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폐성(廢星)
성역 어딘가, 석목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깨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석목은 옅은 금빛 구에 둘러싸여 있었다. 드넓은 운석 조각 위에 떠있었는데, 연나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석목은 눈을 감고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영력이 흐르는 게 순조롭지 못한 것 말고는, 원래 입은 상처는 이미 칠에서 팔 할 정도 회복했다. 석목은 곧바로 진기를 써서 허공에서 일어섰다.
석목이 일어서자, 석목을 둘러싸고 있던 금빛 구가 터져버렸다.
이어서 석목은 주변을 둘러싼 불안정한 혼돈의 힘이 자신을 향해서 밀려오는 걸 느꼈다. 성해 난류만큼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석목에게 침투하고 있었다.
다행히 석목이 수련한 현공은 몸속에 있는 음과 양의 기운을 자연스레 평형을 이루게 만들어 주었고, 이런 약한 혼돈의 힘은 석목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석목은 정신을 가다듬고서 다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몸에 있는 영력을 써서 신식을 통해 연나와 연락을 시도했다.
얼마 전 벌어진 전투에서 연나는 크게 다쳤고, 이렇게 사라져버려서 괜찮은지 걱정이 되었다.
잠시 후에 석목은 두 눈을 뜨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령계로 돌아가지 않은 걸 보니, 아마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연나와 석목은 매우 미약하게 연결이 되어, 조금 걱정이 되었다.
석목은 등 뒤 날개를 활짝 폈고, 주변을 감싸고 있던 운석 조각을 뚫고서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 성해에는 커다란 운석 파편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크기가 수십 리나 되는 것도 있었으며, 그 위에서 고등 문명이 남겨놓은 흔적들을 어렴풋이 찾아볼 수 있었다. 보아하니 얼마 전에 폐허로 변한 것 같았다.
연나와 연결이 너무 미약해서 조금만 정신을 다른 곳에 두어도 연결이 끊어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석목은 너무 빨리 날지 않았고, 운석 조각들이 널브러진 성해를 반 각 정도 돌아다녔다. 그리고 커다란 운석에 내려앉았다.
갈색 운석은 벌거벗은 듯이 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석목은 땅에 내려오기 전에 이미 어두워진 은색 빛을 발견했다.
연나는 몸에 은색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연나!”
석목은 눈을 반짝이며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은빛 속 연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고, 아름다운 두 눈은 꼭 감고 있었으며, 구부러진 눈썹 사이로 미간을 찌푸린 채 간간히 몸을 한 번씩 튕기고 있었는데,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연나가 입던 은색 갑옷은 하얀 궁장으로 바뀌었는데, 매우 가녀리게 보였다. 연나의 몸을 덮고 있던 은빛마저 혼돈의 힘이 침투하여 매우 어두워졌고, 마치 곧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석목이 연나를 안고서 손을 흔들었다. 부드러운 파란빛이 손바닥에서 뿜어 나왔고, 연나를 감쌌다.
막이 나타나자, 연나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은빛이 곧바로 터져버렸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두 손가락을 붙여서 조심스럽게 연나의 이마를 살짝 짚었다. 옅은 파란색 빛이 연나의 몸에서 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잠시 후에 석목은 손을 거두었고, 연나는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고 혼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석목은 마음을 놓았다. 곧바로 연나를 찾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목이 일어서서 영우비차를 불렀고, 연나를 안고서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성해에 푸른 자국을 만들어내며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이곳은 석목이 잘 모르는 구역이었지만 부석 성해는 아니었다. 이 구역이 머금고 있는 혼돈의 힘은 너무 강력해서 우선 빨리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석목은 연나를 데리고 폐허 속을 이리저리 비집으며 다녔고, 운석 파편들은 점점 적어졌다.
족히 세 시진이나 날아서야, 이 별들의 폐허 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
둘러싼 운석 파편들을 벗어나자, 시야가 확 트였다. 먼 하늘에 드리운 별빛과 뭉게구름이 칠흑 같은 하늘과 어우러져서 더없이 깊고 아름답게 보였다.
하지만 석목은 풍경을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그은 전속력으로 날아갔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황토색 행성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 * *
반나절 뒤, 황토 행성 위.
굽이굽이 이어진 산봉우리 위에 두터운 분홍빛 먹구름이 떠있었다. 먹구름 가운데서 갑자기 붉은빛이 번졌고, 별똥별과 같은 붉은 자국이 그 구름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붉은빛이 먹구름을 뚫어버린 순간, 커다란 불덩어리로 변하여 화염 꼬리를 달고서 허공을 지나 산봉우리 위에 떨어졌다.
쿵!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산봉우리가 흔들리더니 삼할 정도가 파였다.
불덩어리가 떨어진 자리에 한 장 정도 깊이의 구멍이 생겼다. 이어 수많은 불길이 그 속에서 치솟았고, 다시 산봉우리 다른 자리에 검은 웅덩이를 만들어냈다.
웅덩이에서 파란빛이 반짝였고, 타오르던 화염들은 순식간에 꺼졌다. 하얀 물거품이 그 속에서 들끓었고, 주변 십 장을 덮어버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하얀 물거품은 천천히 사라졌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이 나타났다. 석목과 연나였다.
석목이 지금 이룬 경지로는, 전송진법이나 대형 전함을 이용하지 않고서 오롯이 몸의 힘만으로 온전한 행성 속을 뚫고 지나갈 수 없었다. 행성이 인력으로 묶어둔 성운들만으로도 석목은 갈기갈기 찢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황토색 행성이 머금고 있는 영기는 매우 희박했고, 이 별 밖엔 성운말고 아무것도 없었다. 매우 얇은 혼돈의 힘만 유유하게 널려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별은 석목이 지나온 길에서 보았던 별들의 폐허처럼 부서질 터였다. 그것은 십 년 뒤일 수도, 또는 몇 십 년 뒤가 될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석목은 매우 큰 위험을 무릅썼다. 현공의 힘을 전부 써서 음양합일을 이뤘고, 혼돈의 기운으로 영우비차와 연나, 그리고 스스로를 꽁꽁 감싸고는 곧바로 이 황토색 별로 들어왔다.
그러나 이 별에는 소름 돋을 정도로 원기가 없어서, 드러나는 흡인력이 여전히 매서웠다. 석목은 이미 온힘을 다해서 영우비차가 내려가는 속도를 늦췄지만, 어쩔 수 없이 충돌하듯 떨어졌다.
석목은 신음소리를 내며 피를 한 모금 뱉어냈다. 그리고 연나를 안고서 영우비차에서 뛰어내렸다.
석목은 먼저 영우비차에 뚜렷하게 금이 간 걸 한 번 바라봤고, 다시 품속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연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떨어질 때, 석목은 온힘으로 연나를 보호했다. 연나가 떨어지는 충격을 받았어도,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석목은 손을 흔들어서 영우비차를 거뒀고, 연나를 안은 채 웅덩이에서 뛰어나왔다.
석목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고,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산봉우리는 전체가 황갈색이었고 큰 암석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산은 적나라하게 벗겨진 채, 아무런 식물도 자라나지 않아서 매우 황량했다.
우르릉!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미 매우 두터워진 먹구름 속에서 파란 번개가 번쩍였다.
산봉우리에서도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땅 위 먼지가 온천지에 휘날렸고, 허공은 뿌옇게 변했다.
석목은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한번 바라보았고, 다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갈색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이 별은 원기가 남해성보다도 희박했고, 영지선초는 물론 꽃과 나무마저도 드물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전부 깊게 파인 산골짜기와 커다란 웅덩이뿐이라, 대지 전체가 상처투성이 같았다.
오랜 시간 동안 절제하지 않고서 영광(靈礦)을 채굴하며 남긴 흔적인데, 영맥 마저 손상을 입어서 이런 광경이 나타났다.
아마 이 행성도 어떤 종문이나 가족이 다스렸을 터였고, 발전을 도모하려고 희생시켰을 터였다.
이 별이 처했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석목도 막연하게 연나를 데리고 종문이나 가족이 엮인 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인적이 드문 산봉우리가 가장 머물기 적합했다.
잠시 후에 석목은 연나를 안고서 산꼭대기 허공에 떠있었다.
석목은 산봉우리를 감싸고돌았다. 여긴 짙은 갈색 암석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고, 다행히 햇빛이 비치는 산봉우리 한쪽에 동굴이 하나 있었다.
쿵!
하늘에서 또다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번개가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이어 커다란 빗방울이 석목의 뺨에 떨어졌다.
석목은 빗방울이 끈적이는 느낌이 들었는데, 얼굴에 떨어진 게 비가 아니라 걸쭉한 기름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석목은 곧바로 흰 구름을 타고 산꼭대기에 내렸다.
그리도 다시 동굴 앞에 나타나서 안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동굴은 반원 모양이었는데, 높이가 십 장 정도 되었고, 양쪽 벽면에 암석들이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만든 것 같지는 않았다.
동굴 속은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석목은 이내 신식을 보내서 탐색을 했다.
하지만 신식이 막 들어갔을 때, 강렬한 파동이 동굴에서 흘러나왔고, 광풍이 갈색 모래를 휘감은 채로 동굴 속에서 불었다.
이어서 동굴에선 또다시 큰소리가 울려 퍼졌고, 몸집이 십 장 정도 되는 큰 새가 날아왔다.
동굴에서 나온 새는 곧바로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 위로 올라가서 산꼭대기를 둘러싸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움직이지 않고서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큰 새를 한번 바라보았다.
이때 오랫동안 먹구름 속에 쌓여있던 비가 드디어 쏟아졌다.
주룩, 주룩.
끈적이는 빗방울이 토를 하듯 쏟아졌고, 석목은 몸에 하얀빛을 뿜으며 자신과 연나를 감쌌다.
빗방울이 하얀빛에 뚝뚝 떨어졌고, 곧바로 뜨거운 양의 힘이 들끓더니, 회색 안개로 흩어졌다.
커다란 새는 끈적이는 비를 맞으며 두 눈을 초롱초롱 떴고,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의 실력을 가늠해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석목은 기운을 감추었고, 조금도 흘려보내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새는 석목이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듯,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두 눈에서 붉은빛을 흉악하게 내뿜었다. 그리고 두 날개를 강하게 흔들더니, 커다란 몸집이 허공에서 회색 그림자를 드리우며 석목을 향해 공격했다.
큰 새는 석목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보았고,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쓱!
회색빛이 갈고리처럼 큰 입에서 뿜어 나왔다.
회색빛이 튀어나오자, 곧바로 빙빙 돌기 시작했고, 허공에서 아직 떨어지지 않은 빗방울들이 회색빛에 말려들어 몇 장 높이의 회오리바람으로 변해서 석목을 공격했다.
이때 석목이 한 손을 들었고, 손바닥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손을 대충 휘두른 후, 연나를 안고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하얀빛이 손에서 튕겨 나간 후, 눈 깜짝할 사이에 물회오리와 부딪쳤다.
격렬한 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고, ‘퍽’ 하고 가벼운 소리만 들리더니 물회오리는 가운데가 갈라져 두 덩어리로 변했다.
그 뒤를 바짝 쫓아오던 큰 새의 머리에 한 줄기 핏줄이 생겼다.
펑!
두 덩어리로 갈라진 커다란 시체는 동굴 앞 땅 위에 떨어졌다. 몸통 반쪽이 커다란 동굴을 막아버렸다.
석목은 이미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뒤돌아보지 않고서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