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화. 옛 친구
“내가 제시할 조건은 두 개네. 첫 조건은 곤륜성허를 탐색하는 동안 우리는 전쟁을 멈출 예정이지. 당신들의 요새와 같은 곳들을 공격하지 않겠네. 그리고 두 번째 조건은 삼대성지가 힘을 합쳐서 곤륜성허 주변에 드리운 선계 금제를 찢을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오래가지는 못하겠지. 내가 우리 쪽 보물을 하나 가져왔는데 입구로 들어가는 시간을 늘릴 수 있네.”
석무애가 말했다.
“석 도우가 말하는 보물로 시간을 얼마나 늘릴 수 있나?”
속승이 물었다.
신도남과 목천절은 석무애가 하는 말을 듣고도 전혀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제일 나쁜 상황이라도 삼십 일은 늘릴 수 있지.”
석무애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속승을 비롯한 세 사람은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랐다.
삼대성지 연맹이 최선을 다해도 입구를 육십일 동안 열 수밖에 없었는데, 석무애가 도움을 준다면 탐색 시간이 거의 반절이나 더 늘어나는 셈이었다.
그리고 휴전이라는 조건도 꽤 끌렸다. 곤륜성허를 탐색하는 동안, 흑마족이 가하는 공격과 방해를 막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경 흑마족 한 명이 마음을 먹고 간섭을 한다면 곤륜성허를 탐색하는 건 꽤 많은 변수를 맞을 터였다.
“좋아. 정말 입구를 여는 시간을 늘릴 수만 있다면 흑마족도 들어갈 수 있게 허락하지. 다만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최대 백 명이다.”
세 사람은 전음으로 교류를 했다. 결국 속승이 말했다.
“좋아! 그럼 약속했네. 언제 움직일 건가?”
석무애는 얼굴에 웃음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직 곤륜성허의 입구를 열 가장 좋은 시기는 아니지. 아직 반년은 더 기다려야 하네. 곤륜성허 주변에 드리운 선계 금제가 가장 약해질 때를 기다려야 하지. 그때면 힘을 적게 들이고도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겠지.”
신도남이 말했다.
“아직 반년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좋아, 그럼 반년 뒤에 다시 오지. 먼저 물러나겠네!”
석무애는 미간을 치켜뜨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석무애는 다시 검은색 비주로 올라탔고, 등 뒤에 있던 흑마족 성계 강자 두 명도 석무애를 따라 비주에 올라탔다.
삼대성지의 성주는 검은 비주가 눈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제자들에게 임시 거처로 돌아가라고 지시를 내렸다.
* * *
석목은 임시 동부로 돌아가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연나가 머무는 임시 동부는 석목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연나도 동부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시간이 조금씩 흘렀다. 삼대성지의 제자들은 흑마족이 나타나자 처음에는 경계를 놓지 않고 있었으나 시간이 흘러도 흑마족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또한 부석성 요새에서 양쪽이 휴전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그동안 삼대성지의 제자들은 곤륜성허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서로 연합하며 작은 조를 만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몇 명은 교역회까지 열며 영기, 법보, 단약이나 부적 같은 물건들을 교환하였다.
삼대성지의 신경 경지인 성주들과 함께 온 성계 경지 장로들은 제자들 사이의 교류를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흘려보냈다.
석목은 밖을 내다보았다. 이진종도 무리를 형성하였고, 이화관 말고 다른 몇 도관의 대표 제자들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그래서 각 도관끼리 대열을 이루기 시작했다. 막린회, 수봉월 그리고 만호종은 열 몇 명이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이화관은 온화가 의외로 탈락하는 바람에 머릿수는 가장 많았지만 강력한 사람이 없어서 오히려 뿔뿔이 찢어졌다. 사람들 스물 몇 명이 작은 조를 네다섯 개 이루었다.
석목은 눈빛을 반짝였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석목과 연나에게 유리했다.
석목은 또 다른 쪽을 바라보았다. 청란성지와 축운검파 제자들이 머무는 임시 거처도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안쪽 상황을 뚜렷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두 성지도 이진종과 마찬가지로 각자 조를 이루었다.
석목은 청란성지쪽에 눈을 고정했다. 조극 주변을 청란성지의 제자들 여덟아홉 명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조극을 우두머리로 돌아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극은 눈에 빛을 반짝이더니 시선을 돌려 자릉을 바라보았다.
자릉이 속한 대열은 또 다른 일고여덟 명이 모인 작은 조였다. 허나 그 속에도 천위 후기인 사람들이 있어서 실력이 만만치 않았다.
석목이 보내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자릉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석목과 눈을 마주쳤다. 자릉은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석목은 깜짝 놀라서 시선을 돌렸다.
무엇 때문인지, 자릉을 알게 된 후로부터 자릉은 늘 신비하고 비밀스러워 보였다. 겉은 영원히 어린 아이 같았지만, 일체쌍혼(一體雙魂)이라는 점만 놓고 봐도 내력이 절대 가볍지 않을 터였다.
축운검파의 제자들 백 명도 작은 조 대여섯 개로 나뉘었다. 인원수가 가장 많은 대열은 눈썹이 검 모양인 청년을 둘러싼 대오였는데 스무 명이 넘어 보였다.
하지만 금발 쌍둥이 청년들 옆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두 사람도 다른 대열에 합류할 뜻이 전혀 없어 보였다.
각 대열들은 서로를 훑어보며 작은 목소리로 교류를 했다. 서로 실력을 파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밖에서는 모두 사이가 좋아 보였지만, 곤륜성허에 들어가서 선계 보물을 앞에 둔다면 아마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터였다.
석목이 주변을 훑어보고있을 때,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석목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며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서문설이었다.
“뇌적 사형.”
서문설은 보조개를 드러내며 가볍게 웃었다. 서문설은 얼굴에 꽃이 활짝 피었고, 또한 목소리는 맑고 청량했다.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임시 동부에서 연나가 서문설이 내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안색을 굳혔다. 연나의 몸에 서리가 한 층 덮이더니 차가운 기운을 풍겼다.
“아, 서문 사매.”
석목은 서문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뇌 사형, 엄청 여유로워 보이시는데 이번에 곤륜성허로 가는 일은 흉유성죽(*胸有成竹: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이미 계산이 모두 서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신 거죠.”
서문설은 편하게 석목 옆에 앉으며 물었다.
“서문 사매, 제가 감히 그러겠습니까. 곤륜성허 속에서 벌어질 일들은 변수가 많습니다. 또한 이번에 흑마족도 합류를 했으니 저도 소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석목이 담담하게 말했다.
“뇌 사형, 그런데 사형께선 정말 제가 아는 분과 많이 닮았습니다.”
서문설은 눈빛을 반짝이고 석목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누군가와 닮았다고요? 아마 저는 모르는 사람이겠지요.”
석목은 심장이 아무 이유 없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서 물었다.
“뇌 사형은 모르시는 분입니다. 제 고향의 음…… 옛 친구인데 오래전에 있던 일입니다. 그때 저는 고작 선천 경지 무인이었지요.”
서문설은 가볍게 한숨 내뱉더니 천천히 말했다.
“아, 그럼 그 친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서문설이 하는 말을 들은 석목은 그때 겪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렸고, 다양한 감정이 몰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얼마 전에 순행을 떠나며 고향에 한 번 들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찾지 못했지요…… 죄송합니다. 제가 별소리를 다 하는군요. 아, 사형께서 계속 혼자 이곳에 계시는 걸 보니 아마 누군가와 힘을 합칠 뜻이 없으신 거겠지요?”
서문설은 눈에 기억을 되짚는 기색을 드러내다가 곧바로 화두를 돌렸다.
“아! 저와 임도 사매는 함께 움직이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석목은 마른기침을 한번 하며 말했다.
“뇌적 사형과 임도 사매는 정말 사이가 좋으시네요. 현궁탑에서도 함께 움직이시더니.”
서문설은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허허, 우리는 애당초 진강 사형을 오랫동안 따라다니면서 서로 뜻이 잘 맞았습니다. 아, 서문 사매는 어떤 계획을 하고 있나요?”
석목은 담담하게 웃으며 곧바로 물었다.
“저는 아직 함께할 사람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궁탑에서 두 분과 함께 힘을 합치면서 꽤 어울렸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이번 곤륜성허에서도……”
서문설은 기대를 하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서문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연나가 내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정말 미안하지만 서문 사매, 다른 사람과 함께가는 건 불편하니 다른 조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연나가 하는 말을 듣던 석목은 어색한 표정을 내비쳤다.
연나가 말을 하자 서문설은 얼굴이 굳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군요. 그럼 두 분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서문설은 석목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르게 자리에서 떠났다.
석목은 서문설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아쉬워?”
연나의 목소리가 가슴에서 울려 퍼졌다.
“나와 그녀는 이미 아무런 연관이 없어.”
석목은 고개를 흔들며 두 눈을 감았다.
연나는 입가가 살짝 올라갔고, 마치 옅은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는데 곧바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 * *
반년 뒤.
행성 조각에 자리한 검은색 광장 위에 삼대성지의 제자들 삼백 명이 뚜렷하게 조를 나눠서 광장 동쪽, 서쪽, 남쪽에 서 있었다.
제자들은 전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거나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멋대로 걸어 다니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으며 조금 딱딱한 분위기였다.
삼대성지의 제자들 앞에는 몇몇 사람들이 따로 앉아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삼대성지의 성주들과 함께 광장으로 오게 된 성계 존재들이었다.
석목은 이진종 제자들 속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두 눈을 감은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반년 동안, 석목은 명수결을 수련하며 한편으로는 운정선도 바다 밖에서 수련한 흡일식으로 모은 금색 수정을 제련했다. 그리하여 그는 수련 경지를 빠르게 올려서 곧 천위 초기 정상에 도달했다.
지역이 지역인지라 힘들었다. 또한 필요치 않은 화를 입는 일을 피하려고 마기가 짙은 곳이어도 석목은 분신을 소환하여 함께 수련하지 않았다.
이때, 석목이 갑자기 두 눈을 뜨고 먼 곳을 바라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성해 속, 금색 구름과 드리운 옅은 금색 결계가 전보다 훨씬 옅어진 것 같았다.
“이제 때가 다 된 것 같군.”
석목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때,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사람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또 다른 허공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석목은 시선을 거두고서 다시 사람들이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허공 속에서 세 사람이 동시에 번쩍이며 나타났다.
석목은 눈빛이 반짝였다. 세 사람은 신도남, 목천절, 그리고 속승이었다.
신도남은 깃털 부채를 유유자적하게 흔들며 매우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목천절은 팔짱을 끼고서 차가운 눈빛을 내비치고 있었으며 속승은 뒷짐을 지고 있었다. 하지만 속승은 계속 푸른빛을 얼굴에 드리우고 있어서 안색이 바뀌는 걸 알아차릴 수 없었다.
잠깐 사이에 몇 갈래 보라색 빛이 광장에 모인 사람들 앞에 뚜렷이 나타났다. 검은색 비주 일곱 척이었다.
마존 석무애가 흑마족의 성계 강자들을 몇 명 데리고서 가장 앞서며 날아오던 비주에서 내렸다. 그러자 뒤에 있던 나머지 비주 여섯 척도 동시에 움직였다. 흑마족 백여 명이 서 있었다.
“석 도우, 시간 하나는 참 잘 지키는군.”
신도남이 손에 든 깃털 부채를 흔들며 천천히 말했다.
“삼대성주가 이렇게 제자들을 줄 세워 놓고서 친히 나를 영접하다니. 정말 과분한 대우를 받는군.”
석무애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잘난 척은 그만해! 왔으니 이제 시작하지.”
목천절의 눈빛이 차갑게 변하며 말을 했다.
그리고 목천절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도 않고서 곧바로 광장 가운데로 날아갔다.
신도남과 속승도 함께 가운데에 나타났다.
석무애는 허허 웃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흔들어서 나머지 흑마족들을 광장 북쪽에 자리한 빈 땅으로 모이라며 지시를 내렸고, 그는 검은 그림자로 변해서 삼대성지의 성주들 옆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