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단동(丹童)
“몇 년 동안 못 봤는데 뇌적 사제는 실력이 이 정도로 늘었군. 대단한 방법입니다. 아주 대단합니다.”
머리가 푸른 청년은 석목을 바라보더니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이철 사형이 크게 칭찬을 하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이화관에서 충분히 기세를 보여주신 것 같은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떻습니까?”
석목은 실눈을 뜨고서 피하지 않으며 상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석목은 손에서 보라색 빛을 거두어들였다. 오른손에 드리운 비늘과 흑백 빛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허허. 오늘 낭곤 사제와 서문 사매는 단순히 대결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뇌적 사제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저희도 당연히 체면을 지켜드려야지요. 갑시다.”
머리가 푸른 청년인 이철은 허허 웃더니 핏빛 칼을 들고서 손을 흔들었다. 옆에 서 있던 사람들도 낭곤을 부추기며 골짜기에서 먼 곳을 향해 날아갔다.
“뇌적 사형,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석목을 바라보는 서문설은 눈에 기이한 빛이 스쳤다. 서문설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동문인데 도와주는 건 당연합니다. 서문 사매는 신경 쓰지 마세요.”
석목이 담담하게 말하며 서문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학을 불러 위에 올라탔다.
백학은 영성이 있는 짐승이라서 석목이 손가락을 짚자 곧바로 날아올라 동부 방향으로 날아갔다.
다른 이화관 제자들이 길을 내주었고 뇌적으로 변신한 석목을 바라보는 눈빛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머리가 갈색이며 키가 큰 청년인 임동도 석목을 바라보는 눈빛이 복잡했다.
하지만 이화관 제자들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멀지 않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동부 입구에서 자태가 요염한 여도사가 꼿꼿이 서 있었다.
여도사는 백학에서 눈길을 돌려 다시 산골짜기 입구에 있는 서문설을 바라보았다. 이어 여도사는 돌아서서 동부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도사는 얼굴이 물처럼 차분했고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뇌적 사제는 늘 겸손한 태도를 보였는데 그 실력이 이렇게 대단하다니. 언뜻 보면 진강 사형보다 실력이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요! 그러고 보니 뇌적 사제가 밖에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지 오래된 것 같습니다.”
“뇌적 사제는 몇 년간 진강 사형을 따라다녔고 진강 사형과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낭곤이 재수가 없어서 뇌 사제와 맞닥뜨린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이번 곤륜성허 선발 말입니다. 우리 이화관은 진강 사형이 사라지는 바람에 성적이 좋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뇌적 사제가 있으니 또 희망이 생긴 것 같습니다.”
이화관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말투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서문설이 그 자리를 떠난 사실마저 알아차리지 못했다.
골짜기에서 격렬한 싸움을 치렀지만 결투는 짧은 시간 안에 끝나버려서 이화관의 장로들이 알아차린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한참 동안 침을 튀기며 대화를 나누더니 뿔뿔이 흩어져 각자 볼일을 보러 갔다.
* * *
석목은 밖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곧바로 동부로 들어가 문을 닫고 앉았다. 마음속에서 짜증이 밀려왔다.
조금 전에 벌어진 일은 마땅치 못했다. 하지만 서문설이 위험에 처한 것을 보자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심지어 신분마저 들통이 나서 연나와 함께 위험에 처할 뻔했다.
하지만 나약한 서문설을 떠올리자 또다시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어렸다.
한참 후에 석목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며 벌어진 일을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어서 석목은 가부좌를 틀고서 계속 파뢰검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폐관한 지 며칠이 지났고 ‘뇌적’이 다시 동부 밖에 나타났다.
석목은 백학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이화봉 방향으로 날아갔다.
반 시진 후, 백학은 머리를 아래로 향했고 날개를 펄럭이며 이화봉 산중턱을 향해 내려갔다.
그때 석목은 산중턱 동부 앞에 키가 훤칠한 사내가 앉아있는 광경을 보았다.
사내가 옷자락을 휘날리자 몸 앞에서 금빛이 반짝였다. 이어서 넓적한 파초선(芭蕉扇)이 허공에 나타났고 바람을 따라 살살 움직였다. 사내는 몸이 번쩍이더니 파초선 위에 나타났다.
“큰 사형.”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인사를 올렸다.
파초선에 서 있던 훤칠한 남자는 다름이 아니라 이화관의 큰 사형인 온화였다. 두 사람은 전에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아, 뇌 사제. 무슨 일로 찾아 왔는가?”
석목이 온화 앞에 다가오자 온화는 인사치레를 하지 않고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큰 사형께 여쭤볼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큰 사형께선 어디 가시는중인 것 같은데 볼일이 있으신 거라면 먼저 가 보시죠.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괜찮다. 편하게 물어보렴.”
온화가 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큰일은 아니고 곤륜성허 선발에 관련된 일입니다. 종문에서 어떻게 진행할 예정인지, 혹시 알고 계신가 궁금했습니다.”
석목이 물었다.
“아, 그 일 말인가? 지금까지 전해들은 소식으로는, 반년 뒤에 종문에서 곤륜성허에 갈 제자들을 뽑을 예정이다. 그때 성주께서도 함께 곤륜성허로 가기로 하셨다.”
온화가 말했다.
“혹시 뽑는 방식은 결정이 되었나요?”
석목이 물었다.
“어떤 방식으로 선발을 할지는 아직 종문에서 확정을 짓지 않아서 자세한 부분은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 내원의 팔대 도관에서 후보를 선발하는 건 확실하고, 또 천위 경지 무인이나 일계 술사만 선발에 참여할 자격이 있지.”
온화가 말했다.
“그렇군요.”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 혹시 참여할 의향이 있으면 반년 동안 잘 준비를 해야 해. 때가 되면 알려줄게.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가 보겠네.”
온화가 석목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큰 사형, 감사합니다.”
석목은 허리를 굽혀서 인사를 했다.
온화는 석목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법결을 쓰자 온화가 밟고 있던 파초선이 하늘로 날아올라서 금색 빛으로 변하더니 멀리 날아가 버렸다.
석목도 오래 머물지 않고, 백학을 소환하여 방향을 돌리며 이화봉 뒤쪽으로 날아갔다.
* * *
석목은 백학이 이끄는 가운데 이화봉과 거리가 좀 떨어진 보라색 안개를 감싼 산봉우리에 내려섰다.
산봉우리가 자리한 위치는 매우 특이했다. 주변 산봉우리들 보다 조금 낮아서 마치 분지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주변에 모여있는 천지원기는 매우 짙었다.
산봉우리 꼭대기에는 궁궐들이 작게 지어져 있었는데 보라색 안개가 건물들 사이에서 피어 올랐다.
궁궐 가장 앞쪽엔 붉고 커다란 패루가 하나 서 있었고, 그 위에 거대한 편액이 하나 걸려있었다. 그 위에는 ‘단허(丹墟)’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긴 이진종이 연단을 하는 장소인데 건물 앞 광장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석목은 백학에서 내려와 발길이 닿는 대로 건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석목은 붉은 패루를 가로질러 가장 앞쪽에 있는 대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한번 바라보고 곧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에 진열된 장식들은 단조로웠다. 양쪽에 나무 선반이 몇 개 놓여있었고, 중간에는 긴 장방형 탁자 하나와 커다란 옥판이 하나 놓여있었다.
커다란 옥판은 대전 뒤쪽 벽에 바싹 붙어서 벽을 반이나 가려 놓았다. 그 앞에 장방형 탁자가 놓여있었다.
탁자 뒤에 어린 아이가 앉아있었고, 아이는 손에 고전을 하나 들고서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었는데 석목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는 듯했다.
“콜록.”
석목은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함부로 말을 걸지 못하고서 낮게 기침 소리를 냈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단약을 받으러 오신 건가요?”
기침 소리를 들은 아이는 고개를 들며 손에 든 책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석목에게 물었다.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건 ‘청단경(靑丹經)’이라는 초급 연단 비급(秘笈)이었다. 아마 어느 연단 장로가 밑에 둔 단동(丹童)이리라 추측한 석목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오늘은 왜 네가 이곳에 있는 거냐?”
“오늘 원래는 노(盧) 대사님께서 당직을 서시는 날인데 때마침 대사님께서 만드신 단약이 완성되어서 단약방에 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곳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사형께선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단동은 사부님을 위해 일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닌 듯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석목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익히려고 했지 단약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단동이 이렇게 물어보니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경지를 돌파하려고 하는데 적당한 보조 단약이 있는가?”
“경지를 돌파할 때 쓰이는 단약 종류는 매우 많고 각 단계마다 다릅니다. 또한 필요한 자금점(紫金點)도 크게 다르지요……. 사형께서 직접 한번 둘러보시고 혹시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그때 제가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단동은 석목이 하는 말을 듣고서 입술을 깨물며 한참 동안 고민을 한 후에 말했다.
이어서 단동은 긴 옥여의(玉如意)를 한 자루 꺼내서 장방형 옥판 위를 가볍게 짚었다.
그러자 옥판 위에 하얀빛이 흘러 다녔고 네모난 금색 글씨가 가득 나타났다.
석목이 옥판을 대충 훑어보니 촘촘하게 쓰인 글씨는 전부 단약 이름과 등급에 대한 설명, 그리고 필요한 자금점이었다. 그 중에는 매우 희귀한 단약들도 있었다. 최상급으로 분류되는 원양단을 봤을 때 석목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석목은 저장 반지에서 뇌적의 자금각(紫金珏)을 꺼내들었다.
자금각은 청란성지의 현령벽과 같았다. 종문의 공훈점을 저장하는데 쓰였고, 단약을 얻는데 필요한 자금점이 이 자금각에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석목은 자금각을 손에 들었다가 다시 거두어들였다.
자금각은 현령벽처럼 혈계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석목은 뇌적의 혼을 찾거나 또 뇌적처럼 변장을 할 수는 있었지만 자금각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석목은 자금각에 자금점이 얼마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앞에 서 있는 단동은 매우 영리해 보였다. 만약 뇌적의 자금각 속에 적힌 자금점이 단약을 바꾸는데 충분하지 않다면 의심을 해서 위험해질 수 있다.
“내 자금각은 원양단을 바꾸기에 부족하다. 하지만 최상급 영석은 꽤 많이 가지고 있지.”
석목은 단동을 살짝 떠보았다.
“사형, 최상급 영석으론 단약을 직접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훈전에 가서 최상급 영석을 자금점으로 바꿔서 단약을 살 수는 있습니다.”
단동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하더니 이런 제안을 했다.
“어이구, 헛걸음을 친 것 같군. 고맙다.”
석목은 툴툴대는 척을 하며 말했다.
단방에서 나온 석목은 다시 백학을 불러서 다른 산봉우리 방향을 향해 날아갔다.
* * *
석목이 향한 산봉우리에 자리 잡은 건 단동이 말한 공훈전이 아니었다.
산봉우리는 거리가 멀었다. 백학은 일주향 정도 날아서야 산꼭대기가 아닌, 산중턱에 내려앉았다.
산중턱 절벽에 커다란 동굴이 하나 있었다.
석목은 동굴 앞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동굴 위쪽에 붉은 글씨로 ‘영추대(靈樞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동굴 입구에 금빛이 한층 드리웠는데 매우 강력한 금제 결계였다.
석목은 손을 흔들어 보라색 동패를 꺼내서 앞으로 들어 올렸고, 동패에서 한줄기 빛이 날아가 금제 속으로 스며들었다.
금제에 사람 한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틈이 하나 벌어졌고, 석목은 망설이지 않고서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