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화. 의식불명
이 동굴은 매우 넓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생긴 동굴이라 평평하지 않았다. 석목은 연나를 안고서 동굴을 한참 굽이굽이 돌아서야 가장 깊은 곳에 도착하자 십 장 정도 되는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은 궁륭(穹窿) 구조였는데, 위쪽엔 작은 구멍 몇 개가 비스듬히 뚫려서 몇 줄기 빛을 투사하고 있었고, 그 빛이 벽에 넓게 퍼져서 하얀색 광석 아래가 유난히 밝았다.
석목은 주변을 한번 훑어보더니, 동굴 깊은 곳에 멈춰 섰다. 마른 풀이 깔린 커다란 둥지가 하나 있었고, 그 안에 사람만 한 푸른 알이 일고여덟 개 놓여있었다.
조금 전에 날아나간 커다란 새의 둥지였다.
석목은 우선 연나를 평평한 자리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후, 커다란 알들을 일일이 꺼내서 마른풀을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연나를 안아서 다시 조심스럽게 풀 위에 올려놓았다.
이곳은 깊은 동굴 속이었지만 습하지 않았고, 오히려 건조하고 따뜻했다.
석목이 마른풀 끝자락을 뒤적이고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마른 풀 밑에 크고 작은 염양옥석(炎陽玉石)들이 가득 깔려있었는데, 아마 큰 새가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준비한 것 같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석목은 푸른 피풍의를 한 벌 꺼내서 연나의 몸에 덮었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단약과 영석을 꺼낸 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고, 석목이 쥐고 있던 영석은 이미 회백색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피곤한 기색은 많이 가신 것 같았고, 두 눈도 맑아졌다. 강제로 이 행성으로 뚫고 들어오면서 입은 상처도 많이 나았다.
석목은 다시 고개를 돌려 마른풀에 누워있는 연나를 바라보았다. 연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두 눈을 꾹 감고 있었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가닥이 부드러운 볼에 붙었다. 예전과 달리 연나는 매우 연약해 보였다.
고통스러운 기색이 조금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멈칫한 석목은 자색 옥병에서 금단 한 알을 꺼내서 곧바로 연나의 입가에 가져다댔다.
이 금단은 대곡단(大斛丹)인데, 석목이 가진 단약 중에 등급이 가장 높은 단약이었다. 뼈와 근육을 치료하고, 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효과가 있었다. 대곡단은 석목이 요새에서 임무를 집행하는 도중에 우연히 얻은 유일한 단약이었다.
연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단약을 삼킬 수 없었다.
석목은 연나의 볼을 살짝 짚고는 단약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손에 부드러운 빛을 뿜어내며, 단약을 연나의 배로 흘러가게 만들었다.
시간이 일다경 정도 흘렀다. 대곡단은 약효를 다했지만, 연나는 여전히 혼수상태였고, 심지어 고통스러운 기색마저 여전했다.
석목은 한참 침묵하더니, 다시 손을 흔들었다. 하얀 탑이 빙글빙글 돌며 나타나서 연나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그리고 하얗고 옅은 막을 만들어냈다.
옅은 빛이 떨어지자, 연나는 미간이 조금 풀어지는 것 같아 석목은 매우 기뻐했고, 이 정신탑이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효과를 보여준 것 같았다.
시간이 한참 흘렀고, 탑은 연나의 고통만 조금 덜어줬을 뿐, 연나를 깨우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석목은 한숨을 내뱉으며 정신탑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천천히 연나의 손을 들어 올려서 자기 손과 맞붙였다.
석목은 입에서 낮고 어려운 주문 소리를 냈고, 몸에서 파란빛이 물결처럼 일렁였다. 따뜻한 빛들이 석목의 손바닥에서 연나의 손바닥으로 흘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연나의 아름다운 얼굴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서서히 줄어들었고, 표정은 점점 온화해졌다. 연나는 마치 달콤한 꿈을 꾸는 소녀 같았다.
연나는 긴 속눈썹을 몇 번 움직였다. 순간 석목은 연나가 깨어나려는 줄 알고 맞붙이고 있던 손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연나는 깨어나지 않았다.
연나의 모습이나 풍기는 기운은 평범한 인족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석목은 잘 알고 있었다. 연나는 여전히 사령이었다.
연나는 석목을 구하기 위해 연이어 성계 존재와 싸웠다. 앞뒤로 소요와 막린우라는 성계 강자들과 싸웠고, 그 뒤에 갑자기 성해의 난류가 나타났다. 연나는 자신의 안위를 신경쓰지도 않았고, 혼돈의 힘이 스며드는 걸 온몸으로 부딪쳤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혼에도 손상을 크게 입었을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감개무량했다.
우연한 기회에 연나를 영총으로 거두었는데, 지금 이 백골은 석목보다 더 강해졌다. 물론 여전히 석목을 신경 쓰지 않는척했지만, 위기 때마다 나타나서 목숨을 걸고 지켰다.
석목은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말할 수 없었다.
석목은 생사를 함께 했던 순간들을 일일이 떠올렸다.
특히 성해의 난류에 부딪쳤을 때, 연나가 석목을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움직인 걸 떠올리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솟구쳤다.
연나의 눈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석목은 깜짝 놀랐다.
석목은 꽉 잡고 있던 연나의 손을 놓고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검은색 작은 깃발과 하얀 골편(骨片)을 몇 개 꺼내서 연나 주변에 금제 진법을 설치했다.
석목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연나를 한번 바라보고는, 다시 돌아서서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동굴까지 걸어 나온 석목은 문을 막고 있던 커다란 사체를 암벽까지 차버렸고, 그 속에서 걸어 나왔다.
하늘은 다시 맑게 갰다. 끈적이는 빗방울이 짧게 쏟아진 후, 땅은 더욱 부드럽고 푹신해졌다.
석목은 동굴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손을 흔들었다. 땅에 부문이 가득 적힌 작은 깃발들을 꽂은 후, 또 다른 금제 진법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미 손상을 입은 영우비차를 불러서 날아갔다.
* * *
반각 후, 석목은 다시 수 리 정도 되는 갈색 산골짜기에서 내려왔다.
산골짜기는 온통 적갈색 암석뿐이었고, 이삼십 장 사이를 두고서 한 장 정도 되는 동굴이 있었다. 구역질이 나는 악취가 캄캄한 동굴 속에서 흘러나왔다.
석목이 한 손을 들자, 다섯 손가락 끝에서 붉은빛이 뿜어 나오더니, 다시 엄지만 한 불덩어리들이 손바닥에서 뭉치며 천천히 허공에 떠올랐다.
석목은 주변 동굴 몇 곳을 훑어보고는, 손바닥을 흔들었다. 다섯 불덩어리가 점점 커져서 위아래를 떠다니며 날아갔다. 그리고 가운데서 여러 개로 나뉜 후, 흩어져 동굴들 속으로 들어갔다.
펑, 펑!
끊기지 않는 폭발 소리와 함께 땅 위 자갈들이 쿵쿵대는 소리와 함께 튕겨 올랐다.
석목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라 서 있었다.
석목이 모습을 드러내자, 동굴 수십 곳에서 붉은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두꺼운 회색 갑옷을 두른 멧돼지처럼 생긴 요수가 동굴들 속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텅텅 비어있던 산골짜기가 꽉 찼다.
멧돼지들이 촘촘하게 서 있었고, 그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수천 마리 되는 것 같았다.
“아.”
동굴 속에서 튀어나온 멧돼지들은 허공에 서 있는 석목을 보지 못했고, 각자 흉악한 이를 드러내며 빙글빙글 돌면서 분노에 차서 울부짖었다.
석목은 고개를 숙여서 한번 훑어보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멧돼지들은 대부분 실력이 후천이었고, 일 할 정도만 선천에 도달한 실력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영지가 없어 보였다.
이 행성엔 천지원기가 너무 희박했다. 석목이 한참 동안 신식으로 수색을 해서 이 산골짜기에 혼잡한 영력 파동이 존재한다는 걸 찾았다. 하지만 결국 발견한 건 전부 저급 요수들뿐이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숫자도 많았다.
석목은 한 손을 흔들어서 입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어 뒤통수에서 은백색 조각달이 나타나 차가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산골짜기 위엔 언제인지 모르게 붉은 불구름이 뭉쳐있었고, 그 속에서 구름이 소용돌이쳤고, 마치 활활 타오르는 화염 같았다.
“떨어져라!”
석목이 한 손을 아래로 짓누르듯 움직였다. 붉은 불구름은 속에서 소용돌이를 치더니, 이내 들끓듯 눈부신 불빛을 뿜어내었다. 맷돌만 한 불덩어리들이 그 속에서 줄줄이 뿜어 나왔고, 마치 별똥별이 떨어지듯 하늘을 뒤덮으며 쏟아졌다.
우르릉!
하늘에서 불비가 쏟아지며 산골짜기를 뒤덮었다. 화염이 여기저기서 터졌고, 불빛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으며, 먼지와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치솟았다. 부서진 암벽에선 암석들이 쏟아지듯 굴러 떨어져 골짜기 사이를 메웠다.
하늘을 찌르는 불꽃과 포효소리가 한동안 온 천지에 울려 퍼졌다.
한참 후에 줄줄이 이어진 푸른 혼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먼지 속에서 천천히 솟아올랐고, 석목은 그 혼들을 전부 긁어모아 수혼 주머니에 넣었다.
석목은 수혼 주머니를 거두어들인 후, 무너진 돌덩이들로 반이나 차버린 산골짜기를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산골짜기 서쪽으로 날아갔다.
대략 반나절 정도 날아가자, 푸른색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공기 속 천지원기는 점점 짙어졌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아래를 향해 내려갔고, 신식을 보내 대지를 탐색했다.
잠시 후에 푸른 산맥 상공에서 붉은빛이 밝아졌고, 십 장 정도 되는 커다란 주먹 그림자가 하늘에서 떨어지며 무겁게 땅을 내리찍었다.
쿵!
하늘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산맥 전체가 격렬히 흔들렸다.
눈에 보이는 기운 파동은 주먹이 떨어진 숲을 중심으로 주변을 쓸었다.
주변 나무들은 허리가 끊어지듯, 중간에서 전부 부러져 버렸다.
석목이 허공에서 내려와 낭패를 본 숲에 섰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선천경계의 동요(藤妖) 사체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었다.
이미 여러 토막으로 끊어져 버린 동요들 위에서 초록색 혼이 흘러나왔고, 전부 석목의 수혼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너무 약해, 아직 부족해……”
석목은 손에 든 수혼 주머니를 주물럭거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몸에 빛을 번쩍이며 다시 하늘로 날아가 서쪽으로 향했다.
* * *
초저녁.
한 검은 성 밖 산 위에서 석목은 평평한 돌 위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두 손에 영석을 쥐고서 진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수혼 주머니는 이미 볼록해졌고, 많은 요수들의 혼이 담겨 있었다.
반나절 동안, 석목은 지나간 곳에 있던 모든 요수를 죽여 버렸다.
이 요수들은 전부 경지가 선천이나 그 아래인 하급 요수들이라 죽이는데 많은 진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 비행을 했고, 신식으로 넓은 범위를 탐색하느라 석목은 많이 피곤했다.
잠시 후에 석목은 주먹을 풀어서 영력이 사라진 영석 두 개를 버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목은 검은 성을 한번 바라보았다. 석양이 성벽에 옅은 황금색을 한층 칠해놓았고, 그 순간 석목은 고향이 그리워졌다.
고향에서 살았던 기억들은 마치 전생에 겪은 일인 듯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날아오는 동안 석목은 성을 일고여덟 개 지났다. 고향은 눈앞에 놓인 검고 작은 성과 비슷한 규모였는데, 그중 가장 큰 성이라 해도 남해성에 자리한 천우성보다도 훨씬 작았다.
그리고 숲이 울창한 산맥 깊은 골짜기에서 석목은 크고 작은 종문 세력들을 발견하였다. 전부 모종의 방법으로 숨어있었고, 또 금제 결계를 두른 곳도 있었지만, 석목은 그것들을 전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석목은 성이나 종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석목은 빨리 요수들의 혼을 수집해야 했고,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이곳에서 잠시 머문 후, 석목은 영우비차를 불러서 왔던 길로 다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