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화. 도망가다
석목은 검은 그림자로 변하여 멀리 날아갔고, 주영산의 깊은 곳까지 가서야 멈추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투명 피풍이 있으니 아무도 보지 못했겠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석목은 아무도 없는 곳에 있었지만 피풍은 벗지 않고 있었다.
막린우의 신식 탐색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이곳은 그의 동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만큼 섣불리 피풍을 벗을 수는 없었다.
날이 점점 밝아오자 석목은 동부로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동이 트자 요새의 곳곳에서 사람들이 나왔고,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석목은 그제야 눈에서 빛을 반짝이며 조심스럽게 피풍을 벗고,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별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청훤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가 막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데 동부의 문이 활짝 열리며 청훤이 안에서 나왔다. 그는 석목을 보더니 멈칫했다.
“석 사제, 이제 막 찾아가려 했는데 벌써 도착하다니요.”
청훤이 말했다.
“청 사형께서 도와주시는 것인데 당연히 제가 찾아와야지요.”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빨리 움직입시다. 준비가 된 것 같으니 전함 쪽으로 가지요. 아마도 지금 한창 출항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청훤은 웃으며 석목을 데리고 요새 앞쪽으로 나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요새의 항구 왼쪽에 있는, 상대적으로 외진 구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전함이 십여 척 정박해 있었는데, 사람들이 물건을 싣고 내리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중 한 은월전함으로 향해 갔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얼굴이 까만 남자의 지시를 받으며 여러 물자를 내리고 있었다.
“곡(????) 도우.”
청훤이 얼굴이 까만 남자를 보고 인사를 했다.
“청 도우, 오셨군요!”
얼굴이 까만 남자는 고개를 돌리더니 바로 옆에 있는 석목을 바라보았다.
“곡 도우, 인사드립니다.”
석목이 남자를 향해 손을 모았다.
“이분이 전에 말씀하신 석목이라는 분인가요?”
남자는 석목을 바라보며 웃더니 청훤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이분이 석목 사제입니다. 청란성지의 제자이고 전방에서 십여 년 머물렀습니다. 이제 돌아가려고 하는데 전송진으로 가는 전함이 없어서 곡 도우에게 부탁드린 것입니다.”
청훤이 말했다.
“석 대장의 이름은 저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물건을 거의 다 내렸으니 배에 타십시오.”
남자는 석목을 매우 열정적인 태도로 대하며 말했다.
“그럼 곡 도우님, 잘 부탁드립니다.”
석목은 그렇게 말한 뒤 옆에 있는 청훤을 향해 손을 모았다.
“청 사형, 그럼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다시 봅시다.”
“몸조심하시고 나중에 또다시 만납시다.”
청훤도 손을 모아 인사하자, 석목은 배에 올라탔다.
전함은 그가 부공성 요새에 올 때 탄 것과는 조금 달랐다. 배에는 삼 층으로 된 공간이 있었고, 그 안쪽에 독립된 방이 있었다.
“석 도우, 최근에는 이곳으로 오는 사람들만 있었고 돌아가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전함에는 선원 몇몇밖에 없으니 편한 방을 골라서 쉬고 계십시오.”
남자가 석목에게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 층 방 한 칸을 골라서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깊은숨을 내뱉었다.
‘드디어 이곳을 떠난다.’
보아하니 막린우와 조극이 그를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부공성 요새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신식을 통해 전함 주변의 움직임을 탐색했다.
반 시진이 지나서야 전함은 출항 준비를 모두 마쳤다.
윙!
진동음이 들리며 전함이 천천히 날아올랐다. 그리고 뱃머리를 돌리며 이내 망망 부석에서 사라져버렸다.
바로 그때 옅은 그림자 하나가 요새 근처의 부석에서 튀어 올랐다. 그 그림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전함이 날아간 방향을 뒤쫓았는데,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석목은 방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방에는 투명한 창문이 한 개 있어서 밖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먼발치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미 한두 시진이나 지나서 요새와 상당히 멀어졌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뭔가 불안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석목이 방문을 열어보니 얼굴이 까만 남자가 웃음 가득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손에 옥으로 만든 주전자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기이한 술 냄새가 풍겼다.
“석 도우, 길이 멀어서 심심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한잔 하려고 왔습니다. 제가 방해가 된 건 아니지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곡 도우, 들어오십시오.”
석목이 말했다. 그의 방 안에는 탁자와 의자, 침상만 한 개씩 있어서 매우 누추했다.
“아까는 저를 소개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저는 곡 씨 성에 이름은 원양(元陽)입니다. 청란성지 부속 종파인 호양종(昦陽宗) 소속의 제자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호양종의 제자였군요. 곡 도우는 수련 경지가 이미 천위 중기까지 도달하셨던데, 저보다 훨씬 위입니다.”
석목이 말했다.
그는 예전에 호양종이라는 문파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동성성 근처가 아닌 아주 먼 곳에 자리하고 있는 문파였고, 실력도 상당했다.
“석 도우, 과찬입니다. 도우의 실력에 대해서는 많이 전해들었습니다. 몇 년간 천위 흑마일족을 수도 없이 죽였고, 그중 또 천위 중후기 이상인 사람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어찌 저 따위와 감히 비교하겠습니까?”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석목도 가볍게 웃어넘겼고, 굳이 겸손의 말은 하지 않았다.
남자는 손에 든 술 주전자를 흔들며 말했다.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저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요. 이것은 미양성역에서도 유명한 나선주(羅仙酒)입니다. 한번 맛보시지요.”
그는 술잔을 두 개 꺼내 술을 가득 부었다. 술은 옅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고 매우 짙고 특이한 향을 뿜어냈다.
석목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술 냄새를 맡자 눈이 번쩍였다.
그는 단번에 잔을 들어 마셔 버렸다. 술은 얼음물처럼 목구멍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뱃속으로 떨어졌다. 차가운 술은 뱃속에서 마치 불덩이처럼 터져버렸고, 모든 모공이 열리는 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졌다.
“얼음과 불의 두 가지 기운이 이렇게 강하게 다가오다니. 말씀하신 대로 좋은 술입니다.”
석목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하자 남자의 얼굴에 기쁨이 넘쳤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전함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면서 주변의 빛이 어두워졌고, 창밖이 회색으로 변했다. 부석 성해에는 이런 성운이 많았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함이 성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허공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천 장 정도 되는 하얀 검의 빛이 나타났다.
검은 아무런 낌새도 없이 나오더니 기세등등하게 전함을 갈라놓으려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대한 검의 기운이 밀려왔다.
석목은 얼굴이 어두워져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몸에 붉고 파란 두 갈래의 빛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불과 물의 날개로 변하였다.
“곡 도우, 큰일입니다. 빨리 갑시다!”
석목은 말하기가 무섭게 밖으로 튀어나갔고, 그대로 전함을 보호하는 빛의 막을 뚫고 날아갔다.
곡원양이라는 남자는 멈칫했다. 그는 아직 영문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하얀 검의 빛이 전함에 내리꽂혔다.
전함을 둘러싸고 있던 빛의 막이 종잇장처럼 터져버렸고, 전함은 마치 두부처럼 가볍게 두 덩어리로 갈라졌다.
쿵!
검의 빛이 곧바로 날카로운 검의 기운으로 변하여 전함의 잔해를 둘러쌌다.
은색 전함은 수많은 검의 기운에 의해 사방에 구멍이 뚫렸다. 얼굴이 까만 남자를 포함해서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은 강력한 검의 기운을 피하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심지어 그들의 신혼마저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때 수백 장 밖의 성역에서 석목의 모습이 나타났다.
고개를 돌려 은월전함을 바라본 그의 마음속에서 화가 솟구쳐 올랐다.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이렇게 빨리 도망쳤다고? 정말 재빠르군!”
전함 위의 허공에서 수많은 빛이 번쩍이더니 다시 하얀 비검으로 변했고, 검은 모든 빛을 삼켜버리더니 허공마저 찢어버렸다.
이어 검 위에 한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석목은 실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바로 막린우였다.
“막린우! 연합 요새의 장로가 연합의 전함을 공격하여 제자들을 죽이려 하다니! 삼 대 성지가 당신을 어떻게 할 것인지 두렵지도 않은 건가?”
석목은 가슴이 서늘해지며 소리쳤다.
그러나 막린우는 차갑게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손가락을 굽히자 백 장 정도 되는 검의 기운이 허공에서 단단하게 뭉쳐지더니 석목의 머리를 공격했다.
석목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피하려 했지만, 검의 기운은 방향을 바꾸며 쫓아왔다.
펑!
검의 기운이 석목의 머리를 내리쳤다.
석목의 머리가 단번에 터져버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은 하얀 원숭이 허영으로 변했고, 검의 기운에 의해 두 조각으로 갈라지더니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체신!”
막린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방대한 신식이 주변으로 퍼지면서 천 리 밖까지 드리웠다.
* * *
수천 리 밖, 희미하고 거무스름한 빛이 날아가고 있었는데, 석목이었다.
석목은 이미 투명 피풍의를 두르고 있었고 영우비차에 올라타 진기를 전부 감춰버렸다.
하지만 이때, 엄청난 신식이 석목 주변으로 드리워졌다.
투명 피풍의엔 신식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매우 강력한 신식이었지만, 희미한 그림자를 그냥 스쳐지나갔다.
신식을 피한 석목은 기뻤다. 하지만 이때, 강력한 신식이 갑자기 소용돌이쳤고, 검은 그림자에 부딪쳤다.
생각지 못한 상황을 맞자, 그림자가 미세하게 떨렸고, 그 자리에서 파동이 일어났다.
“큰일이다!”
석목이 깜짝 놀라서 영우비차를 거뒀고, 붉은빛과 파란빛을 크게 퍼뜨리며 물과 불의 날개를 만들어서 펄럭이며 환영으로 변한 채 멀리 날아갔다.
석목이 사라지자 곧바로 맹렬한 검의 기운이 하늘에서 그 자리로 떨어지더니, 번개 같은 속도로 그 자리를 갈라버렸다.
쩍!
허공에 균열이 일며 길게 찢어졌고, 근처에 있던 수십 리에 달하는 큰 부석이 가볍게 두 덩어리로 갈라졌다. 갈라진 면은 매우 매끄러웠다.
검의 빛이 사라지자 막린우가 나타났다. 막린우는 석목이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흥, 이미 내 신식에 갇혔으니, 도망갈 생각 마라!”
막린우가 차갑게 웃으며 발밑에 탄 검에서 빛이 반짝였고, 그가 눈부신 빛으로 변하여 석목을 쫓아갔다.
석목은 물과 불의 날개를 펼친 덕에 속도가 빨랐지만, 성계의 존재와는 여전히 비교도 할 수 없었다. 하물며 막린우가 쓴 술법은 빠르기로 소문난 어검지술(御剑之术)이었다.
먼 거리를 사이 두고 있던 두 사람의 사이가 많이 좁혀졌다.
뒤쪽에서 번지는 빛 사이로 막린우가 백 장 정도 떨어져 있는 석목을 바라보며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푸른빛이 몸에서 응결되었고, 다시 커다랗고 푸른 손바닥으로 변하여 석목의 머리를 내리쳤다.
손바닥이 스친 허공이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엄청난 기류가 마구 튀어나왔고, 주변에 있던 성운마저 미친 듯이 휘저어 놓았다.
석목은 곧 커다란 손에 잡힐 것만 같았고, 팔에서 검고 흰 두 갈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다시 등 뒤 날개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물과 불의 날개에서 빛이 크게 번지더니, 몇 배나 불어났다.
석목은 속도가 더욱 빨라졌지만, 아주 간신히 푸른 손바닥에서 벗어났다.
“음? 방금 전에 그건 무슨 힘이지? 음양의 힘이 담겨있는 것 같군. 이렇게 순수하다니. 혹시 청란성지의 조화 신통인 구전현공인가!”
막린우는 눈빛을 반짝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석목이 음양의 힘을 물과 불의 날개에 불어넣은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성계의 존재인 막린우가 모를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