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화. 돌파 실패
석목은 연나가 깊은 곳에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아서 지금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다.
분신은 아래를 향해 수십 장 깊이까지 내려가서야 드디어 샘 끝부분에 도착했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샘 끝부분에 몇 장 정도 크기인 균열이 있었는데, 안쪽에서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균열의 안쪽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공간 균열 옆에 사람만한 검은색 안개 구체가 있었고, 조금 전 분신을 감고 있던 안개고치와 매우 비슷했다. 주변 마기가 끊임없이 구체 가운데로 모여들어 소용돌이를 하나 만들어냈다.
마기 사이로 연나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고, 강력한 기운 파동이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이 위압감은 분신이 경지 돌파를 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연나는 어떤 비술을 써서 주변 마기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기운 파동으로 봤을 때, 연나는 이미 상처를 많이 회복했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연나를 방해하지 않고서 분신을 시켜 주변을 둘러보게 했다.
바다 깊은 곳에 있던 암석엔 오랜 시간 마기가 묻어있어서 이미 전부 검은색으로 변하였고, 몇몇은 마정과 비슷했는데 마정보다 더욱 매섭고 차가운 빛을 풍겼다.
검은 돌이 마기를 가득 머금고 있어서 석목은 분신에게 돌들을 챙기도록 시켰다.
분신은 계속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돌들 근처는 그리 넓지 않아서 빠르게 한 바퀴 돌 수 있었는데, 검은 돌 말고 별다른 물건은 없었다.
석목은 지루하여 분신을 연나와 멀지 않은 곳에 앉힌 후, 조용히 연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순식간에 이틀이나 흘렀다.
연나는 몸에 두르고 있던 마기가 점점 짙어졌고, 몸에서 흘러나오는 법력 파동도 점점 격렬해졌다. 마기를 흡입하여 만들어낸 소용돌이도 점점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연나를 감싸고 있던 검은 마기가 갑자기 격렬하게 소용돌이쳤고,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방대한 위압감이 연나의 몸에서 풍겼고, 거의 성계 수준에 도달한 듯했다. 마기가 섞인 주변 바닷물이 격하게 흔들리더니, 바깥쪽으로 밀려나서 거센 바람이 이는 것 같았다.
분신은 단번에 위압감 때문에 날아가서 무겁게 벽에 부딪쳤다.
다행히 분신은 몸이 단단해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분신은 몸을 한번 구르더니, 곧바로 일어서서 위쪽을 향해 날아갔다. 십 장 정도 날아서야 서서히 멈추었고, 다시 연나를 바라보았다.
연나 주변을 맴돌던 검은 마기는 마치 영성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난 검은 빛이 연나의 몸에서 풍겼고, 또다시 눈부신 하얀빛이 뿜어 나왔다.
검은색과 하얀색 두 갈래 빛이 서로 엉겨 붙어 연나의 등 뒤에 검은색과 흰색 꽃을 각각 하나씩 만들어냈다.
연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두 손을 흔들며 법결을 펼쳤다.
등 뒤에 있던 흑백 두 꽃이 천천히 몸속으로 스며들었는데, 속도가 매우 느린 게 억지로 구겨 넣는 것 같았다.
석목은 눈을 반짝였고, 그는 고작 천위 초기 경지였지만, 성전각에서 많은 전집을 읽으며 그 뒤 경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꽤 많았다.
연나의 등 뒤에 생긴 흑백 꽃봉오리는 성계에 진입하는 과정 중에 응결시킨 성배였다.
성배를 응결시키고, 또 순조롭게 몸과 조화를 이뤄야만, 진정으로 성계에 이를 수 있었다.
한데 연나의 모습을 보니 그리 순조롭지 않은 것 같았다.
이때 연나의 몸에서 빛이 격하게 흔들렸고, 윙윙 낮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등 뒤에서 흑백 꽃이 격렬한 파동을 일으키며, 커다란 소리와 함께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강한 법력 파동이 주변으로 흩어졌고, 바닷물이 다시 한번 출렁이기 시작했다.
분신은 파도가 몸에 닿기 전에 곧바로 위쪽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잔잔해진 다음에야 다시 아래로 향했다.
바다 깊은 곳, 연나 주변 검은 기운과 검은빛들이 전부 사라졌고, 연나는 움직이지 않고서 그곳에 서있었다. 성계 돌파에 실패한 듯이 얼굴에 생기를 잃었는데, 표정에서는 기쁨이나 슬픔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검은 그림자가 반짝였고, 분신이 날아서 내려가 연나의 몸 앞에 떨어졌다.
“오히려 네 분신이 이곳에서 경지를 돌파했구나.”
연나는 분신을 한번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경지 돌파에 실패한 것 같은데 몸은 괜찮아?”
석목은 분신을 통에 입을 열었다.
“괜찮아. 원기만 조금 소모되었어.”
연나가 말했다.
“급할 필요 없어. 이미 경험이 두 번 생겼으니, 다음번에는 꼭 될 거야.”
석목이 말했다.
“그러겠지. 그런데 마기가 이렇게 짙은 곳은 찾기가 어려워.”
연나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 이곳에 왜 마기가 흘러들어오는지 알고 있어? 혹시 흑마 성역과 연관이 있는 걸까?”
석목이 또 물었다.
“두 성역 사이에 특별한 이유로 공간 통로가 몇 개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야. 아마 오래전에 이곳에서 성계 경지를 뛰어넘는 사람들이 격렬한 싸움을 치렀을 수도 있어. 다만 봉인된 결계가 시간이 오래 흘러서 파손된 것 같아.”
연나가 말했다.
“그럼 흑마족이 공간 균열을 통해서 이곳에 나타날 수 있을까?”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이 균열은 부석 성해와 달라. 규모도 훨씬 작을 뿐만 아니라, 아주 불안해서 기껏해야 마기나 좀 흘러나오는 정도야. 생령은 절대 통과할 수 없어.”
연나가 말을 하며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스쳤다.
“우선 여기서 머물면서 원기를 좀 회복해. 방해하지 않을게.”
연나의 모습을 본 석목은 분신을 통제하여 위로 날아가게 했다.
“잠깐만.”
연나가 갑자기 석목을 불러 세웠다.
“네 분신은 이곳에서 이미 실력을 올릴 수 없게 된 거지?”
연나는 분신을 한번 훑어보더니 말했다.
“맞아. 분신은 더 이상 여기 마기를 삼킬 수 없어. 혹시 이유를 알고 있는 거야?”
분신이 입을 열어서 말을 했고,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이 분신은 평범한 분신이 아니야. 마기를 삼키는 방법으로 지계까지 도달한 것 자체도 쉽지 않지. 이제 계속해서 분신의 실력을 높이려면, 공법을 수련해야 돼. 보통 수련자처럼 천천히 경계를 돌파하면서 실력을 키워야 해.”
연나는 분신을 한번 흘겨보더니, 말을 이었다.
연나가 짓는 표정을 본 석목은 당황했다. 연나가 처음으로 석목 앞에서 이런 표정을 지었다. 연나는 늘 차가운 모습만 보여주었다.
연나는 분신의 표정이 바뀌는 걸 보더니, 곧바로 알아차렸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돌아왔다.
연나가 손을 흔들자, 검은 기운이 손에서 흘러나와서 검은색 옥간이 되었다. 연나는 옥간을 분신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안에 흑마족 공법이 하나 있어. 성계 마족인 소요가 수련한 공법인데, 내가 소요의 혼을 삼킨 후로 이 공법을 익히게 되었지. 꽤 괜찮은 공법이고, 그 속에 대단한 마족들의 신통력도 몇 개 들어있으니, 분신이 쓰기에 딱 알맞을 거야.”
“그래. 고마워.”
분신은 옥간을 받으며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동안 나를 위해서 곳곳에서 요수를 사냥하며 혼을 수집했잖아.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한다면, 내가 훨씬 더 많이 해야겠지.”
연나는 말하면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연나가 웃자, 마치 세상 만물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고, 주변 모든 것들이 자취를 감추는 것 같았다.
석목은 한참 동안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됐어. 여긴 마기가 짙어서 수련하기에 적합할 거야. 빨리 가봐. 나도 원기를 회복해야지.”
연나가 손을 흔들며 다시 앉았다.
연나가 중얼거리자, 주변 마기가 몰려와서 몸을 감쌌다.
석목은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분신을 옆에 있는 또 다른 돌에 앉힌 후, 검은 옥간을 보며 수련하기 시작했다.
옥간 속에 적힌 공법은 마살천나공(魔煞天羅功)이라는 공법인데, 매우 어렵고 현묘했다. 석목이 수련한 명수결과 비슷했다.
마살천나공은 총 열다섯 단계가 있었고, 흑마족의 상급 마공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정상까지 수련을 하면 신에 가까운 경지에 이른다고 했다.
석목은 벅차오르는 기분을 억누르며, 분신에게 공법을 따라 수련을 하도록 시켰다.
분신 주변 마기가 점점 몸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 * *
바다 위, 팽형 일행은 커다란 용 모양 비차 위에 서있었다.
팽형은 안색이 어두웠고, 다른 사람들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팽형 일행은 바다에서 며칠 동안 이곳저곳을 뒤졌다. 지도에 표시된 위치를 따라서 날아다닌 덕에 석목이 남긴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지만, 그 뒤로 더는 석목이 남긴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팽형 일행은 바다를 며칠이나 뒤집고 다녔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원성, 그 두 사람이 지도에 적힌 표시에 따라 요수를 사냥하러 다닌다며? 왜 아무런 결과가 없는 거야!”
팽형이 갑자기 돌아서서 얼굴이 각진 원성에게 화를 내며 소리 질렀다.
“우리가 처음에 찾아낸 흔적들은 아마 그 두 사람이 남긴 것일 겁니다. 혹시 이미 떠난 게 아닐까요?”
원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못난 놈들! 방법을 좀 생각해봐. 나, 팽형이 어떤 수모를 당했는데, 그 여자를 꼭 가져야 해. 그리고 그놈을 죽여야만 내 화가 풀릴 것 같다고!”
팽형이 원성을 한번 노려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주변에 서있던 사람들은 전부 고개를 숙였다. 눈썹이 위로 찢어진 남자만 뒷짐을 지고서 먼 곳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학 형, 왜 그러세요?”
팽형은 한참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더니, 옆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에서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어. 마기 같아.”
눈썹 끝을 치켜뜬 남자가 말했다.
“마기!”
팽형은 안색이 변했다.
비록 이곳은 미양 성역 안쪽이었지만, 부석 성해와 흑마족이 대전을 치른다는 사실이 여기까지 전해져서 마와 관련된 모든 일들은 사람들에게 주의를 끌었다.
“어차피 당분간 찾을 수 없을 것 같으니 가봅시다.”
팽형이 말했다.
눈썹 끝이 올라간 남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팽형이 손을 흔들어 비차의 방향을 바꿨고, 마기가 흘러나오는 쪽을 향해 날아갔다.
* * *
샘 속, 검은 기운이 번쩍이며 연나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연나가 눈을 뜨더니 일어섰다.
연나는 얼굴에 반딧불처럼 빛이 반짝였고, 성계 경지 돌파를 위해서 소모한 원기가 반 이상은 회복이 된 것 같았다.
연나는 눈길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석목의 분신이 검은 마기를 감싼 채 고치처럼 되어있었다.
고치 속 분신에서 일곱 갈래 검은빛 끈이 반짝이고 있었다.
분신은 연나가 깨어난 걸 느낀 듯, 몸에 검은빛을 반짝였다. 분신을 감싸고 있던 마기가 전부 흩어졌고, 검은빛의 끈 일곱 가닥도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분신은 몸속 마기가 이미 지계 초기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마살천나공의 육 단계 공법을 물 흐르듯이 단번에 익혔다.
“원기는 다 회복한 거야? 그렇다면 이곳을 떠나자.”
분신이 연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분신을 덥석 잡더니, 위를 향해 날아갔다.
은빛이 금색 막을 뚫고 나와서 금색 진법 위에 나타났다.
빛이 다시 한번 반짝였고, 연나와 분신이 나타났다.
“몸을 영체로 바꾸는 능력이 대단하군. 이렇게 강력한 봉인도 없는 양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니.”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석목이 일어서며 말했다.
석목이 손을 흔들자, 분신이 검은빛으로 변하여 영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냥 공간 신통일 뿐이야.”
연나가 말했다.
“그렇군. 내가 잘못 봤구나.”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연나를 바라보며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삼켰다. 욕심이 나는 신통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해서 배워두면, 앞으로 꽤 유용하게 쓰일 것 같았다.
“이 신통은 내 본원의 힘을 써서 만들어낸 거야. 고민할 필요는 없어. 너는 못 배워.”
연나는 석목이 하는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연나, 몸이 전부 회복된 것 같으니, 이제 길을 떠나자.”
석목이 멈칫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연나가 고개를 끄덕였고, 먼저 바다 위로 올라갔다.
석목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연나는 표정이 조금 차가워 보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