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화. 빙갑거서(冰甲巨蜥)
잠시 후에 마지막으로 남은 곰 환수를 연나가 죽여 버렸다. 두 사람이 손에 든 현궁영패는 이미 전부 밝아졌다. 둘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주변에 다른 환수들이 몰려오기 전에 공간 통로로 날아가서 단번에 십이 층까지 도착했다.
“음, 이 두 사람은 아주 죽이 잘 맞는군요. 벌써 십이 층까지 가다니. 온화보다 조금 더 빠르네요.”
적문천이 말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머지 여섯 관주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몰렸다.
지금 두 제자만 십이 층에 도착했을 뿐, 십이 층에 도착한 사람들은 매우 적었다. 십이 층엔 각 도관에서도 뛰어난 제자들만 모여 있었고, 수련 경지가 천위 후기에 도달한 열 몇 명뿐이었다.
“운이 좋았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서 대체로 환수들을 적게 만났지요. 처음부터 너무 빨리 가는 것도 꼭 좋은 일은 아닙니다.”
팽악이 그리 말하며 석목과 연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 * *
십이 층, 얼음 조각으로 이루어진 광활한 평원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고, 눈보라가 하늘에서 휘몰아쳤다.
석목과 연나는 앞뒤로 나란히 선 채로 초원에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력을 아끼기 위해서 두 사람은 바람과 눈을 막는 술법마저 사용하지 않았다.
이때 허공에서 무언가가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얼음칼이 눈바람 속에서 휙 날아서 두 사람을 향했다.
석목은 눈이 굳더니, 두 손을 앞으로 가리켰다. 파뢰검에서 보라색 빛이 크게 번지더니, 빛이 빠르게 날아갔다.
펑!
커다란 얼음 칼날이 순식간에 터져버렸고, 부서진 얼음 조각들이 보라색 번개에 싸인 채 사방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석목은 실눈을 뜨고서 얼음칼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때 거대한 그림자가 둘을 습격했다.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솔개 환수 열 몇 마리가 눈보라 속에서 날아왔다. 그리고 뾰족한 입을 크게 벌린 채로 하얗고 큰 얼음 칼날을 몇 갈래 토해냈다.
석목이 두 손을 위아래로 흔들자, 파뢰검에서 빛이 크게 번졌다. 파뢰검은 수십 갈래 검 그림자로 변하였고, 굵은 보라색 번개 빛을 감싼 채 얼음칼과 부딪쳤다.
쾅!
허공에서 번개가 번쩍이더니, 묵직한 얼음 칼날이 전부 부서져서 눈보라 속에서 흩어졌다.
이어서 솔개 환수 절반 이상이 공격을 피하지 못했고, 그대로 보라색 번개 속으로 휘감겨버렸다. 솔개 환수들은 몸통 주변에서 번개가 맴돌더니, 천천히 멈춰버렸다. 그 뒤를 다가오는 번개 때문에 솔개 환수들은 몸통 곳곳이 까맣게 타버렸다.
또 다른 한쪽에선 연나가 흐느적거리며 눈보라 속에서 몸을 번쩍이고 있었다. 연나가 들고 있는 자사자에서 보라색 그림자가 끊임없이 번쩍였고, 나머지 몇몇 솔개 환수들과 싸우고 있었다.
일각 정도 지나자, 두 사람은 솔개 환수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두 사람은 현궁영패를 꺼내서 요수가 남긴 환주를 전부 거두어들였다.
“십 층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제자들이 점점 적어지는 것 같아. 우리가 탑을 올라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석목이 주변을 훑어보더니, 연나에게 몰래 전음을 보냈다.
“내가 사용한 공법들은 임도가 본래 사용하던 공법들이야. 반년 동안 수련했지. 우리가 만난 환수들이 너무 약해서 그래.”
연나는 석목을 바라보지 않고는 혼을 통해서 대답했다.
연나가 하는 말을 들은 석목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현궁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점차 높은 층으로 향하는 것 같았지만, 매 층마다 처한 상황이 전부 달랐다. 처음에는 공간 통로를 찾기 어렵거나, 요수를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십 층에 도착한 이후부턴 요수 무리가 먼저 공격을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서, 진기를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건 보통 천위 초기의 제자들에겐 아마 어려운 일일 터였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당연히 별일도 아니었다.
“연나, 이곳에서 잠깐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다른 제자들이 쫓아오면, 그때 계속 올라가자. 너무 튀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은 아니야.”
석목이 잠깐 고민하며 말했다.
“그래.”
연나가 대답했다.
이렇게 결정을 내린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고, 경로를 일부러 바꾸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세 시진 후, 석목과 연나는 얼어붙은 벌판 위에 솟은 낮은 산 아래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한편으로는 빠르게 움직였지만, 한편으로는 등 뒤로 보라색 번개를 몇 갈래 뿜어냈다.
두 사람 뒤에는 얼음 갑옷을 두른 커다란 도마뱀 환수 이십여 마리가 바싹 쫓아오고 있었다. 환수들의 쇠 같은 발이 땅에 딛자,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렇게 오랫동안 도망 다녔으니, 이제 됐어.”
석목이 이제 막 보라색 번개를 뿜어냈을 때, 머릿속에서 연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나가 전하는 말을 들은 석목은 연나와 함께 멈춰 섰다.
두 사람이 멈춰 서자, 가장 앞에서 날뛰고 있던 빙갑거서(*冰甲巨蜥: 도마뱀)가 낮게 소리를 지르며 덮치려고 했다.
석목과 연나는 동시에 몸을 움직였고, 두 사람은 모습이 희미해지며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도마뱀은 커다란 앞발을 맹렬하게 휘둘렀고, 바닥에 여섯 갈래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이때 석목이 도마뱀들 옆에 나타났다. 석목이 손바닥을 휘두르자, 보라색 검 빛이 휙 튀어나와 빙갑거서의 목 근처를 가볍게 한 바퀴 돌았다.
도마뱀 환수는 움직임이 멈춰버렸고, 목에 커다란 틈이 한 줄 생겼다. 하지만 곧바로 잘려 버리지는 않았다.
석목은 앞으로 한 발자국을 크게 내딛더니, 한 발로 빙갑거서의 머리를 밟아버렸다.
펑!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요수는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고, 퍽 소리와 함께 옅은 빛이 사라져버렸다.
도마뱀 환수들 뒤편에 보라색 환영이 연이어 움직였고, 도마뱀 환수 두 마리는 구멍이 여러 개 난 채로 곧바로 연나의 발밑에서 무너져 버렸다.
나머지 도마뱀 환수 열 몇마리가 동시에 입을 벌렸고, 석목과 연나를 향해 옅고 하얀 안개를 뿜어냈다.
안개는 눈보라 사이에서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고, 수많은 눈꽃이 안개 속으로 말려들어 모양이 매우 불규칙하게 커졌다. 그리고 커다란 얼음벽이 되었다.
얼음벽을 본 석목은 발을 가볍게 디뎌서 빠르게 하얀 안개를 피했고, 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파뢰검은 되돌아왔고, 보라색 번개가 반짝이며 안개에 부딪쳤다.
이어서 석목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검 끝이 이제 막 하얀 안개 속으로 들어갔을 때, 순식간에 무겁고 느려졌다. 마치 검 위에 천근이나 되는 커다란 돌을 얹어놓은 것만 같았다.
석목이 법결을 바꿨다. 그러자 보라색 번개가 곧바로 안개 속에서 터져버렸다.
우르릉!
몇 백 갈래 보라색 빛이 하얀 안개 속을 여기저기 꿀렁이며 기어 다녔고, 얼음벽은 순식간에 터져버려서 수많은 얼음 조각이 안개 속에서 튕겨져 나왔다.
파뢰검은 잠깐 멈칫했을 뿐, 곧바로 안개 속에서 돌아왔다.
석목이 손을 뻗어 파뢰검을 맞이했다. 검에는 투명한 얼음이 한 층 덮여있었고, 얼음 위로 차가운 기운이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석목이 검을 대각선으로 그었다. 그러자 보라색 번개가 검에서 배어나왔고, 붙어있던 얼음들을 전부 녹여버렸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곤 다시 손을 흔들며 파뢰검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손을 계속 움직여서 법결을 줄줄이 펼쳤다.
파뢰검이 번쩍이며 도마뱀 환수들 위로 날아올랐고, 순간 보라색 빛이 크게 번지더니, 파뢰검은 하늘을 보라색으로 물들여놓았다.
눈보라 속에서 갑자기 검은색 번개 구름이 뭉쳤고, 아이 팔뚝만 한 보라색 빛기둥 백 갈래가 구름 속에서 나오며 밑을 향해 떨어졌다.
우르릉!
격렬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수많은 얼음 갑옷이 사방으로 터졌다. 또한 땅 위에는 한 장 정도 깊이인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도마뱀 환수 수십 마리는 사체가 웅덩이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었고, 한참 후에 빛으로 변하여 사라졌다.
석목과 연나는 멈추지 않고서 눈 깜짝할 사이에 남은 환주를 전부 현궁영패 속으로 거두어 넣었다.
“이제 십삼 층으로 갈 때야.”
연나가 전음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 길을 둘러서 올 때, 이미 공간 통로가 있는 방향을 대충 파악해 놓았어. 가자.”
석목이 대답했다.
석목은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무엇인가 느껴진 듯이 눈보라가 부는 깊은 곳을 한번 바라보았다.
수 리 밖에 떨어진 곳에 하얗고 화려한 빛이 눈보라 속에서 끊임없이 번쩍였다. 빛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왜 그래?”
연나가 석목을 보며 물었다.
“잠깐만.”
석목이 말했다. 가까워지는 빛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석목은 두 눈에서 금빛이 흘렀고, 다시 먼 곳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하얀빛 속에 몸매가 예쁘고 피부가 눈처럼 하얀 여자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드리운 채 나타났다. 바로 서문설이었다!
서문설이 두르고 있는 보라색 도포엔 눈에 띄는 상처가 나있었다. 보라색 도포도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서문설의 등 뒤로 희미하고 커다란 그림자가 쫓아오고 있는 것 같았다.
연나가 실눈을 뜨고서 눈보라 속을 훑어보더니, 다시 시선을 석목에게 돌렸다.
석목은 일부러 서문설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움직이기 전에 의식하며 연나를 한번 바라보았다.
연나도 때마침 석목을 바라보고 있었고,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입술을 움직이며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으나,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앞쪽에서 서문설이 소리를 질렀다. 서문설이 들고 있는 백옥영치에서 빛이 미친 듯이 번쩍였고, 백옥영치에서 하얀 연꽃이 날아가며 서문설을 향해 날아오는 커다란 얼음칼을 막아냈다.
석목과 거리가 가까워지자, 서문설의 뒤를 바싹 따라오던 검은 그림자도 뚜렷이 보였다. 수십 마리 솔개들과 도마뱀 환수 십여 마리였다.
석목과 연나가 예전에 만났던 녀석들과 달리, 서문설을 뒤쫓고 있는 환수들은 전부 천위 등급이었다. 그중엔 천위 중기도 적잖게 있었으며, 가장 앞에서 달려오고 있는 빙갑거서는 천위 후기인 강대한 존재였다.
석목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손에 든 파뢰검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고, 석목은 보라색 번개로 변하여 서문설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석목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연나는 멈칫하더니, 뒤를 따라갔다.
이렇게 많은 천위 경지 환수들이 공격을 해서, 서문설은 이미 많은 기를 소모했다. 서문설은 백옥영치를 흔들어 찬란한 빛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도마뱀 환수가 토해낸 아주 차가운 기운을 막아냈다.
그러자 솔개 환수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서문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고, 입에서 커다란 얼음 칼날을 뿜어내며 서문설을 공격했다.
서문설은 몸을 움직여 백옥영치를 거두어들였다. 영치를 위로 들어 올리자, 휘어진 하얀빛이 뻗어 나왔다. 그리고 마치 비단처럼 서문설의 몸통을 반이나 감쌌다.
펑!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음 칼날이 맹렬하게 휘어진 빛에 떨어졌고, 투명한 얼음 조각이 주변으로 튀었다.
하얀빛 속에서 서문설은 몸을 한참 동안 비틀거렸다. 영력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이때 양옆에 갑자기 도마뱀 환수 두 마리가 나타나 입을 크게 벌리며 서문설을 향해 들끓는 안개를 뿜어냈다.
그 광경을 본 서문설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연약한 얼굴에는 절망의 기색이 스쳐 지났다.
퍽!
번개가 퍼졌고, 석목이 서문설 왼쪽에 나타났다. 파뢰검엔 보라색 번개가 용솟음쳤고, 파뢰검은 곧바로 하얀 안개 속을 찌르며 안개를 터뜨려 버렸다.
또 다른 한쪽에선 보라색 그림자가 번쩍이며 나타나더니, 빛의 막을 만들어내며 다른 한쪽에서 다가오는 하얀 안개를 막아냈다.
“뇌 사형, 임 사저!”
서문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불렀고,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어려 있었다.
조금 전에 천위 환수들이 쫓아와 위기에 빠져있을 때, 한쪽에서 번개가 번쩍이는 모습을 보았다. 어느 도관에 속한 제자가 있는지는 잘 몰랐지만, 마지막 희망을 품고서 온 힘을 다해 도망을 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