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화. 일촉즉발
연나는 서문설을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한 손을 허공에서 흔들었다. 허공에서 빛이 용솟음쳤고, 이어 투명한 광막이 나타나더니 연나와 석목을 감쌌다.
석목은 서문설을 한 번 바라본 후, 고개를 돌려서 연나와 대화를 나누었다.
광막 밖에 있던 서문설은 두 사람의 움직임만 보일 뿐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자 눈에는 적막한 기색이 스쳤다.
연나는 석목의 어두운 안색을 살펴보며 말했다.
“내가 예전에 말했지? 그녀의 몸속에 알 수 없는 힘이 있어. 그래서 나는 그녀를 믿을 수 없어. 하지만 너를 봐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지는 않을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그녀가 절대 알아서는 안 돼.”
“알았어.”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연나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갑자기 눈썹을 치켜뜨고는 석목을 훑어보며 물었다.
“너 자취각에 갔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석목이 의아한 듯이 물었다.
“천기곤초는 네가 가지고 있지? 줘 봐.”
연나가 말했다.
“그래.”
석목은 멈칫하더니 이내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이 손을 흔들자 여의빈철곤이 천기곤초과 함께 손에 나타났다.
연나는 곤봉과 곤초를 받아 들고는 자세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곤초에 새겨진 꽃무늬를 가볍게 매만지며 복잡한 기색을 드러냈다.
잠시 후에 연나는 여의빈철곤을 석목에게 건네며 물었다.
“이 물건이 네 손에 들어간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연나가 하는 말을 듣던 석목은 생각에 잠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연나는 사령계면에 들어가기 전에 곤륜의 주인이었을 터였다. 그리고 공수자와 풍리를 비롯한 사람들이 말하는 보화선자일 터였다.
석목은 우연히 백원왕의 정혈을 물려받게 되었으며 번천곤 속에서 백원왕과 피로 계약을 맺었으니 백원왕의 후예였다.
석목은 곤봉을 받아서 거둔 후에 입을 열었다.
“아, 자취각은 이미 파괴되었어. 그래서 자취로를 가져왔는데 많이 손상되었더라고.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석목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보라색 연기로가 ‘쿵!’하고 대전에 나타났다.
연나는 자취로를 한번 훑어보았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흔적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연나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자취로는 아마 이미 버려져서 쓸모가 없어졌을 거야.”
잠시 후에 연나가 눈을 뜨며 말했다.
“뭐?”
연나가 하는 말을 듣던 석목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연나는 자취로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천천히 말했다.
“공수자는 곤륜에서 제일가던 연기 대사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어. 공수자가 정혈로 자취로를 봉인하여 혼을 담아 제련을 했기 때문에 천지곤초가 천 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빛을 볼 수 있었지. 그리고 곤륜에 있던 영보 자취로도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니야. 이 모든 것은 공수자가 기꺼이 환생을 할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자취로에 붙어서 신혼에 남은 마지막 힘으로 연기를 한 덕분이지.”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는 걸까?”
석목이 물었다.
“공수자는 평생 동안 연기에만 집중했어. 미쳐있을 정도였지. 공수자의 연기 실력은 선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야. 이 자취로는 공수자가 연기를 할 때 사용하던 물건인데 목숨처럼 아끼던 물건이었어. 자취로를 마지막으로 머물 자리로 선택한 것도 이상할 점은 없지.”
연나가 천천히 말했다.
“그럼 공수자의 신혼을 다시 모을 수 있을까?”
석목은 공수자가 신혼으로 나타났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자취로는 혼을 기르는 향로가 아니야. 자취로에 붙은 공수자의 잔혼이 천 년이 흐르는 동안 흩어지지 않은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야. 신혼이 흩어지기 직전이었는데 자취로와 붙어 있었으니 환생은 절대 할 수 없어. 하지만 이 자취로는 혼의 힘을 써서 딱 세 번만 더 공수자가 연기를 하던 실력을 재현할 수 있지. 절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돼. 꼭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해. 그것이야 말로 공수자에게 최고로 경의를 표하는 일이야.”
연나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연나가 하던 말을 들은 석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취로를 바라보는 석목은 눈빛이 더욱 신중해졌다.
* * *
이 시각, 보월궁 바깥 빈 땅에는 사람들이 수십 명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었다.
석목이 아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이진종의 막린회, 수봉월, 양덕 그리고 청란성지의 조극, 자릉 등등. 더 많은 제자들이 계속해서 이곳으로 모였다.
서북쪽에 있던 한 커다란 시체 옆에는 스무 명 정도 되는 흑마족 무리가 마기를 두른 채로 모여 있었다.
흑마족들은 전부 천위 중기에서 후기였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던 중년 남자였는데 중년 남자는 천위 정상 강자였다.
“이곳에는 고만족 시체가 심심찮게 보이는군. 아마 고만족은 보월궁을 찾아냈을 거야. 그런데 어떤 변고를 당해서 처참하게 죽어 버린 것이겠지.”
한 흑마족 여자가 말했다.
“물론이지. 고만족이 도발한 사람은 보화성……”
또 다른 흑마족 사람이 말을 하려다 무엇인가 떠오른 듯이 다시 말을 삼켜버렸다.
“구십라(鸠什罗)어르신, 이제 어떻게 합니까?”
흑마족 여성은 조금 전에 말실수를 한 사람을 한번 노려보더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던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칠보묘수를 가져 와야 해. 그렇지 않으면 어르신을 볼 면목이 없어.”
구십라는 보월궁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흑마족과 멀지 않은 곳에 열 명이 넘는 축운검파 제자들이 검 모양 눈썹을 드리운 청년을 둘러싸고 있었다.
“소주님, 반 시진 전에 빛이 하늘을 찔러서 많은 영력이 이곳으로 모였습니다. 이곳에 엄청난 보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이는 축운검파 제자가 눈썹이 검 모양인 청년에게 말했다.
“아닌 것 같구나. 영력이 들끓으며 모였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이런 광경은 보물이 나타날 때가 아니라 어떤 강자가 진급을 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축운검파의 소주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소주님 말씀도 일리가 있지만 이곳엔 금제가 드리워있습니다.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니, 아마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살펴 볼 만 합니다.”
나이가 많은 제자가 계속 말했다.
“음. 세력들이 조금 전에 일어난 기이한 현상에 이끌려서 이곳에 모여들었다. 우선 조금 더 지켜보자.”
축운검파의 소주는 나이가 많은 제자가 하던 말을 끊고는 눈을 감고서 휴식을 취했다.
보월궁의 계단 밑에는 양덕을 비롯한 이진종의 제자들 열 몇 명이 서 있었다. 이진종의 제자들은 금색 결계를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때 막린회, 수봉월을 비롯한 또 다른 이진종의 제자들이 양덕 일행에게 걸어왔다.
양덕이 고개를 들어서 다가오는 일행들을 발견하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여러분, 종문의 뛰어난 제자 여러분들. 그간 우리가 종문에서 어떤 일을 겪었던 간에 이곳에서는 힘을 합쳐서 함께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막린회는 양덕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신경 쓰지도 않고서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막린회가 하는 말을 듣던 양덕은 주변 제자들을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기 전, 아마 여러분들의 사존께서도 지시를 내리셨을 것입니다. 보월궁에 들어온 후, 종문을 위해서 장태신장(戕泰神將)의 유해와 법보를 찾으라는 지시 말입니다.”
“그렇긴 하다만 지금 상황은……”
양덕은 말을 하며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 * *
다른 대오들과 달리 청란성지의 제자들은 전부 한 곳에 모이지 않고서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채 흩어져 있었다.
자릉은 청란성지의 제자들 세 명과 함께 있었는데 표정은 제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았지만, 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간간히 조극을 훑어보고 있었다.
조극은 주위에 모인 사람이 두 명 밖에 없었지만 그 둘은 실력이 대단했다. 전부 천위 후기 경지였다.
잠시 후에 이진종의 제자들이 흩어져 금색 결계를 둘러쌌다. 그리고 손에 보라색 깃발을 하나씩 꺼내더니 결계 변두리에 꽂았다.
그 광경을 본 흑마족 사람들은 시끌벅적해졌다.
구십라는 사람들을 데리고서 궁전 문 앞으로 다가오며 이진종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곳은 우리가 가장 먼저 발견한 장소입니다. 우리가 발견한 곳이니 다들 손 떼십시오.”
“말도 않되는 소리 그만 하십시오. 다들 여기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 발견하고서 모인 겁니다. 먼저 오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이곳은 원래 주인이 없는 곳입니다. 당신들이 먼저 왔다고 해도 여길 독차지할 명분은 없지요.”
막린회가 반박을 하며 말했다.
“우리는 원래 머무는 성역이 다른 이족입니다. 세 성주님께서 아량을 베풀어 함께 이곳에 들어오게 허락을 한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분수도 모르는 것들.”
한쪽에 서 있던 축운검파의 소주가 소리를 지르며 몸에 검의 기운을 크게 드러냈다.
청란성지 사람들은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한쪽으로 모여들었다.
흑마족과 삼대 성지의 제자들이 시끌벅적하게 다퉜다. 분위기가 격해져서 곧 격전을 치를 기세였다. 이때, 보라색 빛 한 줄기가 무리 속에서 튀어나와서 날아가더니 소리도 없이 한 흑마족의 몸에 떨어졌다.
펑!
보라색 빛은 위력이 크지 않았지만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고 있던 흑마족은 가볍게 힘에 밀려서 광막 결계에 부딪쳤다.
“누군가 기습을 했다!”
“찰극호(扎克乎)!”
퍽!
결계에 드리운 금빛이 흔들리며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흑마족 사람을 감싸고서 안으로 삼켜버렸다.
흑마족 사람은 한쪽 팔만 내민 채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한 채 금색 액체가 되어서 녹아버렸다.
“굉장한 힘이다!”
삼대 성지의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더니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싸울 테면 당당히 나와서 싸워야지 이런 비열한 짓을 하다니. 이게 너희 성지에서 가르친 처세술인가?”
흑마족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순간 흑마족들은 몸에서 검은 안개가 들끓더니 몸이 크게 불어났다. 그리고 머리와 팔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고, 엄청난 위력을 지닌 마기가 삼대 성지의 제자들에게로 흘러갔다.
“이 염치없는 흑마족들부터 죽여 버리자!”
“죽여 버려!”
“죽여!”
그 모습을 본 삼대 성지의 제자들은 전투 의지를 불태우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몸에 빛이 번지며 앞으로 공격을 날렸다.
양측은 이미 성역에서 치른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났던 터였다. 헌데 이런 일이 터지게 되자 일촉즉발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탱!
축운검파 소주의 등에 꽂혀있던 장검이 하늘로 치솟으며 용이 울부짖는 소리를 냈다. 방대한 검의 기운이 몸을 감쌌다.
축운검파의 소주는 낮게 소리를 지르며 장검으로 허공을 찔렀다. 장검에서 크기가 십 장 정도 되는 맹렬한 검빛이 튀어나와 구십라의 머리로 날아갔다.
구십라는 온몸에 마기를 두르며 이미 머리가 세 개에 팔이 여섯 개 달린 거인으로 변신하였다. 팔 여섯 개는 각각 마보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그 중 검은색 조롱박이 뒤집히며 날아오더니 주둥이에서 검은빛을 토해냈다. 이어서 조롱박에선 짙은 마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와 하늘을 뒤덮으며 축운검파 소주의 장검을 감싸려고 했다.
“죽어!”
하지만 축운검파 소주는 기세가 줄어들지 않았다. 축운검파의 소주가 손에 든 장검이 강하게 흔들렸다. 그러자 그림자가 나타나 검을 촘촘하게 감싼 후에 날카로운 빛을 뿜어냈고, 검은 마기는 날카로운 빛에 닿자마자 산산조각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