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537화 (537/916)

537화. 입탑

초원을 벗어나니 지세가 울퉁불퉁해졌다. 원시림이 뒤덮인 산들이 줄줄이 나타났고 공기 속엔 나무 속성 영기가 아주 짙었다. 그리고 이곳은 바다 위 섬이었다.

석목은 속이 탔다. 나무 속성 영기가 워낙 짙어서 구전현공을 써 나무 속성 영기를 전부 삼켜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다.

여긴 이진종이 관리하는 탑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관주들이 어떤 수단을 써서 안쪽 상황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을 게 뻔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명수결마저 쓰지 못하고, 제련한 지 얼마 안 된 파뢰검으로 날고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석목은 산맥 상공에서 날아다니며 왼쪽을 바라보았다.

보라색 굵은 빛이 먼 곳에서 날아왔다. 하지만 석목과 부딪치자 곧바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얼마 전, 밖에서 선포한 규칙을 따르면 제자들끼리 전투를 벌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각자 경쟁을 하기 때문에 적의가 가득할 터였다.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니라면 최대한 서로 경계하는 편이 상책이었다.

석목은 굵은 빛을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거두고 계속해서 앞으로 날아갔다.

한창 날아가고 있는데 아래쪽에 있는 숲에서 푸른 그림자가 덮쳤다.

석목은 곧바로 멈추었다. 이어서 십 장 정도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났다. 석목은 푸른 그림자를 피했다.

푸른 그림자가 멈춰 섰고, 자세히 바라보니 일고여덟 마리나 되는 늑대 괴물이었다. 몸집은 사람만 했고 온몸에 짙푸른 빛을 풍기고 있었다. 머리에는 푸른색 외뿔이 하나 자라있었으며 입에는 뾰족한 이빨이 아무렇게나 뻗어있어 매우 흉악스러워 보였다.

“아, 환수였구나.”

석목이 괴물들을 한 번 훑어보았다.

늑대 괴물들은 평범한 요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몸에서 짙은 요기를 풍겼지만 강력한 요기는 아니었다. 선천 정상인 실력이었다.

크엉!

석목이 습격을 피해내자 괴물들은 다시 돌아서서 먼 곳으로 날아갔고, 속도가 놀라웠다.

석목의 눈빛이 굳었고, 손가락을 앞으로 짚자 파뢰검이 빠르게 날아갔다.

검이 번쩍였고, 허공에 보라색 흔적을 몇 갈래 그어놓았다. 천둥 속에서 일고여덟 마리 늑대 환수가 단번에 여러 토막으로 갈라져 버렸다.

괴물들은 처참하게 울부짖었고, 몸통도 수많은 푸른빛이 되어 터져버렸다. 괴물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손가락만 한 푸른 수정 구슬들이 하나씩 나타났다.

구슬들을 본 석목은 현궁영패를 꺼내 들고 살짝 흔들었다.

푸른색 구슬들이 전부 날아와 현궁영패 속으로 스며들었다. 현궁영패에 박혀있던 보석 백 알 중 일곱 개가 밝아졌다.

석목은 보라색 번개가 크게 번지며 계속해서 앞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반시진이 흘렀다. 그동안 석목은 이진종 제자들을 여러 명 만났지만 전부 스쳐 지나갔을 뿐,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현공영패를 이미 구 할이나 밝혔다.

석목은 여전히 산맥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산맥은 색깔이 점차 변하더니 검은색으로 변해버렸고, 식물들도 전부 검은색으로 변했다.

석목은 검은색 나무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나무들이 풍기는 기운은 더 이상 나무의 기운이 아니라 기이한 음의 기운이었다.

석목은 놀란 가슴을 억누르며 신식을 보내서 주변 상황을 탐색했다.

“음!”

날아가고 있는 석목은 눈빛을 한번 반짝였다.

앞쪽 산골짜기는 특별하지 않았고, 다른 곳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석목은 눈이 반짝이더니 곧바로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공간에 흐르는 힘을 느껴보니 기이한 점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석목이 한 손을 흔들자 하늘이 찢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뢰검은 보라색 빛으로 변하였고, 하늘에서 산골짜기 위로 떨어졌다.

쿵!

허공이 크게 흔들렸고, 산골짜기에서 물결이 일렁였다. 그리고 이삼 장 크기인 하얗고 희미한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공간 통로의 입구였다.

석목은 좋아했다. 이렇게 쉽게 입구를 찾아내다니.

쿵, 쿵!

이때 짐승이 포효하는 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졌고, 검은 그림자가 연이어 번쩍였다. 그러자 환수들이 산골짜기 깊은 곳에서 빽빽이 밀려와서 공간 통로를 막았다. 수백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요수들은 어슬렁거리기만 할 뿐 석목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공간 통로 옆을 환수가 지키고 있다니.”

석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환수들은 전부 늑대 환수였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만났던 환수들과 달리 푸른색이 아니라 검은색이었다. 늑대 환수들은 전부 선천 수준이었다.

늑대 무리 가운데엔 우두머리 늑대로 보이는 환수가 한 마리 있었다. 다른 늑대들보다 훨씬 컸고, 풍기는 기운도 지계 초기에 달했다.

우두머리 늑대는 석목을 바라보며 흉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그렇군.”

석목은 팔을 들어 올렸다가 멈췄다. 무엇인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석목은 단번에 늑대들을 물리치기에 전혀 어렵지 않을 실력이었다. 이것은 현궁탑에 들어온 제자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환수들을 전부 물리치면 적잖은 진기를 소모할 터였다.

물론 석목에게 그 정도 진기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탑에선 영석이나 단약으로 진기를 회복할 수 없었다.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진기를 소모해 버리면 안 되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 진기를 아껴둬야만 했다.

석목은 실눈을 뜨더니 한 손을 흔들었고, 파뢰검이 날아 나와 우두머리 늑대에게 향했다.

“훙!”

우두머리 늑대가 낮게 으르렁거리자 주변 늑대 수십 마리가 곧바로 날아왔고, 몸에서 검은빛이 크게 번졌다.

선천급 환수들이 몸을 번쩍이며 수백 갈래 굵은 검은빛으로 변해 석목을 덮쳤다. 환수들은 벽을 이루며 덮쳤고, 우두머리 환수를 보호했다.

석목이 손을 굽혀서 앞을 향해 짚자 파뢰검에서 번개가 크게 번졌다. 이어서 석목은 길고 좁은 보라색 번개로 변하여 검은빛을 갈라놓았다.

퍽!

보라색 번개가 검은빛 속을 뚫고서 지나갔고, 앞에서 길을 막고 있던 환수들 열 몇 마리는 몸통이 뚫려버렸다. 그 자리에서 푸른빛이 감기더니 검은 구슬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다른 환수들은 전부 돌아서서 쫓아왔지만 석목이 내딛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석목은 단번에 찬란한 빛으로 변하여 보라색 빛꼬리를 길게 끌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지계 후기인 우두머리 늑대 앞에 나타났다.

이때 우두머리 늑대가 입을 크게 벌려 검은 빛줄기를 뿜어내며 파뢰검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보라색 빛은 곧바로 허공에 곡선을 그리며 늑대를 스쳐지나 공간 통로 앞으로 다가갔다.

보라색 빛이 사라지고 석목이 나타났다. 석목은 한 손에 파뢰검을 들었고, 다른 한 손으로 보라색 영패를 꺼내 들었다. 그 위엔 백 알이나 되는 구슬들이 전부 빛을 뿜고 있었다.

등 뒤에 있던 환수들이 따라오기도 전에 석목은 담담한 표정으로 현궁영패를 가볍게 흔들었다.

현궁영패 속에서 보라색 빛이 나왔다. 이어 공간 통로에 하얀빛이 번지더니 석목의 몸을 감싸고 안쪽으로 사라져버렸다.

* * *

석목은 눈앞이 한참 빙글빙글 도는 걸 느꼈고 주변 풍경이 다시 나타났다.

석목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넓은 황야에 놓였는데 주변은 전부 사막이었다. 회오리바람이 기세를 부리며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이 층은 이런 모습이군.”

석목이 주변을 둘러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깐 침묵하더니 손에 든 파뢰검에서 번개가 번쩍였고, 석목은 다시 빛으로 변하여 앞으로 날아갔다.

얼마 날아가지 않았을 때 석목은 갑자기 한 손을 흔들었다. 손에서 번개가 나와 몇 장 앞에 놓인 모래 언덕 속으로 스며들었다.

우르릉!

모래 언덕이 터지면서 모래알이 흩날렸다. 몸집이 몇 장 크기인 모래 도마뱀 환수들이 언덕을 비집고 나왔다. 길고 뾰족한 이빨이 자나라 있었는데 도마뱀들은 흉흉하게 석목을 덮쳤다.

석목이 몸을 비틀거리며 가볍게 모래 도마뱀 몇 마리를 피했다.

이어서 석목은 순식간에 도마뱀들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진기도 사용하지 않고서 주먹으로 도마뱀의 등을 내리쳤다.

도마뱀은 고작 지계 초기라 곧바로 뼈가 부러지며 몸통이 두 덩어리로 갈라졌다.

쿵!

나머지 도마뱀 두 마리는 돌아서서 먼 곳을 향해 도망갔다.

석목은 발로 땅을 짚었고, 몸을 몇 번 번쩍이더니 두 도마뱀 사이를 스쳐 지났다.

펑, 펑!

묵직한 소리가 두 번 울리더니 나머지 도마뱀들도 몸통이 전부 부서져 버렸다.

도마뱀 시체 세 구가 노란 개똥벌레로 변하더니 사라져버렸고, 구슬만 세 알 남았다.

석목이 현궁영패를 꺼내자 원래 박혀있던 보석 백 알은 이미 빛이 사라져 있었다.

손에 든 현궁영패를 가볍게 흔들자 노란 구슬 세 개가 날아와 영패 속으로 스며들었다. 세 갈래 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영패를 거두어들인 후, 석목은 더 지체하지 않고서 파뢰검을 불러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 층의 공간 통로를 찾아다녔다.

일 층에서 겪은 경험으로, 석목은 잠깐 경계를 풀었다. 석목의 실력이라면 앞에 있는 몇 층을 오르는 건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 * *

사흘 후, 석목은 파죽지세로 육 층에 도달했다.

육 층은 드넓은 바다였다. 바다 위에 별처럼 수많은 섬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하늘 높이 걸린 눈부신 태양이 바다 위를 환하게 비춰서 경치가 실로 아름다웠다.

석목은 허공에서 잠깐 멈춰 있다가 다시 빛으로 변하였고, 섬을 하나씩 뒤지며 공간 통로를 찾기 시작했다.

육 층까지 오는 동안 부딪친 환수들은 대부분 지계 경지였지만 지계 정상인 환수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물론 석목에게 그런 환수들은 매우 약한 존재였다. 허나 석목은 한편으로 진기를 아끼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빨리 탑을 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전투를 벌이며 시간을 조금 끌었다.

오는 길에 만난 이진종의 제자들의 신분과 실력을 유추해 봤을 때, 석목은 탑을 조금 빨리 오르는 편에 속했다. 그리고 진기를 쓰는 일에 각별히 신경을 썼기 때문에 아직은 괜찮은 상태였다.

여전히 연나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연나가 석목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바다에서 반나절 정도 날아다니던 석목은 한 섬으로 내려왔다. 보일 듯 말 듯 옅은 하얀빛이 눈에 들어오자 기뻐하며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 * *

같은 시간에 칠 층 한 산골짜기에서 연나가 손에 송곳 모양 보라색 무기를 들고 있었다. 두 뼘 정도 크기였는데 그 위에 가시가 줄줄이 나있었고 매우 날카로웠다. 그 무기는 바로 임도가 즐겨 사용하던 법보인 자사자(紫鯊刺)였다.

연나는 사자 환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환수들은 실력이 이미 천위 초기에 도달한 것 같았다. 환수들은 연나를 감쌌고, 눈에 날카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연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맞섰다. 하지만 걱정스런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쿵!”

푸른 사자 환수가 큰소리를 내며 울부짖었고, 웅장한 몸통이 연나를 덮쳤다.

연나는 발길을 돌려서 그림자만 남긴 채로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퍽!

보라색 환영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갔고, 푸른 사자 환수는 미간에 주먹만 한 구멍이 하나 뚫렸다. 구멍이 거의 머리 전체만 했다.

푸른 사자 환수는 굳어버리더니 몸통이 터져서 푸른 개똥벌레로 변한 채로 사라져버렸다.

이에 나머지 환수들이 포효를 하며 전부 연나를 덮쳤다.

연나는 마치 나비처럼 환수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환수들은 울부짖으며 연나의 뒤를 따라다녔지만 결국 연나를 덮치지 못했다. 반주향(향 반개가 탈 시간,약 15분)이 지날 때마다, 환수들은 한 마리씩 머리가 뚫려버렸다.

이렇게 약 반 시진이 흐른 뒤, 환수들은 전부 죽어버렸고, 푸른 구슬만 몇 개 남았다.

연나는 아래를 향해 날아가더니 곧바로 현궁영패를 꺼내 들었다. 영패 위에서 빛이 뿜어 나왔고, 구슬 몇 알이 전부 영패 속으로 날아가서 스며들었다. 구슬 백 개가 전부 밝아졌다.

연나는 빛이 번졌고, 앞으로 날아가려다가 순간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멈추었다. 그리고 빛을 거두어들였다.

“너무 빨리 올라왔어. 조금 기다려야겠다.”

연나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