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화. 출세
핏빛 시체에 꽂혀있던 반토막 검은 검붉은 핏줄기와 마기가 침식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빛이 점점 어두워졌고, 조금씩 시체 속으로 빨려들며 완전히 삼켜졌다.
검을 빼앗겨버린 축운검파 제자들 백여 명은 검과 영기의 연결이 끊어진 순간, 몸속 혈기가 들끓었고, 몇몇 사람들은 이목구비에서 동시에 피가 흘러나왔다.
핏빛 시체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다시 손바닥을 흔들며 사람들을 잡으려 했다.
이때 검은빛이 반짝였고, 푸른색 그림자가 먼 곳에서 날아와 커다란 손을 막았다.
그 사람은 단아한 분위기를 드러냈고, 상투를 정교하게 틀고 있었다. 가슴까지 드리운 머리카락이 흔들렸고, 천위 무인다운 웅장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조극이었다!
조극은 몸 반쪽이 옥처럼 하얗고, 다른 반쪽은 먹물 같이 검었다. 온몸에서 뜨거운 기운과 차가운 기운을 동시에 뿜어내고 있었는데, 매우 조화로웠고 조금도 충돌하지 않았다.
조극이 한 손으로 몸 앞에 고리를 만들어냈고, 하얀 화염이 소용돌이치더니 손바닥을 하나 만들어내서 핏빛 강에 맞닿으며 손바닥을 막아냈다.
하얀 화염으로 만든 손바닥이 핏빛 강에 부딪치는 순간, 조극은 기이한 힘이 핏빛 강에서 흘러나와서 하얀 손바닥을 침식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다행히 양의 힘은 그 기운을 통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극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
조극이 큰소리를 질렀고, 몸에서 하얀빛이 크게 번졌다. 손에서 하얀 화염이 들끓었고, 화염은 커다란 손바닥을 따라 흉흉하게 타고 올라가더니, 핏빛 시체의 몸 절반을 감싸버렸다.
“아……”
핏빛 시체는 입에서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질렀고, 손에서 뿜어 나온 핏빛 강물은 순식간에 반이나 사라졌다.
하지만 시체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이어 발을 다시 한번 앞으로 내디뎠고, 다른 한 손엔 붉은빛이 용솟음쳤다. 그렇게 또 다른 핏빛 강을 만들어서 조극에게 향했다.
조극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오른쪽 손바닥을 들어올려 강하게 앞으로 밀어냈다.
이어 검은색 한기가 줄줄이 모여들었고, 손바닥에서 한 장 정도 되는 차가운 기류로 변하더니 시체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핏빛 강물이 역류하며 몰리더니, 하얀 기류에 닿자마자 곧바로 얼어버려서 붉고 투명한 얼음이 되었다.
하얀 한기는 핏빛 강을 따라 올라갔고, 잠깐 사이에 백 장 정도 되는 시체의 다른 한쪽을 얼려버렸다. 시체는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이 묶여버렸다.
연맹의 제자들은 조극 혼자서 백 장 정도 되는 핏빛 시체를 막아내는 모습을 보며 다시 패기가 넘치던 기색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들 손에 든 영기에서 빛을 번쩍이며 핏빛 시체의 머리를 향해 공격했다.
단지 몇몇 사람들에게서는 조극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읽을 수 없는 기색이 스쳤고, 그중 한 명은 사슴뿔 청년이었다.
이어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부신 빛덩이들이 핏빛 시체의 머리와 상반신 곳곳에서 터져버렸다!
“아!”
커다란 시체가 울부짖었다. 하지만 조극이 금제를 걸어서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밀물같이 몰려드는 공격에도 시체의 피부에만 상처를 냈고, 상처가 난 곳에서 고름이 흘러나왔다. 시체는 놀라울 정도로 튼튼했다. 수백 명이 힘을 합쳐서 죽이려고 해도, 한참이나 걸릴 터였다.
“여러분, 힘을 냅시다. 단번에 이 시체를 부숴버립시다.”
“흥, 흑마족의 성계 존재들도 별 게 아니군. 여섯 명이 모여서 만든 금제대진이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이라니!”
“맞습니다. 저 녀석부터 해치우고, 다시 장로님들과 힘을 합쳐 흑마족을 전부 죽여 버립시다!”
연합의 제자들은 몇몇만 핏빛 시체를 공격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성을 되찾고서 다시 흑마족과 싸우기 시작했다.
핏빛 시체 옆에서 조극은 단번에 구전현공 금제를 쓰며 시체를 고정했지만, 여전히 버거운 일이었다. 핏빛 강과의 연결된 시간이 길어지자, 몸속을 도는 피가 통제를 받지 못하는 듯이 격렬하게 소용돌이쳤고, 심지어 몸에서 빠져나오려는 느낌까지 들었다.
조극은 다급하게 법결을 외우며, 온힘을 다해 몸속에서 끊임없이 들끓는 혈기를 통제했다.
“아…… 아……”
성지 연합의 제자들이 좋아하기도 전에 사방팔방에서 다시 짐승 같은 고함들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피구름이 소용돌이쳤고, 그 속에서 또 커다란 시체가 한 구 기어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잠깐 사이 붉은 막이 만들어낸 대진법 속에서 순식간에 키가 백 장이나 되는 커다란 시체들이 이삼십 구나 나타났고, 소리를 지르며 연합의 제자들을 공격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핏빛 소용돌이가 아직도 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계속 시체들이 기어 나왔다. 그 광경을 본 연합의 제자들은 다시 한번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으며, 심지어 절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극도 심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악전고투해서는 안 됩니다. 빨리 전함으로 물러납시다!”
조극이 소리를 질렀다.
이어서 모든 제자들은 소속 대장들이 지휘를 하는 가운데 방어를 하며 뒤로 물러났고, 각자 전함이 떠있는 곳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대진법이 두른 봉쇄는 풀리지 않았다. 제자들이 피구름 끝까지 도망간다고 해도, 여전히 붉은 막을 벗어날 수 없었다.
* * *
광막 밖, 연합의 성계 장로 세 명은 대진법 속 상황을 보더니, 전부 눈을 감고서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어서 지령을 내렸고, 아직 대진 밖에 있는 전함들이 온힘을 다해 붉은 막을 공격했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그 막을 깨버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위쪽 성해에 있던 성계 대전에서 이미 여러 성계 장로들이 그곳을 벗어나서 핏빛 막 앞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각자 법보를 써서 막을 공격했다. 하지만 붉은 막은 조금 더 격하게 흔들릴 뿐, 여전히 대진법을 부숴버릴 수 없었다.
대진법 안, 백 장 정도 되는 시체 수십 구가 연합의 군사들을 마구 공격했다. 두 팔을 흔들자, 핏빛 강이 줄줄이 들끓었고, 연합의 제자들을 미친 듯이 도륙했다. 피구름 속에 있던 흑마족 사람들도 그 틈을 타서 반격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핏빛이 사방으로 퍼졌고, 찢긴 시체들이 곳곳에서 날아다녔으며 처절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잠깐 사이에 연합의 제자들 천여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연합은 국면이 매우 위태로워졌다.
바로 이때, 이변이 일어났다.
피구름의 서남쪽에서 붉은 막이 ‘퍽’ 하는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그리고 균열은 빠르게 양쪽으로 퍼져나갔고, 그 속에서 회색빛이 튀어 나왔다.
피구름 가운데 놓인 핏빛 사슬이 끊어져 버렸고, 그곳에 남겨진 흑마족의 성계 강자 한 명이 미처 피하지 못한 채, 균열로 빨려들어갔다.
대진법은 한쪽이 붕괴되었고, 핏빛 시체 몇 구가 얽히고설키더니 터져버렸다.
사람들이 아직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대진법 주변 곳곳에서 길이가 다른 균열들이 생겼다. 대부분은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졌고, 서남쪽에 난 균열보다 훨씬 작았다. 하지만 숫자가 많았고, 또 촘촘하게 나타나서 핏빛 사슬 세 줄을 전부 끊어버렸다.
핏빛 사슬 여섯 개 중에 순식간에 네 개가 끊어졌다. 커다란 대진법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또 밖에 있는 전함과 성계 존재들이 공격을 하여, 붉은 막은 드디어 터져버렸다.
대진법 끝에서 혈기를 든 나머지 흑마족의 성계 강자들은 대진법이 깨지며 반격을 받아,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뒤로 날아갔다.
펑, 펑, 펑!
폭발하는 소리가 백여 번 울렸다.
대진 속을 휘젓고 다니던 핏빛 시체들 수백 구가 몸에서 붉은빛을 밝게 내더니, 전부 터져버렸다.
“성해의 난류다!”
“이제 됐어!”
“하늘이 성지 연합을 돕고 있으니, 이제 공격만 남았군!”
“죽여!”
연합의 제자들은 매우 기뻐했다. 이제 다시 공격을 할 준비를 했다.
“모든 사람은 물러나라!”
전함에서 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고, 연합의 제자들은 전부 동작을 멈추었다.
이때 전함 위에 있던 몇몇 성계 장로들이 전부 심각한 표정으로 피구름 서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리는 마치 하늘이 터져버린 것 같았다. 균열이 백 장 가까이 갈라져서 엄청난 회색빛이 미친 듯이 흘러나왔다. 시선이 닿는 곳은 전부 균열들이 번쩍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만약 성해의 난류가 흑마족이 설치한 핏빛 대진법을 뚫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연합의 제자들은 아마도 반 넘게 죽어 버렸을 터였다.
이때 간신히 살아남은 연합의 제자들이 뿔뿔이 전함으로 물러났다.
흑마족도 지휘에 따라 물러나기 시작했고, 검은 부도 방향으로 향했다.
양측 사람들이 완전히 물러나기도 전에, 서남쪽에서 다시 한번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함 위에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던 연합 쪽 사람들은 전함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성해 한쪽 끝은 마치 꺼져버린 듯이 수십 장 깊이 검은 구멍이 몇 개나 동시에 나타났다.
검은 구멍은 끝없이 깊었고, 난류는 마치 칼처럼 위와 아래를 갈라놓았다. 검은 운석들은 이 회색빛에 닿자마자, 곧바로 가루가 되었다.
수십 장 길이인 회색 빛기둥 몇 갈래가 찢어진 구멍에서 뿜어 나왔고, 마치 먹구름을 뚫어버린 햇빛처럼 성해에 수백 장이나 되는 옅은 막을 만들어냈다.
“상황이 다급하다. 빨리 물러나야 한다!”
금색 전함 위에 있던 성계 장로들은 이런 엄청난 난류 폭발을 처음 보는 터라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때 옅은 회색 막에서 금빛이 번쩍였다. 옅은 금색 물결이 회색 막에서 퍼져나갔고, 순식간에 주변 백 리를 쓸어버렸다.
커다란 전함 위에서 빛이 깜박이더니, 밝게 빛나던 자리가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모든 전함은 마치 동력을 잃은 듯이 성해에 멈춰있었다.
옅은 회색 막에서 갑자기 금빛줄기가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사람들 앞에 나타난 건,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 옥으로 만든 궁궐이었는데, 막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궁전이 어렴풋이 보였고, 그 지붕 위에는 노란 유리기와가 겹겹이 쌓여있었으며, 가운데는 동태유금(銅胎鎏金)이었고, 네모난 처마 위에는 각각 날개를 단 흉수들이 한 마리씩 앉아있었다.
궁전을 둘러싼 네 벽은 붉은색이었고, 가장 앞쪽 금으로 만든 굵은 기둥을 황금용이 칭칭 감고 있었으며, 그 위에 초록색 구(球)가 두 개 달려있었다. 또한 위에 구름 문양이 옅게 새겨져 있는 모양새가 매우 화려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궁전의 문은 텅 비어있었고, 문과 문틀이 없어서 조금은 적막해 보였다.
궁전 앞쪽에 커다란 석대가 두 개 있었고, 석대 위에는 유금동정(鎏金銅亭)이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는데, 전부 높이가 구 장 정도 되는 고풍스러운 모형이었지만, 그 쓸모를 알 수 없었다.
유금동정 둘 사이에 낀 건, 너비가 십여 장이나 되는 청석 길로, 그 길 위에는 골짜기가 파여 있고, 청석들은 뒤집혀 있었는데, 마치 거대한 쟁기로 갈아놓은 듯이 몇 줄로 부서져 있었다. 청석 길 양옆에는 백옥 조각상들이 수십 쌍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머리는 짐승에, 몸은 사람이었고 우의(羽衣)를 입고 있었다. 조각상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거나, 심지어 부서진 것들도 있었지만,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붉은 대전 뒤편과 백 장 정도 떨어진 자리에 별궁들이 즐비해 있었다.
다만 가장 앞에 있는 대전과 비교했을 때, 이 별궁들은 더욱 많이 파괴되어서 대부분은 이미 완전히 무너진 채, 담벼락만 그대로 서 있었다.
하지만 그 규모를 보면, 어느 하나 가장 앞쪽에 있는 건물보다 작지 않았다.
대전이 감싼 곳엔 파란 조각달 모양의 호수가 있었는데, 안개가 자욱했고, 보라색 노을이 감돌고 있는 모양새가 마치 신선이 사는 곳처럼 보였다.
궁궐 뒤쪽을 바라보면, 회색 막의 변두리가 있었고, 푸른색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마치 원시림 같았다.
이 회색빛이 보여주는 풍경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건, 이 궁전에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살아 숨 쉬는 것들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외곽에는 옅은 금색 결계가 보일 듯 말 듯 드리워 있었다.
금색 전함에 서 있던 몇몇 성계 장로들은 이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며 난해한 표정을 드러냈다.
다른 한쪽, 흑마족 우두머리들도 전부 어안이 벙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