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청훤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석목은 머리를 끄덕이며 일어서서 손을 모으며 말했다.
“이번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도움이 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좋습니다.”
청훤이 대답했다.
석목은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나와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광장으로 갔다.
청훤의 말대로 미양성역의 모든 문파가 전방에 모여 있어서, 물자와 희귀한 물품이 많았다. 일부는 청란성지에서도 구할 수 없는 물건이라 내일 떠나기 전에 최대한 많이 사두어야 했다.
큰 전투가 코앞이니 밖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소대들도 전부 소집되어 돌아와 있었다. 이번에 만 명 가까이 되는 제자가 새롭게 합류한 탓인지 광장에는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석목은 광장을 한참 돌아보다가 한 노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곳의 조판에는 검은색 수정석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마정이었다.
석목은 청란성지로 돌아가면 분신의 실력을 어떻게 끌어올릴까를 두고 줄곧 고민이었다. 가지고 있는 마정이 많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언젠가는 전부 소모될 것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마정을 많이 사두면 좋을 것 같았다.
석목은 가격을 물어본 뒤 마정을 전부 사들였다.
그런데 마정이 더 있는지 찾아보려고 두리번거리던 석목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인파 속에서 푸른 옷을 입고 사슴뿔이 머리에 돋아 있는 청년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는 십여 년 전 그와 함께 이곳에 오게 된 요족이었다.
그는 몇 년 전 십 년의 임기가 끝나면서 청란성지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전방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사슴뿔 청년은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어디론가 가버렸다.
석목은 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정을 찾아다녔다.
그는 반나절 뒤에 많은 마정과 희귀한 재료들을 들고 거처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순간 어느 골목을 걷던 석목이 멈칫했다. 앞쪽의 교차로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석목은 그를 확실하게 보았다. 바로 조극이었다.
석목은 그와 마주치기 않기 위해 서둘러 건물 뒤에 숨었고, 그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가 조극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청엽성에서였다. 그런데 지금 전방에 나타나다니…….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하니 그는 이미 천위 경지에 도달한 것 같았다.
조극이 사라지자 석목은 그제야 건물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조극이 걸어간 방향을 바라보고는 곧바로 거처로 돌아갔다.
석목은 그동안 조극이라는 사람과 여러 차례 마주치면서 그에 대해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비밀이 가득한 사람이라, 이렇게 전방에 온 것도 또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석목은 내일 떠날 사람인만큼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거처로 돌아온 후 석목은 물건을 정리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돌아가기 전 몸속에 있는 두 개의 법보를 조금 더 제련해놓을 생각이었다.
한참 후 그는 깊은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막상 내일 전방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았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일어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요새 주변은 어두컴컴했고 별 몇 개만 반짝이고 있었다.
부석 성해는 별의 바다지만 주야가 바뀌는 현상이 일어났다. 다만 이곳의 밤은 매우 짧아서 두세 시진 정도면 다시 밝아졌다.
요새는 쥐죽은 듯 고요했고, 멀리서 야간 순찰을 하는 제자 말고는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석목은 솔솔 불어오는 밤바람에 가슴이 후련해졌다. 복잡한 마음도 한결 누그러진 그는 발길이 가는 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주영산의 외진 곳에 도달했다.
밤빛 속에서 먼 곳에 있는 거대한 부석 성해의 윤곽이 흐릿하게 보였는데, 그 느낌이 매우 기묘했다.
지난 십여 년간 석목은 이 광경을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지금은 유난히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석목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그는 멈춰 서서 조용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고,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다가왔다.
석목은 곧바로 암벽 옆에 있는 커다란 돌 뒤에 숨어서 투명 피풍을 몸에 둘렀다.
잠시 후 누군가가 그곳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바로 조극이었다.
그는 주변을 이리저리 경계하며 다급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고, 석목이 숨어 있는 곳 옆을 지나갔지만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석목의 눈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는 멀어져가는 조극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깐 망설였지만,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조극은 산길을 따라서 한참을 걸었고, 곧 주영산에서 내려와서 어느 장로가 거주하는 대전 근처로 갔다.
그는 동부의 문 앞에 서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동부의 문이 살짝 열리더니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석목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막린우였다.
막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극에게 들어오라고 신호를 했고, 조극이 들어가자 곧바로 문이 닫혔다.
‘저들은 왜 이런 늦은 밤에 몰래 만나는 거지?’
석목의 마음속에 의아함이 솟구쳤다.
막린우는 청란성지 사람이 아닌 이진종의 장로였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조극과 매우 친숙한 사이인 것 같았다.
석목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날 해치려는 건……?’
그렇게 생각하자 석목의 안색이 변했다. 그 생각은 점점 석목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사실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청엽성에서 석목은 이미 조극과 악연을 맺었고, 그와 강 씨 집안의 비밀까지 알아버렸다. 그러니 조극이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석목은 막린우의 심기를 건드렸고, 그의 체면까지 구겨버렸다. 물론 일부 사람들만 알고 있는 일이라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았지만, 막린우가 석목에게 앙심을 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석목은 머릿속을 스치는 이런 생각들을 곧바로 부정했다.
연합은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있었고 막린우는 삼 대 성지에서 선발된 주둔 성계 장로였다. 정말 자신을 해치려 한다 쳐도, 큰일을 앞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공모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아서, 석목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인 후 몰래 동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귀에 진기를 불어넣어서 안쪽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려 했다.
동부 안쪽에는 방음 금제가 설치돼 있었지만, 수련 경지가 높아진 석목이 귀에 공력을 집중시키니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석목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집중하여 듣기 시작했다.
“소주님……. 아무도…… 없지요?”
막린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석목은 그 한마디만 들었을 뿐인데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소주님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 조심해서 왔다.”
조극이 말했다.
“이번 일은 매우 시급합니다. 소주님 꼭……. 저도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겠습니다. 도움……. 가질 수…….”
“물론이지……. 이번…… 곤륜(晜侖)……. 선계와 관련이…….”
석목은 온 힘을 다해서 둘의 대화를 들으려 했지만, 온전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들려온 말만으로도 그는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정말로 무언가를 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물건을 빼앗을 계획이었고, 그것은 또 선계와 연관이 있었다.
다급해진 석목의 머릿속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는 순간 토템을 떠올리더니 곧바로 품속을 뒤적였다.
토템의 힘을 시전하자 그의 머리 피부에서 금색 비늘 한 층이 나타났고, 청력이 훨씬 예민해졌다. 그러자 동부 안에 있는 조극과 막린우의 대화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심지어 두 사람의 심장 박동과 호흡 소리마저 은은하게 들렸다.
‘토템술이 청력을 이런 경지까지 끌어올리다니.’
석목이 기뻐하는 순간, 동부 안에 있는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다.
석목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곧바로 그림자로 변하여 멀리 날아갔고,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동부의 문이 활짝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바로 막린우였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신식을 날려서 순식간에 주변 수십 리로 퍼트렸다.
막린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어 그는 고개를 돌리더니 석목이 숨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흔들자 옅은 자색의 커다란 손이 날아가서 허공을 짚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자색 손은 빠르게 줄어들어 작은 공으로 변했다. 그 안에서 극도로 옅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서 동부로 돌아갔다.
“뭐지?”
조극이 동부로 다시 들어오는 막린우를 보며 물었다.
“방금 전 누군가 밖에서 엿듣고 있었습니다.”
막린우가 말하며 자색 빛의 공을 들어올렸다.
“이것은…….”
조극이 그 안의 빛을 바라보며 말했다.
“매우 특별한 기운인데, 아마도 야만족의 토템 비술일 것입니다.”
막린우가 말했다.
“야만족! 설마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겠지?”
조극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곳에는 방음 결계가 있으니 아마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막린우가 침묵하더니 말했다.
“이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 어떠한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 그는 아마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내가 쫓아가도록 하지. 수천색지(搜天索地) 대법을 시전해서라도 찾아내서 죽여야 해.”
조극은 낮게 말하더니 곧바로 밖으로 나가려 했다.
“소주님, 절대 안 됩니다. 그 대법은 큰 소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를 추살하는 일은 저에게 맡겨주시고, 소주님은 우선 돌아가십시오. 아직은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요새에 있는 성계의 존재는 저뿐만이 아닙니다.”
막린우가 손을 뻗어 조극을 제지했다.
“하지만 더 지체하다가는 멀리 도망가 버릴 거다.”
조극이 다급하게 말했다.
“소주님, 마음 놓으십시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움직이면 안 됩니다.”
막린우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의 말을 들은 조극은 흠칫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