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연나의 소환
“왜 함께 움직이지 않고서 혼자 이 인형들에게 묶여있었던 거지?”
석목이 물었다.
“양덕이 있는 무리와 함께 돌아다녔는데, 우연히 한 보라색 안개 벽에 빠져버린 후 숨어있던 금제가 작동했어. 그래서 나만 이곳에 전송이 되어서 혼자 보물을 찾아다니던 참이었지. 인형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는데 다행히 네가 나타난 거야.”
서문설이 고개를 들어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때마침 이 근처로 전송되었는데 네 기운이 느껴지더라고.”
석목은 사실인 듯 아닌듯한 투로 말을 내뱉었다.
“아, 함께 다니던 임도 사저는? 둘이서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왜 따로 다니는 거야?”
서문설이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도 눈치를 챘겠지만 그녀는 임도가 아니야, 음…… 내 친구야. 아, 나는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야할 것 같아.”
석목이 말했다.
석목은 그와 연나의 사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석목은 서문설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한 번 살펴보더니 단약 두 알을 꺼내서 건네주었다.
서문설은 사양하지 않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단약을 받으며 곧바로 삼켰다. 그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서문설이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하자 두 사람은 말을 몇 마디 더 주고받으며 금소채를 비롯한 옛사람들에대해 대화를 이어갔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아, 그 종수라 불리던 아씨는 어떻게 살고 있어? 그때 그녀가 너를 위해 승선대회 자격까지 포기했잖아.”
서문설이 물었다.
서문설이 하는 말을 들은 석목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천봉 혈맥을 지니고 있었어. 각성을 했을 때, 하늘에서 어떤 신비스러운 여인이 나타나서 그녀를 데리곤 어디론가 사라졌어. 남해성에서 나온 후로 계속 그녀를 찾고 있는데 아직 찾지 못했어.”
“종 아씨가 천봉 혈맥을 각성했다고? 그럼 천봉 일족이 데려가지 않았을까? 천봉 일족은 혈맥을 각성한 사람이 밖에서 떠돌아다니는 꼴을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거야.”
석목이 하던 말을 들은 서문설은 깜짝 놀랐다. 그러더니 갑자기 단호하게 말했다.
“천봉 일족? 너 혹시 천봉 일족이 있는 곳을 알고 있어?”
석목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기대에 찬 표정을 지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석목이 이런 반응을 보이자 서문설은 표정이 복잡해졌다.
“종문의 전적(典籍)에서 읽은 적이 있어. 천봉 일족은 영원(靈猿), 와요처럼 전부 태고 팔족에 속하는데 그 세력이 은밀하고 강대하기로 유명해. 천봉 일족이 어디에 머무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군.”
석목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실망할 필요는 없어. 천봉 일족으로 돌아간다는 건 종 아씨에게도 큰 기회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걷길 원하는데! 그리고 네가 실력만 뛰어나다면 종 아씨가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종 아씨를 꼭 찾을 수 있을 거야.”
서문설이 위로를 건네며 말했다.
“지금 실력으로는 그녀를 찾아낸다고 할지라도 데려올 수는 없을 거야.”
석목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너는 고작 무도 수준이었는데, 그때 나를 처로 맞겠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이미 천위 존재가 되어서 나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니.”
서문설은 깊은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 나는 해냈어. 그런데 너는 이미 떠났지.”
석목은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
석목이 하는 말을 듣던 서문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드러내더니 막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약에…… 만약에 그때 내가 승선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니까 떠나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만약에……”
“만약 우리가 그런 일들을 겪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곳에서 만나는 일도 없었겠지.”
석목이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만약은 없어. 다 케케묵은 옛일이니 말을 말자.”
서문설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서문설을 바라보면서 가슴을 울리는 은은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석목은 마음이 흔들렸다. 석목은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어렸다.
“이제 계획이 뭐야?”
석목이 물었다.
“이 일이 끝나고 종문으로 돌아가면 아마 한동안 폐관수련을 할 것 같아. 그동안 많은 일을 겪으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어. 내 실력이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서문설이 말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을 망설이더니 참지 못하고 말했다.
“실은 나는 몇 년 동안 행성들을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어. 그 동안 수많은 일들을 겪었지. 통천선교의 승선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일들이 어떤 음모의 한 고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이진종도 이 음모를 이루는 한 고리일 뿐이고. 내 예상인데 미양 성역은 점점 불안해질 거야. 그러니까 너도 이진종을 빨리 벗어나는 편이 좋을 거야.”
서문설은 석목이 진심어린 충고를 하자 얼굴에 기쁜 기색을 드러났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진종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 하지만 이미 이 길을 선택했는데 그 길을 위해서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했어. 이제는 쉽게 돌아갈 수 없어. 계속 이 길을 가야만 할 거야. 그렇다고 이진종을 벗어나면 안전해질까? 이 망망한 성역의 세계에서 스스로 강해져야만 비로소 안전해질 수 있어.”
서문설은 눈에 결연한 기색을 띈 채로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서문설이 하는 말을 들은 석목은 입을 살짝 벌리더니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보월궁, 묘수동부 속.
하얀 동굴 속에서 눈부신 빛이 번졌다. 일곱 빛깔 소용돌이가 주변에서 돌고 있었다.
단단하게 뭉친 칠색 빛기둥이 허공에서 떨어졌으며 동굴에 자리한 석대 위의 커다란 꽃봉오리에 내려앉아 꽃봉오리를 투명하게 비쳤다.
몸에 갑옷을 두른 금색 사람 인형이 손에 넓적한 검을 들고서 둥근 방패를 앞으로 치켜들며 조용히 석대를 지키고 있었다.
이때 칠색 빛기둥이 흔들리더니 금색 부문이 줄줄이 나타나 빛기둥을 감싸고 내려와서 꽃봉오리 속을 뚫고서 지나갔다.
윙!
하얀색 꽃봉오리 위에 칠색 빛이 크게 번졌으며 커다란 꽃잎이 주변으로 층층이 펼쳐졌다.
꽃잎이 펼쳐지자 그 속에서 아리따운 그림자가 나타났다.
연나가 옅은 파란색 궁장을 입고서 나타났다. 머리를 가볍게 걷어 올린 연나는 눈썹이 짙었고 눈동자는 맑았다. 연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하얀 꽃 속에 가부좌를 틀고서 앉아있었다.
손에는 칠색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는데 기운을 잘 숨긴 듯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장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연나 옆으로는 빛이 밝혀져 있었는데 그곳엔 크기가 한 척 정도 되며 피부가 분홍빛을 띠는 작은 여자 아기가 누워있었다. 이목구비가 연나와 매우 흡사했는데 웃통을 벗은 채로 허리에 하얀 꽃잎을 한 줄 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매우 귀여웠다.
연나는 응결된 성배를 바라보며 오른쪽 손가락을 튕겨서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러자 아기가 천천히 날아올라 연나의 손가락에서 한 바퀴 돌더니 손끝에 멈췄다.
한참 뒤, 여자 아이는 피곤한 듯이 입을 벌려 하품을 하더니 연나의 손에서 날아올라 이마를 향해 날아갔다.
연나의 이마에 그려진 연꽃 모양 영문에서 검은빛이 번쩍였고, 여자 아이가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아이가 스며들자 연나는 기운이 순식간에 폭발하였다. 형태가 없는 기운 파동이 주변으로 뿜어지며 성계 강자의 기운이 그대로 드러났다.
연나가 천천히 일어서며 발아래에 있던 커다란 꽃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점점 희미해지며 사라져버렸다.
연나는 손에 든 칠색 나뭇가지를 한번 훑어보더니 천천히 두 눈을 감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연나가 두 눈을 감고서 신식으로 칠색 나뭇가지를 훑어보았다. 그러자 머릿속에 궁전 건물들과 산과 하천이 그림처럼 줄줄이 나타났다.
이 그림들은 곤륜성허의 몇몇 구역들이었다.
잠시 후에 연나가 두 눈을 뜨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칠보묘수(七寶妙樹)를 갖게 되었으니 아마 몇몇 구역은 직접 통제를 할 수 있겠지.”
이어 연나는 손에서 칠색 빛을 드러내며 허공을 연이어 짚었다.
* * *
곤륜성허 속, 한 고리 모양 건물 속.
“그동안 참 많은 일을 겪었구나. 청란성지까지 들어가다니.”
석목은 자신이 남해성을 떠나며 겪었던 일들을 서문설에게 대충 말해주었고, 서문설은 계속 감탄만 했다.
“곤륜성허가 닫힐 때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는데 계획이 있어?”
석목이 물었다.
서문설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더 깊게 들어갈 생각은 없어. 지금 내 실력으로는 안에 있는 금제와 인형들을 상대할 수 없어. 왔던 길을 찾아서 다시 돌아가려고. 바깥쪽 길이 대체로 안전할 거야.”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 헤어지자.”
서문설은 격식을 차린 인사를 하지 않고서 석목에게 가볍게 기대며 말했다.
석목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여긴 매우 위험하니 내가……”
석목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 밑에서 영력 파동이 전해졌다. 석목은 피하지도 못한 채로 한 줄기 빛에 이끌려 자리에서 사라졌다.
서문설도 몸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석목처럼 사라져버렸다.
* * *
잠시 후에 보월궁의 옥석이 깔린 땅 위에 갑자기 하얀색 부문이 나타나더니 빛이 번쩍이며 두 사람이 그곳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석목과 서문설이었다.
대전에 나타난 두 사람은 안쪽 깊은 곳에 서 있는 살아있는 듯한 백옥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서문설과 석목은 넋이 나간 듯이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조각상의 빼어난 미모 때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이 조각상이 어떤 신분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연나……”
석목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때 석목과 가까운 곳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석목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연나가 파란색 궁장을 입고서 옷자락을 휘날리며 대전 한쪽에서 걸어 나왔다.
연나는 이제 막 성계에 진입하여 원래부터 뛰어난 용모가 더 아리따워졌다. 연나가 취하는 동작 하나 하나에서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서문설도 용모가 뛰어났지만, 연나와 비교하자면 여전히 차이가 났다.
이런 차이는 눈으로 느끼는 차이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였다.
“연나, 성배를 응결시켰어?”
석목은 연나가 풍기는 성계 기운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좋아하며 말했다.
성계 강자!
서문설은 연나의 빼어난 미모에만 취해있던 터라 연나가 풍기는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석목이 말을 하고 나서야 기운을 깨달은 서문설은 얼굴에 놀라운 기색을 드러냈다.
서문설이 입을 살짝 벌리며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할 때, 순간 몸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고, 서문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부드럽고 강력한 하얀빛이 연나의 소매에서 튀어나와 서문설을 감고서 대전 구석으로 떨어졌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연나에게 서문설을 해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
서문설이 무엇인가를 물으려고 할 때, 연나는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력한 영압이 밀려왔다.
서문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마치 얼음 웅덩이에 떨어진 것만 같은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에 감히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