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화. 보화사자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엇인가 말하려고 할 때, ‘퍽퍽!’대는 소리가 옆쪽 벽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석실의 벽이 갑자기 두 갈래로 갈라지더니 통로가 하나 나타났다. 이어서 사람들 한 무리가 통로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사람들은 전부 키가 훤칠했으며 몸에 검은 마문을 새긴 흑마족 사람들이었다.
석목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여의빈철곤을 잡았다. 풍리도 온통 경계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화문양이 맞네. 이건 보화문양이야! 당신들은 보화 어르신께서 보낸 사자들이시군요! 사자 어르신, 드디어 오셨군요!”
흑마족 사람들은 석목의 가슴에 새겨진 칠색 영문을 바라보며 멈칫하더니 갑자기 흥분한 기색으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석목에게 절을 올렸다.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 겁니까?”
석목이 깜짝 놀라서 풍리를 바라보며 전음으로 물었다.
“이것은…… 보화문양! 석 형, 혹시 보화 어르신을 알고 있나?”
풍리는 이제야 석목의 가슴에 새겨진 영문을 발견하며 전음으로 물었다.
“보화문양? 저 사람들이 이걸 보고 저러는 겁니까?”
석목은 가슴에 적힌 칠색 영문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그것은 흑마 성역 사람들이 모시는 신성한 표식이지. 보화 어르신의 무늬! 이제야 봤구나. 그리고 곤륜은 보화 어르신께서 머무시던 옛 궁궐이란다.”
풍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석목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자 어르신, 우리 상묵성(桑墨星)은 지금 고만족이 침입하여 많은 영토를 빼앗겼습니다. 사자 어르신께서 우리를 도와 잃어버린 땅을 되찾게 해주십시오.”
한 중년 남자가 흑마족 사람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더니 간곡히 부탁하며 말했다.
중년 남자가 하는 말을 듣던 석목은 멈칫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 형, 보화 어르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흑마 성역은 평화롭지 않아. 복잡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면 신경 쓰지 말고서 빨리 곤륜성허로 돌아가는 편이 좋을 거야.”
석목은 풍리를 한번 바라보더니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제단에서 날아서 내려오며 사람들 앞으로 다가갔다.
“우선 일어나거라.”
석목이 말했다.
흑마족 사람들은 기쁜 기색을 드러내며 일어섰다.
“석 형!”
풍리는 석목 옆으로 날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전음으로 말했다.
“풍 형,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석목이 전음으로 말했다.
풍리는 한숨을 내뱉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냐?”
석목은 흑마족 사람들을 바라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부 대장로 올화라(兀火羅)께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지금 밖에 있는 신전에 계십니다.”
흑마족 중년 남자가 말했다.
“그래. 길을 안내하거라.”
석목이 말했다.
“네.”
중년 남자가 답했다.
“아, 내 허락을 받지 않고는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라.”
석목은 고개를 돌려 제단 위에 설치된 진법을 한번 바라보며 지시했다.
“사자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흑마족 중년은 황공한 표정을 지으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 * *
석목은 흑마족 무리들을 따라서 입구로 들어갔고, 그곳에는 통로가 하나 있었다.
통로에서 걸어 나온 후, 광장에 도착했다.
석목이 걸어 나와 뒤를 돌아보니 곤륜과 생김새가 비슷한 커다란 궁전이 있었는데, 겉보기에 매우 웅장했다.
석목은 흠칫했다.
여기 드리운 공기는 모두 옅은 검은색이었는데 짙은 마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땅과 산도 전부 검은색으로 덮여있었다.
“이곳이 흑마 성역이군.”
석목은 주변을 둘려보며 속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사자 어르신, 이쪽으로 오세요.”
흑마족 중년은 가장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흑마족 중년은 석목을 데리고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검은색 대전으로 걸어갔다.
풍리는 멀어져가는 석목의 등 뒤를 한번 바라보더니 깊은 숨을 내뱉었다. 흑마 성역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간섭을 하는 석목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풍리는 뒤를 따라갔다.
“사자 어르신, 이 어르신은 누굽니까?”
흑마족 중년은 풍리를 한 번 쳐다보며 물었다.
“아, 이 사람도 보화 어르신이 보낸 사람이다. 다만 영문을 받지 못했을 뿐이지.”
석목이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흑마족 중년은 다급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풍리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 사람은 빠르게 대전 앞에 도착했다. 대전 입구에는 돌기둥이 두 개 서 있었고 꼭대기에서 검은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흑마족 중년 남자는 석목과 풍리를 데리고는 대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전 안쪽은 매우 깊었으며 면적도 드넓었는데 백 장은 되는 것 같았다.
대전 한 가운데 석상이 세 개 서 있었는데, 가운데에 서 있던 석상은 커다란 꽃을 밟고서 손에 나뭇가지를 하나 든 궁장을 입은 여인이었다.
왼쪽 석상은 커다란 원숭이 형상이었는데 표정이 흉악해보였으며 사나운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오른쪽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몸집이 웅장한 남자 석상이 있었고, 남자 석상은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엄청난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궁장을 입은 여인 석상 밑엔 검은 피풍의를 두른 노인이 서 있었고, 노인은 손에 검은색 뼈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노인 옆엔 커다란 돌탁자와 의자가 몇 개 놓여있었다.
노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석목과 풍리를 보자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노인은 석목의 가슴에 새겨진 칠색 영문을 보더니 기쁜 표정으로 석목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烏羅) 부족 족장들의 대장로인 올화라입니다. 보화사자 어르신께 인사를 올립니다.”
“대장로님,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일어나세요.”
석목이 가볍게 말하며 대전에 놓인 세 석상을 바라보더니 가운데에 놓인 하얀 궁장을 입은 여인 조각상에 시선을 멈췄다.
석목은 멈칫했다. 궁장을 입은 여인 석상은 연나와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석목은 눈빛이 반짝였다. 석목이 흑마족을 따라온 이유도 연나와 보화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요즘 들어 연나가 하는 행동이 점점 이상해졌고, 석목은 간신히 찾아낸 실마리를 놓칠 수 없었다.
석목은 연나가 흑마족의 성조인 보화와 똑같이 생겼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혹시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인가?’
석목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사자 어르신.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올화라는 석목이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용히 물었다.
“아, 아닙니다.”
석목은 시선을 거두어들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두 분, 어서 앉으십시오.”
올화라가 석목 옆으로 걸어가더니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가려고 할 때, 풍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풍리는 멍하니 서서 거대한 회색 원숭이 석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석목이 풍리에게 물었다.
하지만 풍리는 마귀가 쓰인 듯이 멍하니 서서 회색 원숭이 석상을 바라보았고, 그는 가슴에 회색 목걸이를 하나 걸고 있었는데 목걸이에서 회색빛이 번쩍였다.
석목은 풍리의 가슴에 있는 목걸이를 바라보며 안색이 굳더니 무엇인가를 물어보고자 입을 벌렸다.
이때 먼 곳에서부터 큰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대전 바깥에 있던 흑마족들이 혼란에 빠졌다. 큰소리를 들은 올화라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건 무슨 소리입니까!”
석목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먼 허공에 검은 점이 박혀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는데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저건 무엇입니까?”
석목이 다시 물었다.
“사자님, 저것은 고만족의 전함입니다!”
올화라가 대전에서 걸어 나가 석목 옆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집합한다. 사자 어르신이 이곳에 계시니 공격해오는 적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피풍의를 두른 노인이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중년 흑마족에게 지시했다.
중년 흑마족은 곧바로 몸을 날렸다.
“고만족? 그들은 왜 전함을 이끌고 와서 공격을 하는 건가요?”
석목은 풍리를 한 번 바라보더니 전음으로 물었다.
조금 전에 흑마족 중년은 고만족이 이 행성을 침범했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풍리도 그 심각한 상황을 석목에게 말해 주었지만 석목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석 형이 몰라서 그러는데 흑마성역은 예전부터 선계 곤륜 성역의 보화성조를 모셨어. 곤륜성허와 천정은 각각 나뉘어 성역 세계를 통치했지.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곤륜성허와 천정이 대립하게 되었지.”
풍리가 말했다.
“천정!”
석목은 안색이 굳었다.
“천 년 전, 보화성조가 갑자기 실종되었고, 곤륜성허도 파괴되면서 사라져버렸지. 그러자 믿음을 잃어버린 흑마족은 천 년 동안 혼돈을 겪으면서 두 파로 나뉘었어.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그 중 일부는 보화성조를 배신하고서 천정에 빌붙었다고 하더라고. 지금 앞에 있는 이 사람들이 여전히 보화성조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고.”
풍리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저 전함은 또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고만족과 천정은 또 어떤 관계인가요?”
석목은 풍리가 하는 말을 듣더니 대충 상황 파악을 하고는 계속해서 물었다.
“고만족은 오래 전부터 천정에 속한 걸로 알고 있다.”
풍리가 말했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오라 부족의 흑마족들이 곳곳에서 날아와 광장에 모였다. 광장에 수백 명이 모였으며 대부분은 지계 실력이었다. 천위 경지는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먼 곳에서 보이던 검은 점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고, 그것은 매우 큰 전함이었는데 위에 노란 피풍의를 두른 거인들이 서 있었다.
석목은 동공이 줄어들며 깜짝 놀랐다.
노란 피풍의를 두른 거인들을 백원왕의 꿈에서 본 적이 있었다. 꿈속에서 이 거인들은 백원왕의 거대 원숭이 대군과 어떤 행성에서 격전을 치렀다.
꿈속에 나타났던 노란 피풍의를 입은 거인들에게 매우 깊이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석목은 거인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원왕의 원수는 정말로 천정이었구나.”
석목은 머리가 복잡했고, 천정은 지금 군대를 동원하여 흑마 성역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흑마 성역의 보화성조가 사라진 건 아마 천정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그의 머릿속에 빛이 번쩍였다. 연나는 예전에 천정에 아주 강한 적의를 드러낸 바가 있었고, 두서없던 일들이 점점 뚜렷해졌다.
잠깐 사이에 검은색 전함은 이미 광장 근처까지 다가왔다. 전함 위에 있던 거인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전함은 매우 컸는데 수십 장은 되어 보였고, 선체는 길쭉한 배 모양이었으며 기괴한 그림과 글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었는데 어떤 토템 같았다.
선체 앞쪽은 검은색 짐승의 머리 모양이었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이 생생했다.
전함 위에는 노란 거인이 수십 명이나 서 있었는데 전부 방대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 중에 수련 경지가 천위인 자들도 열 명이 넘게 있었으며 대부분은 지계 정상이었다.
노란 거인들 말고도 백 명 가까이 되는 흑마족들이 전함에 서 있었다. 아마 풍리가 말한 흑마족의 배신자들일 터였다.
광장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오라 부족,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너희가 가진 모든 영석 광산과 영석을 내놓고, 곤륜 제단과 보화 석상을 무너트려서 천정에 충성을 바치거라. 그러지 않으면 오늘이 바로 너희 종족이 멸망하는 날이 될 것이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노란 피풍의를 두른 중년 남자가 앞으로 한 걸음 걸어 나오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그 중년 남자는 키가 열 장이나 되었고, 실력도 천위 정상 경지였다.
“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천정에 굴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올화라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싸우자! 투항은 없다!”
등 뒤에 서 있던 오라 부족 사람들이 큰소리로 외쳤고,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퍼졌다.
“너희가 그토록 죽기를 원한다면! 공격!”
거인이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팔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