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579화 (579/916)

579화. 기령(器靈)

세 사람이 떠나자 제단은 싸움의 도가니가 되었다. 죽은 제자들의 피가 제단 바닥을 붉게 물들었다.

연나는 제단의 하늘 위에 서 있었다.

몇몇 제자들이 도망가는 걸 보았지만 쫓아가지 않았다.

연나는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순간 그녀는 몸을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멈추었다.

연나는 이제 막 성계 경지에 도달했고, 무리하여 곤륜 속에 설치한 금제들을 통제했으며 큰 신통법까지 시전해서 원기가 많이 상했다.

연나는 눈을 감고서 천천히 토납을 몇 번 하더니 안색이 조금 돌아왔다.

이때, 연나 앞에 보라색 빛이 반짝이며 자릉이 나타났다. 자릉은 몸을 굽혀 연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주인님!”

자릉은 목이 메어 연나를 불렀다.

“너는……”

연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눈빛으로 자릉을 바라보았다.

자릉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활짝 웃더니 두 손으로 팔짱을 꼈다. 자릉은 몸에서 일곱 가지 빛을 뿜어냈다.

자릉 뒤에는 칠색 나뭇가지 허영이 나타났는데 칠보묘수와 똑같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보아(寶兒)구나!”

연나는 기억이 떠오른 듯이 눈을 반짝였다.

“맞습니다. 주인님!”

자릉은 감격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연나는 눈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 그리고 자릉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릉은 결국 참지 못하고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자릉이 서러워하며 말했다.

“주인님, 드디어 오셨군요. 저는 그동안 너무 무섭고 외로웠습니다.”

“괜찮아. 이제 내가 돌아왔어. 다 좋아질 거야.”

연나가 자릉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릉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보아, 그동안 이곳에서 계속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때 곤륜에 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거야? 영아(靈兒)는?”

연나는 단숨에 많은 질문을 던졌다.

“주인님. 그때 주인님이 곤륜을 떠난 후, 장태가 그 틈을 노려서 고만족 대군을 이끌고 곤륜을 침범했습니다. 보월궁을 지키기 위해서 저와 언니는 칠보묘수에서 벗어나 보월대진을 작동시켜 장태를 죽여 버렸습니다. 주인님을 찾기 위해서 저와 언니는 이 몸을 빌린 후에 곤륜에서 나갔는데, 신혼의 힘을 많이 써서 다시는 곤륜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허나 다행히도 이렇게 기회가 생겨서 다시 궁전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자릉이 말했다.

“그랬구나.”

연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긴 숨을 내뱉었다.

“저와 언니는 제멋대로 행동을 해서 보월궁을 벗어났습니다. 주인님, 벌을 내려주세요.”

자릉은 말을 하며 허공에서 무릎을 꿇었다.

연나는 가볍게 손을 들며 부드러운 힘으로 자릉의 몸을 감싸면서 말했다.

“너와 영아는 일편단심 곤륜만 생각했다. 내가 왜 너희를 탓하겠느냐.”

“주인님 감사합니다! 아, 그때 보월궁을 떠난 후로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이제야 돌아오셨습니까? 저와 언니는 주인님을 찾기 위해서 곳곳을 떠돌아다녔는데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자릉이 또 물었다.

“자세한 건 나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혼이 부서질 뻔했던 것은 사실이지. 아마 천정과 관련이 있는 것 같구나……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어. 그리고 최근에야 나는 실력을 일부나마 회복했단다.”

연나가 복잡한 눈빛을 드러내며 말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천정!”

자릉은 뼈에 사무치는 분노가 눈에 어렸다.

“큰일을 겪으면서 다시 돌아온 것만으로도 행운이란다. 내가 실력을 회복하면 곤륜에 있던 모든 생명들을 위해서 꼭 정의를 되찾아야 해.”

연나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며 말했다.

“네, 저는 주인님을 믿습니다. 꼭 해내실 겁니다. 아, 그 석목은요? 주인님과 함께 있었던 게 아닌가요?”

자릉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엇인가 생각난 듯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지금 궁전에서 폐관수련을 하고 있어.”

연나가 말했다.

“석목이라는 자도 조금 이상합니다. 처음에 석목을 만났을 때 몸에서 백원 장군의 혈맥 기운을 느꼈어요. 그리고……”

자릉이 말했다.

“그건 그 자가 선택했단다…… 아마도 하늘이 품은 뜻이 있겠지. 석목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나는 지금도 명계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연나가 천천히 말했다. 순간 연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기운이 흔들렸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자릉이 안색을 바꾸며 물었다.

“괜찮아. 그동안 너무 많은 원기를 소모했군. 조금 휴식을 취하면 괜찮아 질 거야.”

연나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럼 우선 원기부터 회복하세요. 제가 가서 전부 죽여 버리겠습니다.”

자릉이 차가운 빛을 뿜으며 말했다.

“아니다. 이번에 곤륜이 다시 세상에 드러났으니 천정이 모를 리 없겠지. 저놈들을 죽여도 아무 소용없어. 그리고 이것은 내가 추측하는 건데, 이번에 들어온 놈들 중에 아마 천정에서 보낸 척후가 있을 거야. 우선 천정과 충돌을 하면 안 돼. 실력부터 빨리 회복을 해야만 해.”

연나가 말하며 칠보묘수를 꺼내들었다.

자릉은 내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나는 몸에 일곱 가지 빛이 크게 번지더니 칠보묘수 속으로 빛을 한 줄기 날렸다.

칠보묘수에서 빛이 크게 뿜어져 나오더니 일곱 가지 빛이 물결을 만들어내어 주변으로 흩어졌다.

이어서 칠보묘수가 풍기는 기운이 폭발하였고, 가볍게 허공을 그었을 뿐인데 허공이 층층이 부서져 버렸다.

칠색 빛이 연나의 몸속으로 들어가자 피곤해 보였던 연나는 얼굴이 빠르게 나아졌으며 잠깐 사이에 원기를 회복했다.

연나는 보월궁을 바라보며 복잡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칠보묘수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자 칠색 빛이 나타나 보월궁을 감쌌다.

이어서 칠색 빛이 반짝이며 보월궁 속으로 스며들어가더니 사라져 버렸다.

이 모든 일을 마친 연나는 또 다시 손을 흔들어서 칠보묘수를 거두어들였다.

연나가 몸에서 검은빛을 반짝이자 네모난 법보가 하나 나타났는데 그것은 취선대였다.

취선대가 검은빛으로 변하더니 백옥 돌기둥이 있는 빈 땅에서 빙글빙글 돌며 죽어버린 천위 제자들의 시체를 속으로 빨아들였다.

연나가 한 손을 흔들자 허공에 균열이 하나 나타났고, 연나는 균열을 비집고서 들어가 사령계면으로 날아가 버렸다.

* * *

곤륜비경 밖.

수많은 빛들이 다급하게 날아왔다. 빛들이 멈추자 몇몇 제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제자들은 조극, 축운검파의 소주, 막린회,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은 아무도 쫓아오지 않자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목역(穆易)! 우리 청란성지의 뛰어난 제자들이 전부 네 손에 죽어버렸어!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조극이 축운검파의 소주를 바라보며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흥!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우리 축운검파의 제자들 중에 족히 다섯 명이나 네 손에 죽어버렸어. 내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언젠가는 꼭 갚아줄 거야.”

조극이 그리 말하자 화가 난 목역이 큰소리를 질렀다.

막린회는 안색이 검게 타버린 듯이 어두워졌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두 사람은 금제에 갇혀서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었다. 비록 환술에 걸렸기 때문이었지만, 두 사람이 직접 죽인 건 사실이었다.

막린회는 이진종 각 도관의 대표 제자들이 제단에 갇혀서 처참하게 죽어버리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혼자만 살아남아 돌아온 막린회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성주와 장로들에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조극과 목역은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더니, 결국은 싸우지 않고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막린회도 두 사람과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때, 날아가고 있던 조극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며 입가에 묘한 미소를 띠었고, 다시 큰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 * *

보월궁에서 봉변을 당하며 수많은 제자들이 죽어버렸다. 삼대 성지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고, 거의 전멸을 당했다는 소식은 아직 곤륜 곳곳에 남은 제자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남은 시일 동안 살아남은 제자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더는 싸움을 벌이지 않았으며 묵묵히 외곽으로 돌아가 탐색을 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구십 일이라는 기한이 다가왔다. 곤륜성허 속, 살아남은 삼대 성지의 제자들과 흑마족들은 입구 근처에 모여서 공간 통로 속으로 들어갔다.

* * *

부석 성해.

곤륜성허 주변에 결계가 다시 두터워졌다.

이때, 속승 진인, 신도남, 목천절, 시무야 네 사람이 허공에 서서 각자 법보를 시전하며 온힘을 다해 공간 통로를 열어두고 있었다.

신경 강자 네 명은 공간 통로를 석 달이나 열어두었고, 네 사람은 지금 많이 지쳐있었다.

곤륜성허 주변에 드리운 금색 구름이 흔들렸는데 매우 불안정했다. 이제 다시 공간 난류 속으로 날아가려는 것만 같았다.

네 세력의 성계 장로들은 광장 주변에 서서 목을 빼며 공간 통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기한이 다가왔기 때문에 제자들이 얼마나 수확을 얻었을지 궁금했다.

곤륜성허에는 보물이 워낙 많아 큰 수확을 얻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제자들이 별 탈 없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랐다.

“우리 여덟 도관의 제자들이 얼마나 수확을 얻었을지 궁금하네요. 팽 관주, 이화관에서 가장 많은 제자를 보냈으니 저와 내기나 한 판 하시겠습니까? 어느 도관의 제자가 가장 많은 수확을 얻었을지 내기하는 건 어떠신가요?”

태택관의 관주 운몽택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운 관주님이 노름을 한 판 하자 하시는데 제가 거절할 리 있겠습니까? 무엇을 걸겠습니까?”

팽악은 석목과 연나가 보물을 찾았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팽악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팽 관주님께서 만수유정(萬水柔晶)을 한 개 구하셨다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법보를 하나 제련하는 중인데 때마침 그 재료가 필요해서요. 저는 이것을 걸겠습니다.”

운몽택은 웃으며 검고 긴 채찍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 채찍은 어떤 선죽으로 제련을 한 것 같았는데 토막들로 나뉘어져 있었다.

“흑죽편(黑竹鞭)! 운 관주님께서 이런 보물을 거시다니, 정말 이길 자신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팽악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말했다.

운몽택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운 관주님이 이 정도로 흥미롭게 생각하시니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팽악이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들떠있던 다른 관주들도 내기를 시작했다.

청란성지와 축운검파도 마찬가지로 분위기가 많이 여유로워졌다.

이때, 허공에 난 공간 통로에서 빛이 번쩍이며 제자들이 튀어나왔다. 청란성지의 제자들이었는데 서른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조극은 몇몇 청란성지의 장로들에게로 다가왔다.

속승 진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청란성지의 장로들도 안색이 일그러졌다.

“조극, 왜 너희뿐인가? 다른 제자들은? 뒤에서 따라 나오고 있나?”

하얀 눈썹을 드리운 노인이 조극에게 물었다.

“유 장로님, 이곳에 모인 제자들이 전부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전부 곤륜 속에서 목숨을 달리했습니다.”

조극이 고개를 숙이더니 두 주먹을 꽉 쥐며 슬프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눈썹이 하얀 노인은 안색이 어두워졌으며 목이 메었다.

다른 세력의 성주들과 장로들은 청란성지가 처한 상황을 고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 표정이 심각해졌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세력들은 각각 제자들을 백 명씩 선발하여 곤륜성허 속에 보냈고, 선발된 제자들은 전부 종문에서 심혈을 기울여 뽑은 뛰어난 제자들이었다. 그 중 일부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신경에 도달할 실력자들이었다.

물론 제자들이 전부 안전하게 돌아오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력들은 이번에 곤륜성허로 가며 제자들을 사분의 일 정도 잃으리라 짐작했다. 많아도 삼분의 일을 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곤륜성허에 들어간 제자들 중에 무사히 돌아온 제자들은 삼분의 일도 채 되지 않았다. 아무도 이런 결과를 맞이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이때, 공간 통로에서 빛이 반짝이며 또 제자들이 한 무리 튀어나왔다. 축운검파의 제자들인데 그 숫자는 청란성지보다 더욱 적었다. 고작 스무 명 정도였다.

목천절은 안색이 일그러졌다. 성계 장로들이 짓던 표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목역이 무사히 돌아온 덕분에 다행이었지, 아니었더라면 얼굴이 더 퍼렇게 변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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