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화. 동천복지(洞天福地)
천은성은 미양 성역 삼대 성지 중에 하나로 이진종이 있는 곳이었다. 이 사실은 미양 성역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천은성은 땅덩어리가 드넓고 영기가 매우 짙었다. 행성은 육 할이 바다였다. 그리고 육지 대부분은 현철대륙(玄徹大陸)과 동이대륙(東離大陸)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진종은 현철대륙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다와 가까이에 있는 현철대륙 동쪽에 한뢰성(瀚雷城)이라는 큰 성이 하나 있었는데, 성과 구백 리 정도 떨어진 바다에 큰 섬이 하나 있었다.
섬은 이름이 운정선도(雲霆仙島)이며, 바로 이진종의 종문이 위치한 곳이었다.
운정선도는 하늘에 일 년 내내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고 구름에 보라색과 푸른색 번개가 뱀처럼 꿈틀대며 여기저기서 번쩍이는데 그 소리가 백 리 밖까지 울려 퍼졌다.
섬 주변 검은 구름에는 굵직한 번개가 시도 때도 없이 떨어졌다. 그 위력은 매우 강력해서 수련자들 말고 평범한 사람들은 아무도 운정선도 가까이에 다가가지 못했다.
섬 주변을 이진종이 커다란 금제로 둘러싸서, 먼 곳에서 바라보면 검은 점만 하나 보였다.
이날, 하늘은 맑게 갰고 바닷바람이 살살 불었다.
바다 위에 짙푸른 빛이 번쩍이더니 주위로 물결이 일렁였다.
하얀 백학 한 마리가 한뢰성에서 날아서 운정선도로 향했다.
백학은 등이 매우 넓어서 열 몇 명이나 설 수 있었는데 지금은 두 명만 그 위에 서 있었다.
키가 훤칠한 청년이 푸른색 도포를 둘렀고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단정해 보였다. 다만 보라색 눈썹이 조금 눈에 거슬렸다.
다른 한 명은 여도사였는데 키가 컸고 긴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왔으며 얼굴에 짙게 분을 칠하여 매우 요염해 보였다.
“이렇게 정교한 이경환골지술(移經換骨之術)을 부릴 줄 알다니. 내 역골결 보다 훨씬 뛰어나잖아.”
눈썹이 보라색인 청년이 말했다.
외모가 요염한 여도사는 차가운 표정을 짓고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네 행동거지와 외모가 좀 맞지 않아. 운정선도에 가면 곧바로 들켜버릴 거야.”
눈썹이 보라색인 청년이 요염한 여도사를 한번 바라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석목과 연나였고 이날 둘은 진강 일행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청란성지로 가는 길은 꽤 오래 걸려서 곤륜비경에 갈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리하여 가짜를 진짜로 바꿔치는 방법을 생각했다.
석목과 연나의 용모는 얼마 전에 자신들을 공격했던 뇌적과 임도처럼 바꾸었고 이대로 이진종으로 들어가서 곧바로 곤륜비경에 갈 작정이었다.
“하하. 뇌 사형, 과한 걱정입니다. 사매는 알아서 잘할 테니 너나 신경 쓰시죠.”
연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는데 갑자기 표정이 매우 요염해졌다.
하지만 그 표정은 단 한 순간일 뿐 곧바로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연나를 본 석목은 멈칫하더니 이어서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남의 탈을 쓰고 다른 사람인 척 하는 일은 수도 없이 해봤던 터라, 석목은 이런 일이 너무 익숙했다.
두 사람이 몸에 지닌 옷가지, 반지, 영패 같은 물건들은 전부 뇌적과 임도의 물건이었다. 그밖에도 석목은 이미 그 뇌적과 임도의 혼을 뒤져보았다. 두 사람은 뇌폭과 멸선곤 때문에 혼이 많이 파손되었지만, 뇌적과 임도의 신상과 운정선도에 대해서 꽤 많은 정보를 알아냈기 때문에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석목과 연나가 타고 있는 하얀 백학은 뇌적이 키우고 있던 비행 영수였다. 연나는 신혼 비술을 사용해서 백학을 길들였다.
한뢰성은 운정선도와 만 리 정도만 떨어져 있어서 두 사람은 잠깐 사이에 운정선도 근처까지 날아갔다.
석목은 눈빛이 살짝 변했다. 운정선도는 매우 드넓었는데, 섬 전체에 거대한 보라색 결계가 드리워져 있었다. 역시 이진종은 큰손이었다.
보라색 결계에 번개가 맴돌고 있었는데 매우 수준이 높은 번개 결계 같았다.
석목은 보라색 영패를 꺼내 들었다. 영패 한쪽에는 태극음양어(太極陰陽魚) 그림이 새겨져 있었고 또 다른 쪽에는 팔괘도가 새겨져 있었다. 영패는 뇌적의 신분을 드러내는 영패였다.
석목이 영패 속에 진기를 불어넣자 영패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보라색 빛이 튀어나와 결계에 스며들었다.
결계에 순식간에 커다란 틈이 생겼고 하얀 백학은 날개를 펼쳐서 하얀빛으로 변하더니 날아 들어갔다.
결계 속으로 들어가자, 눈앞 풍경이 완전히 변하여서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비록 뇌적의 부서진 혼에서 대강 풍경을 보긴 했으나 직접 와보니 여전히 놀라웠다.
눈앞에 무릉도원 같은 선경이 펼쳐졌는데 푸른 산과 맑은 물, 그리고 구름이 흩날리고 있었다.
앞쪽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구름을 찌르고 있었고 산맥은 줄줄이 이어져 멀리까지 널려있었다.
산봉우리 곳곳에서 간간이 부드러운 빛이 뿜어 나와 백 리를 비추었다. 산봉우리 사이에는 선학영금(仙鶴靈禽)이 무리를 지어 날아다녔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울려 퍼져서 산골짜기에서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산봉우리에 높이가 다른 건물들이 수도 없이 붙어있었다. 이진종은 도교 종파라 건물들이 소박했지만 도관들은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산봉우리 사이마다 묵직하고 오색영롱한 광선들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다녔고 빛이 반짝이는 광경을 보니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더 멀리 내다보면 산들이 겹겹이 수려하게 서 있었고 그 위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선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은 동천복지(洞天福地)인 절경이었다.
“가자.”
이때 연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석목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옷매무새를 다잡았다. 이어서 법결을 써서 백학을 타고 앞쪽 광장으로 날아갔다.
드넓은 광장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팔괘 모양이었다.
광장엔 보라색 옥석이 깔려 있어서 거울처럼 매끄러웠으며 햇빛이 반사되어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가운데에는 커다란 동정이 아홉 개 놓여 있는데 구궁 모양이었다. 동정은 전부 이삼 장 높이였고 그 속에서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향기가 그윽했다.
광장 구석에는 각각 전송진법 여덟 개가 하나씩 놓여 있었고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석목과 연나는 광장에 내려왔다.
눈앞 산맥은 십극산맥(十極山脈)이라 불렸다. 비록 운정선도 위에 놓여 있지만 청란성지와 같이 일계를 이루고 있어서 매우 광활했다.
산봉우리들은 모두 이진종의 외문 제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내문 제자들이 머무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 십극산맥 깊은 곳에 있었다.
광장에 놓인 전송법진 여덟 개는 전부 십극산맥에 있는 산봉우리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여덟 곳과 닿았는데, 각각 건(乾), 태(兌),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이라 불렸다. 그리고 산봉우리 위에는 커다란 도관이 하나씩 놓여 있었고 똑같이 팔괘 이름으로 불렸다. 이진종의 내문 제자들은 각각 이 여덟 도관에 속했다.
이 정보들은 전부 석목이 혼을 뒤져 알아낸 정보였다. 석목은 연나와 가장 왼쪽에 있는 전송진법으로 걸어갔다.
전송진법은 여덟 도관 중에 이화관(離火觀)과 연결되어 있었고 뇌적과 임도가 소속된 곳이었다.
“뇌적, 임도.”
이때 어떤 남자가 두 사람을 불렀다.
석목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속으로 참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제 막 도착했는데 벌써 사람을 만났다.
석목과 연나는 서로 한번 마주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둘은 멈칫했다.
백 장 거리 밖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와서 석목과 연나 앞에 나타났다.
후덕하게 생긴 남자는 큰 귓불이 어깨까지 드리워 흔들거렸다.
또 다른 사람은 미모가 아름다운 소녀였는데, 보라색 치마를 입고서 긴 머리카락을 드리우고 있었다. 서문설이었다.
석목은 실눈을 뜨더니 속으로 당황했다. 뇌적은 혼이 심하게 파손되었고 신혼 비술로 기억을 전부 되돌릴 수는 없었다. 혼을 통하여 얻어낸 정보들 중에 귓불이 큰 남자에 관한 기억은 없었다.
“왜 이제야 오는 건가? 사존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렸다. 아, 왜 둘 뿐인 건가? 진강과 다른 사람들은?”
귓불이 큰 남자는 석목과 연나를 한번 바라보며 물었다.
석목이 초초해하며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그 일은 사존님께 보고를 하려고 했습니다. 임무에 차질이 생겨서 백운관의 배신자들이 도망을 쳤습니다. 서문 사매는 쫓아가기를 거부했고 함부로 대오를 떠났습니다. 진강 사형은 배신자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저와 뇌적 사형,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계속 쫓아갔는데, 배신자들에겐 또 다른 패거리들이 있었습니다. 덫에 걸려서 격전을 치르는 동안, 진강 사형과 다른 사형, 사제들은 죽어버렸습니다. 저와 뇌적 사형만이 간신히 살아남았지요.”
연나가 화가 난 목소리도 말했고 한 손으로 서문설을 가리키고 있었다. 눈에는 온통 화를 내는 기색이 어려 있었다.
“뭐? 사실인가?”
귓불이 큰 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랐다. 한쪽에 서 있던 서문설은 안색이 굳었다.
“저희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진강 사형이 죽어버렸는데, 사실이 아닐 리 있겠습니까!”
연나는 소리를 질렀고 눈시울마저 붉어졌다.
귓불이 큰 남자는 안색을 굳히더니 고개를 돌려서 서문설에게 물었다.
“서문 사매, 왜 백운관 사람들을 쫓아가지 않았는가?”
“큰 사형, 진강 사형과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되어서 저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임도 사저가 말한 내용과는 다릅니다. 그날 제가 떠난 이유는, 진강 사형이 육랑 사제를 죽여 버려서 마음이 좋지 않아 대오를 떠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내버려 둔 것이 아닙니다.”
서문설은 곧바로 냉정을 되찾으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귓불이 큰 남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진강 사형과 제자들 열 몇 명이 죽었다니. 빨리 사존님께 알려서 결정을 내리시도록 하자. 다들 따라와.”
귓불이 큰 남자는 한참 침묵하더니 깊은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어서 귓불이 큰 남자는 이화관 방향 전송진법으로 걸어갔다. 서문설은 고개를 돌려서 석목과 연나를 한번 바라보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바로 귓불이 큰 남자 뒤를 따라갔다.
석목은 어안이 벙벙해져 연나를 한번 바라보았다. 연나가 너무 비슷하게 연기를 하고 있어서 놀란 동시에 자괴감이 들었다.
연나는 다시 냉정을 되찾았고 석목을 한번 쳐다보더니 곧바로 앞으로 걸어갔다.
연나의 뒷모습을 본 석목은 놀란 마음을 진정하며 뒤를 따라갔다.
* * *
석목, 연나와 서문설 세 사람은 큰 사형 뒤를 따라 이화관으로 가는 전송진법 속으로 걸어갔다.
네 사람이 똑바로 서자, 각자 들고 있던 팔괘 그림이 새겨진 동패에서 이화관 위치에 빛이 번쩍였고 진법 속으로 날아가더니 빛이 크게 번지며 네 명을 삼켜 버렸다.
석목은 천지가 흔들리는 것만 같았고 눈앞 풍경이 뒤로 밀려나자 또 다른 구역에 도착했다.
진법에서 걸어 나오자 짙은 천지영기가 몰려왔다. 이 구역 영력은 청란성지 이 층과 비슷할 정도였다.
푸른 산봉우리가 수천 리나 이어져 있었고 가까이에 있는 산들과 맞닿아 파도가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눈 끝에 걸린 희미한 산봉우리는 마치 명주실을 두른 듯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짙푸른 산봉우리 사이에 은백색 영폭이 사이사이 끼어 있었고 끝없이 펼쳐진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햇빛이 쏟아지는 곳에 무지개가 높이 떠서 매우 아름다웠다.
가장 웅장한 산봉우리는 선산비경처럼 흰색 연기 속에 묻혀있었다.
석목은 눈빛이 반짝였다. 뇌적의 기억에 따르면 이곳은 이화봉이었다.
“진강 사제는 교만한 사람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사존님의 직전제자다. 사존께서 많이 아끼셨던 사람이지. 이 일을 알게 되시면 크게 노하실 거야. 잠시 후에 사존님을 뵙게 되면 꼭 말을 조심해야 해.”
큰 사형이 전송진에서 걸어 내려오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려서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눈앞에 서있는 착하게 생긴 큰 사형에게 호감이 조금 생겼다. 석목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하자 연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사존님 성격을 우리가 모를 리 없지요. 우리도 감히 심기를 건들지 못합니다. 백운관에서 벌어진 일은 사실대로 보고하고 다른 말은 더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연나는 서문설을 한번 째려봤다.
서문설은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