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도발하다
주전 밖, 석목을 비롯한 세 사람이 나와 먼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산 세 개가 둘러싼 골짜기에 도착했다.
산봉우리는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고 건물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줄줄이 이어져 있다. 이것들은 이화관의 제자들이 머무는 동부였다.
석목은 눈빛이 반짝였다. 이진종의 내문 제자들은 각각 단독으로 동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전부 산봉우리 위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청란성지보다 훨씬 작아보였다.
이진종의 제자들은 종문에서 내린 임무를 수행하며 수입을 얻었고 청란성지처럼 영지를 주는 건 따로 없었다.
석목과 연나는 뇌적과 임도가 머물던 동부 위치를 이미 알아두었다. 연나는 석목을 한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임도가 쓰던 동부 방향으로 날아갔다.
서문설은 차갑게 석목과 연나를 한 번씩 번갈아 보았고 고개를 돌려서 또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옥석이 깔린 길 위에 석목만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석목은 외롭게 그곳에 서 있었다.
석목은 고개를 들어서 길게 한숨을 내뱉었고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방향을 확인한 후 뇌적이 쓰던 동부 쪽으로 날아갔다.
뇌적이 머물던 동부는 한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밖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이 쓰던 동부와 다른 점이 없었다. 하지만 들어가 보면 안쪽은 꽤 넓었다.
사면이 하얀 옥으로 만들어진 벽이었고 그 위에 진법을 드리우고 있었다. 가장 밖에는 작은 약초 정원이 하나 있었다.
안쪽에 방이 여러 개 있었는데, 안방 외에도 침실, 비밀 석실, 그리고 연기실도 하나 있었고 연단실도 하나 있었다. 필요한 게 전부 있어서 석목이 쓰던 동부보다 훨씬 좋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석목은 이 물건들이 필요 없었다.
이밖에도 무엇 때문인지 뇌적은 동부 안에 시종을 비롯한 사람들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석목은 동부의 곳곳에 금제를 다시 설치하였고 그제야 마음을 놓고서 단약을 꺼내서 삼켰다. 그리고 눈을 감고 앉아있었다.
반나절이 지나 석목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으며, 몸속 상처는 전부 회복되었다.
석목은 가볍게 소리를 내더니 손을 흔들어서 보라색 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검 위에는 번개가 번쩍였는데, 영성이 풍부한 게 엄연히 법보 급인 검이었다.
검에는 ‘파뢰(破雷)’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파뢰검은 뇌적이 지니고 있던 검인데 가장 많이 사용하던 본명 법보였다.
석목이 입을 벌려 흑백 불꽃을 뿜어내어 파뢰검에 드리웠다. 그리고 몸속으로 거두어들여 빠르게 제련을 시작했다.
석목은 한편으로 파뢰검을 제련하며, 한편으로는 신식을 뇌적이 쓰던 저장 반지에 보냈다.
잠시 후에 보라색 빛이 반짝이며 옥간이 하나 나타났고 그 위에 ‘경뢰검결(惊雷劍訣)’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석목은 옥간을 이마에 대고 신식을 보내서 자세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비록 겉은 뇌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나중에 곤륜성허 선발을 할 땐 직접 나서야 했으므로, 그동안 뇌적이 쓰던 술법들을 잘 익혀두어 들키는 일이 없어야만 했다.
석목은 눈썹을 치켜들었다가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얼굴에서 놀라움이 스쳐 지났다.
‘경뢰검결’은 매우 정밀했는데 ‘대일검결’보다 높은 수준인 것 같았다. 짧은 시간 안에 확실히 익히려면 꽤 신경을 많이 써야만 했다.
석목은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고 눈을 감고 수련을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며칠이 흘렀다. 석목이 눈을 번쩍 뜨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보라색 검이 입에서 날아 나왔고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 위에 보라색 번개가 맴돌았고 칙칙 소리를 냈다.
석목이 중얼거리며 두 손을 흔들었고 검결을 만들어냈다.
보라색 검에 번개가 크게 번졌고 몇 장 정도 되는 커다란 뇌검으로 변하였다. 그 위에서 팔뚝만 한 보라색 번개가 무서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뇌검이 동부 속에서 여기저기를 휘갈기며 다녔고 빠른 속도로 빛이 줄줄이 모여서 망을 만들어냈다.
석목이 머리를 끄덕였고 얼굴에 미소를 띠며 검결을 하나 펼쳤다.
검 그림자가 허공에서 흩어졌고 보라색 검이 손에 들어왔다.
구전현공을 세 번째 단계까지 수련한 후 음양 합일을 완벽하게 꿰뚫은 석목은 균형을 유지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터득했다. 공법 무기를 여러 개 익힌 후 석목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아서 경뢰검결을 반 이상이나 깨우쳤다. 뇌전비검도 어느 정도 제련이 되었다.
뇌검과 공법을 합친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곧 대일검결을 따라잡을 것 같았다.
대일검결도 경뢰검결 못지않게 정교했지만 청명검과 대일검결은 궁합이 잘 맞지 않아서 대일검결이 가진 진정한 위력을 쓸 수 없었다. 석목은 그 점이 늘 아쉬웠다.
석목은 속으로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불 속성 검을 찾아서 대일검결과 함께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석목은 파뢰검을 거두어들인 후 눈에 빛을 반짝이더니 일어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청란성지와 이름을 나란히 하고 또 삼대성지 중 하나인 이진종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았다. 석목은 이진종의 상황을 잘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일전에 뇌적의 혼에서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망가진 정보라 한 바퀴 둘러봐야만 했다.
* * *
석목은 빠르게 동부에서 나갔고 백학을 부른 후에 동부 주변을 한참 동안 돌아다녔다. 그리고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진종은 분위기가 청란성지와 매우 달랐다.
석목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안색이 변했다. 멀지 않은 곳에 보라색 옷을 입은 소녀가 오색 비단을 밟고서 날아오고 있었는데 서문설이었다.
서문설은 석목을 한번 바라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석목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가운 얼굴로 옆을 스쳐 지났다.
석목은 서문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기색을 내비쳤다.
석목은 멋쩍게 코를 한번 만지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뇌적의 기억 속에 서문설과 관련된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석목이 봤을 때, 뇌적과 서문설은 사이가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석목은 고개를 흔들며 더는 생각하지 않았고 다시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곧바로 주변 지형과 건물들을 전부 기억해 두었다.
석목이 다른 곳을 둘러보려고 할 때 뒤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석목은 멈칫하더니 곧바로 백학을 밟고 그곳으로 날아갔다.
먼 산골짜기에 있는 빈 땅에 이화관 제자들이 모여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았고 서문설도 그곳에 있었다.
석목은 잠깐 망설이더니 백학에서 내려왔다. 골짜기와 멀지 않은 곳에서 백학을 거두어들였고 편안해 보이는 걸음으로 향했다.
골짜기 속, 이화관 제자들은 전부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제자들 앞에 보라색 피풍의를 두른 청년들이 몇 명 팔짱을 끼고 서서 길을 막았다. 청년들은 얼굴에 온통 경박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석목은 몇몇 청년들을 훑어보더니 눈에 빛이 반짝였다. 청년들이 입은 옷자락에는 파란색 물결 부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감수관(坎水觀) 표시였다.
이진종의 여덟 도관, 비록 똑같은 내원 제자들이지만 도관마다 관계가 그렇게 우호적인 것 같지는 않았다. 도관들은 여러 가지 일로 인해 시비가 붙었고 특히 감수관과 이화관은 앙숙이었다.
“이철(李澈), 너희 감수관 사람들이 우리 이화관에는 왜 왔어? 골짜기까지 막아버리고!”
“좋은 개는 길을 막지 않는다고 했지. 비키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커가 훤칠하고 머리가 갈색인 청년이 사람들 속에서 걸어 나와 목소리를 누르며 말했다.
“어이구, 임동(林董) 형이 아닙니까! 허허, 별일 아닙니다. 이화관의 진강 사형이 얼마 전에 임무를 수행하다가 자칫 잘못하여 죽어버렸다기에 안타까워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동문이니 특별히 위로를 전하러 왔습니다.”
감수관 제자들 중에 음침한 기운을 풍기는 머리가 푸른 청년이 말했다.
머리가 푸른 청년은 애통한 말을 하고 있었지만 표정으론 위로를 하는 뜻이 눈곱만치도 없었다. 오히려 고소해하는 것만 같았다.
“진강 사형은 종문을 위해 배신자와 싸우다 희생을 하신 거다. 너희들이 모욕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임동이 화를 내며 말했다.
“하하, 고작 백운관이잖아. 우리 감수관에서 부공 요새의 변경까지 파견된 몇몇 사형들은, 흑마족의 천위 강자들과 싸우면서도 적잖게 죽이고 돌아왔어!”
머리가 푸른 청년이 웃으며 유유자적하게 말했다.
청년이 하는 말을 들은 이화관의 제자들은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성격이 급한 몇몇 제자들은 몸에 기운이 크게 번지며, 싸우려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진강은 이화관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수였다. 진강이 살아있을 때, 이화관에 꽤 많은 영광을 안겨주어 제자들 사이에서도 위세와 명성이 높았다.
그런 진강이 죽어버리자 이화관도 실력이 많이 떨어졌다.
“감수관 사형 여러분, 우리 이화관이 변고를 당한 것을 알고서 이렇게 도발을 하러 온 건가요?”
이때,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서문설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아, 이게 뉘신가? 이화관 제일 미녀 서문 사매가 아닌가? 오해를 하시는군요. 저희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습니까?”
머리가 푸른 청년은 서문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길을 비켜 주세요. 만약 싸우고 싶은 거라면, 언제들 함께하겠습니다.”
서문설이 이를 악물고 차갑게 말했다.
서문설이 말을 뱉기 바쁘게 몸에 옅은 하얀빛이 한 층 나타났다.
“맞습니다. 언제든 놀아드리겠습니다.”
서문설이 말을 하자 다른 제자들도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머리가 푸른 청년을 비롯한 감수관 사람들은 이화관 제자들이 하는 말을 듣더니 서로 마주 보았다.
감수관 제자들이 온 이유는 뻔했다. 진강이 죽어버리자 도발을 해서 이화관의 기를 꺾어버리려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댈 생각은 없었는데 서문설이 화를 내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대로 돌아가면 또 체면이 말이 아닐 터였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서문 사매는 미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실력도 대단하다는 걸요. 저는 별 볼일 없는 놈이라 사매님께 한 수를 배우려 했는데 사매가 체면을 좀 살려주시겠습니까?”
머리가 푸른 청년 옆에 서 있던 머리가 회색인 청년이 말했다.
머리가 회색인 청년은 키가 훤칠했고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칼자국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흉터는 붉은 지네 같이 매우 추악했다.
석목이 머리가 회색인 청년을 한번 훑어보았다. 청년은 수련 경지가 서문설과 같이 천위 초기였다. 하지만 몸엔 살기가 매우 짙었다. 특수한 공법을 수련한 것인지 아니면 살생을 너무 많이 저질러서 저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낭곤(郎堃) 사형이군요. 더 길게 말할 필요 없습니다. 나오세요!”
서문설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
서문설은 손에 하얀빛이 번쩍이더니 옥치가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옥치에서 하얀빛이 크게 번졌다. 차가운 기운이 밀려나더니 주변 땅에 서리가 한 층 깔렸다.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은 전부 뒤로 물러났고 석목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화관 제자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사람들이 전부 물러나기도 전에 촘촘한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고 한 장 정도 되는 얼음 창 수십 개가 서문설의 몸 앞에 나타났다. 서문설이 옥치를 가볍게 흔들자 모든 얼음창이 뿔뿔이 날았는데 마치 힘이 센 화살들 같았다. 창들은 하늘을 뒤덮으며 낭곤에게로 날아갔다.
낭곤의 손에도 검은 칼이 한 자루 나타났다. 손목을 가볍게 움직이자 칼 위에 매서운 빛이 나타났고 주변을 휩쓸며 수십 장 길이 칼 그림자로 변하여서 앞에서 날아오는 얼음창들을 맞았다.
펑! 펑! 펑!
얼음창들은 거의 동시에 전부 터져버렸고 부서진 얼음들이 주변으로 튕겨 날아갔다.
낭곤이 일부러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얼음 조각들이 전부 석목 쪽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한 손을 짚어서 몸 앞에 파란빛을 번쩍였고 몸 앞으로 날아오던 얼음 조각들은 단번에 사라졌다. 아무도 얼음 조각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보지 못했다. 이어서 석목은 몇 번 움직이더니 이삼십 장 뒤로 날아가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