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3화. 거래
이때, 연나 옆에 그림자가 희미해지더니 석목이 나타났다.
석목은 큰소리를 지르며 몸에 혼돈된 빛을 크게 번지더니 빛은 혼돈된 손으로 뭉쳐져 허공에 드리운 뇌전 손바닥을 막았다.
두 커다란 손바닥이 부딪쳤지만 의외로 하늘을 울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두 손바닥이 부딪치는 순간, 혼돈된 손바닥은 단번에 부서졌다. 그리고 혼돈된 사슬 수십 갈래로 변하여 뇌전 손바닥을 감쌌다.
혼돈된 빛이 용솟음치며 뇌전 손바닥을 안쪽으로 삼켜버렸다.
빛이 번쩍이며 허공에 드리운 혼돈된 빛과 뇌전 손바닥이 동시에 사라졌다. 두 손바닥이 사라진 자리엔 팔각 원판이 하나 나타나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원판 속에 뇌전 손바닥이 하나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석목은 안색이 창백해졌으며 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뇌전 손바닥을 봉인하는데 성공했으나, 뇌전 손바닥의 위력이 너무 강력하여 몸속에 깃든 혼돈된 힘을 전부 소진하고 나서야 간신히 봉인을 했다.
“나의 공격을 두 번이나 받아 내다니. 꽤 괜찮군. 여기까지 하자.”
팽악의 그림자가 희미해지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팽악은 한 손을 흔들어 청동종을 하나 꺼냈다.
땡……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청동종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청동빛이 크게 번지더니 다시 몇 장 정도 크기인 청동종의 허상이 나타나서 석목과 연나에게 드리웠다.
석목은 몸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온몸에 깃든 진기와 법력도 형태가 없는 힘 때문에 가로막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연나도 마찬가지였고, 안색이 매우 어두웠다.
팽악이 허공에서 내려와 청동종 허상 밑에 있던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실력이 대단한 건 인정한다. 죽일 테면 빨리 죽여! 뭘 봐!”
석목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석목은 이미 영혼을 연나의 취선대에 기록해두었다. 취선대는 지금 무야에게 있기 때문에 만약 석목이 죽어서 혼비백산이 된다 하더라도 사령계면에서 다른 방식으로 부활할 확률이 오 할 정도는 되었다.
연나는 석목을 한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취선대는 연나의 법보였고, 연나가 사령계면에서 부활할 가능성은 훨씬 컸다.
“너희를 죽이다니, 그러기엔 너무 아깝다.”
팽악이 갑자기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석목과 연나는 팽악이 하는 말을 듣더니 멈칫했다.
“너희 두 녀석은 실력이 나쁘지 않아. 비록 내 제자와 후손을 죽였지만, 너희가 살아날 기회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팽악이 말했다.
“그건 무슨 말이야?”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갑게 물었다.
팽악은 가볍게 웃으며 두 손을 휘두르더니, 열 손가락을 끊임없이 움직였다. 순간, 법결이 줄줄이 나타나서 청동종 속으로 스며들었다.
청동종에서 빛이 반짝이며 부문이 튀어나와 석목과 연나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안색이 변했고, 습하고 차가운 힘이 몸속 영해로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부문은 곧바로 빛나는 청동 구체로 변하여 영해에서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 번씩 돌 때마다 구체는 조금씩 작아졌다. 구체는 수십 바퀴 돌더니 이내 사라져서 마치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것만 같았다.
석목은 신식으로 영해 속을 관찰하였으나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하지만 심장은 이미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다.
석목 옆에 있던 연나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같은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이때, 팽악이 한 손을 흔들어 청동종을 석목과 연나의 머리 꼭대기에서 도로 가져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두 사람에게 드리우고 있던 청동종의 허상도 사라졌다. 석목은 순식간에 몸속에 깃든 진기와 법력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우리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석목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별 거 아니다. 작은 술수를 좀 부렸다.”
팽악이 가볍게 웃더니 눈을 번쩍 떴다.
석목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영해 속에서 청동빛이 줄줄이 나타나더니 영해에 고통이 몰려왔다. 마치 수많은 쇠침이 쿡쿡 찌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어서 청동빛은 사라졌으며 찌르는 것만 같은 고통도 사라졌다.
석목은 얼굴을 굳히며 팽악이 취하는 태도를 관찰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식으로 영해 속을 반복하여 관찰해봤다. 하지만 청동빛은 종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생, 실력이 대단하신 건 인정합니다.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니 할 말씀이 있으시면 빨리하시죠.”
석목은 침묵을 한 후에 말했다.
“네가 조금 전에 시전한 봉인술은 청란성지의 구전현공이지? 수련을 제대로 했군. 다른 한 녀석은 실력이 더 뛰어나. 너희 둘은 어째서 우리 이진종에 들어왔지?”
팽악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석목과 연나는 한번 마주 보며 잠깐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미 당신에게 잡힌 물고기나 다름이 없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곤륜성허에 들어가려고 들어왔습니다.”
“그렇군. 그럼 현궁탑에서 일어난 일은 너희와 관련이 있는가?”
팽악은 눈에서 차가운 빛을 뿜어내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일은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와 관련이 없지요.”
석목이 말했다.
팽악은 두 사람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 몸에서 사령 기운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으니, 정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군. 그렇다면 우리가 거래를 한 번 하는 건 어떤가?”
팽악이 말했다.
“거래요?”
석목이 물으며 긴장을 조금 풀었다. 보아하니 현궁탑에서 벌어진 일은 덮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너희들이 우리 이진종의 공법을 써서 곤륜성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지. 다만 들어간 후엔 기이한 보물을 한 개 찾아줘야 한다. 보물만 가져오면 너희 영해 속에 건 금제를 풀어주며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전부 용서해주마. 어때?”
팽악이 말했다.
“당신 손바닥 안에 있는데 안 된다고도 할 수 없겠지요.”
석목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똑똑한 놈들과는 말이 통해서 좋아. 그럼 너는?”
팽악은 가볍게 웃더니 연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아.”
연나가 짧게 대답했다.
“좋아, 그럼 약속을 했다.”
팽악은 매우 좋아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가서 앉았다.
석목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머리는 끊임없이 굴리고 있었다.
팽악에게 통제를 받는 와중에 신분까지 들켜서 팽악이 하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석목은 고개를 돌려 연나를 한번 바라보았고, 연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 우리가 찾아야 할 물건은 대체 무엇입니까?”
석목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건 지금 알 필요 없다. 곤륜성허에 들어갈 때가 되면 알려줄 게다. 됐다. 이제 나가보아라.”
팽악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팽악이 말을 하자마자 온 대전에 드리웠던 하얀빛이 반짝이며 사라졌다. 마치 빛이 나타난 적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갔다.
팽악이 하는 말을 들은 석목은 고개를 끄덕였으며 연나와 함께 대전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경고하지. 도망을 칠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이화관에서 나가는 순간, 네 녀석들 영해를 터뜨려서 죽느니만 못하도록 만들어주마.”
팽악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석목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잠시 후에 대전 밖으로 걸어 나온 두 사람은 한번 마주 보더니 동부가 있는 구역으로 걸어갔다.
“이제 어떻게 하지?”
석목이 심신으로 연나와 연결하여 말을 걸었다.
“저 사람이 걸어둔 금제는 매우 특이해. 조금 더 연구를 해봐야 할 것 같아.”
연나가 말했다.
“다행히 팽악에게 다른 목적이 있어서 잠시 안전하게 되었어. 현궁탑에서 벌어진 일도 들키지 않은 것 같아. 다만 이진성주가 탑 안에서 어떤 실마리라도 찾아낼까 걱정이긴 해.”
석목은 심신으로 전음을 보내며 말했다.
“현궁탑은 말 그대로 매우 기이한 보물이야. 탑 안은 매우 현묘해. 하지만 또 현묘하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할 거야. 됐어, 별일 없을 거니까 나는 먼저 돌아갈게.”
연나가 말을 하며 자신이 머물던 동부 방향으로 날아갔다.
석목은 연나가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이 머무는 동부로 날아갔다.
* * *
동부로 돌아온 석목은 바로 비밀 석실로 들어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석목은 눈빛이 반짝였으며 잠시 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이진종에 쳐들어온 건 너무 성급한 모험이었다. 팽악이 언제 두 사람의 신분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계 존재를 너무 쉽게 봐서는 안 되었다.
석목은 한참 생각에 빠져있더니 다시 한숨을 내뱉으며 두 눈을 감았다.
눈 깜짝할 사이 보름이 흘렀다.
* * *
동부 안, 석목은 가부좌를 틀고서 두 눈을 감은 채 수련을 하고 있었다. 이때, 몸에서 보라색 빛이 반짝이며 신분 영패에 옅은 빛이 한 층 나타났고, 영패 위에 작은 글씨가 몇 개 생겼다.
“속히 대전으로!”
석목은 눈을 깜박이더니 일어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잠시 후에 석목은 이화관의 대전에 도착했다.
대전에는 사람들이 열 몇 명 와 있었는데 전부 현궁탑 시련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들이었다. 연나도 이미 도착했으며 사람들 속에서 서서 입구에 서 있는 석목을 한번 바라보더니 다시 시선을 돌렸다.
높은 자리에선 팽악이 눈을 감은 채 앉아있었다.
석목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연나와 가까운 곳에 섰다.
연나는 며칠 동안 영해 속에 걸린 금제를 연구했지만 금제를 풀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두 사람은 논의를 나눈 끝에 우선 팽악이 하는 말을 듣고 난 후 기회를 봐가며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팽악은 한쪽 눈을 뜨더니 석목과 연나를 한번 바라본 후에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이때, 보라색 도포를 입은 소녀가 천천히 대전으로 걸어 들어왔다. 소녀는 주변을 몇 번 바라보더니 석목과 연나에게로 다가왔다. 서문설이었다.
“뇌적 사형, 임도 사저.”
서문설은 활짝 웃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서문 사매.”
석목이 머리를 끄덕이었다.
연나는 서문설을 한번 바라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곤륜성허 비경이 드디어 열리려나 봐요. 뇌적 사형, 두 분도 전부 준비를 마쳤겠지요.”
서문설이 물었다.
“그럭저럭 준비했습니다.”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충 대답했다.
팽악이 경고를 해서 석목과 연나는 보름 동안 이화관에서 나가지 못했다. 준비를 한 물건들도 전부 이화관 안에 열리는 방시에서 구매한 단약들과 부적들 같은 것들이었다.
서문설은 석목 옆에 딱 달라붙어서 계속 말을 걸었다. 그리고 슬며시 현궁탑에서 벌어졌던 일을 언급했다.
석목은 서문설이 하는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지만, 또 단칼에 잘라낼 수도 없어서 대충 대답을 했다. 현궁탑과 관련된 질문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또 시간이 한참 지났으며 현궁탑 시련에서 우승을 거둔 이화관의 제자들이 전부 대전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좋아, 다 왔으니 함께 성전으로 가자.”
팽악이 일어서서 밖으로 날아갔다.
다른 사람들도 팽악 뒤를 따랐고 이화관에서 날아서 나갔다.
* * *
반시진 정도 날았을 때, 일행은 커다란 산봉우리 근처에 도착했다.
산봉우리는 구름을 찔렀고,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산꼭대기뿐만 아니라 산중턱도 보이지 않았다. 산중턱은 두꺼운 구름층으로 덮여있었다.
석목은 눈앞에 놓인 거대한 봉우리를 바라보며 놀라운 기색을 드러냈다.
이 산봉우리는 석목이 본 가장 큰 산봉우리였다.
뇌적의 기억 속을 뒤져 보니 이 산봉우리는 이름이 오천봉(傲天峰)이었다. 이렇게 내다보니 확실히 천지간에 우뚝 솟은 느낌이 들었다.
이진종의 성전은 이 웅장한 봉우리 꼭대기에 놓여 있다.
일행들은 하늘로 솟아오르며 곧바로 구름으로 들어가서 한참을 날았다. 눈앞이 트이며 구름바다를 비집고서 나오는 오천봉 꼭대기가 뚜렷이 눈에 들어왔다.
석목은 눈으로 오천봉을 훑어보았고, 산봉우리에서 보라색 부드러운 빛이 일었다. 또한 커다란 전당이 땅에 깔려있었는데 수백 칸은 되어 보였다.
보라색 부드러운 빛 속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선학 몇 마리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다니며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주변에 구름이 맴돌고 있었는데 마치 천상에 지은 궁궐의 선경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